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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틱 캐트시 (Lunatic Caitsith)
루나틱 캐트시 (1화)
치직. 치직.
안테나가 말썽인 것일까, 한창 화면이 치직거리던 티브이에서는 무감각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살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요즘 이 동네는 사람들이 꺼리는 구역이 되었다. 연쇄살인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집값이 내려간다며 다들 원성을 터뜨렸고, 대다수는 공포에 떨면서 이스트 구역으로 이사를 했다. 덕분에 그곳은 더 부유한 동네가 되었고, 여기는 거지들이 판을 쳤다. 그 거지에는, 나조차 포함되어 있었다.
계속 꼬리 잡듯 이어지는 살인 사건에 손해 보는 것은 돈 없는 서민뿐이다. 화면에서는 살해당한 시체에 그려진 표식이 확대되어 보도되고 있었다. 선명한 나비 문양. 마치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버터플라이의 날갯짓처럼, 걸어 다니던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가고 있다.
피해자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목격자의 이야기로는, 마치 하늘에다가 줄을 걸어 놓고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신의 춤. 줄타기의 곡예사 같은 모습이라고 난리가 났다. 정신이상적인 살인 행각이었다. 살인당하기 전의 피해자들은 모두, 허공을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마치, 미하엘 엔데의 소설 내용처럼, 별자리(그리스 신화에서 금색의 양모피를 채취하러 간 원정선 아르고호)에 실을 걸어 놓고 곡예를 했던 펠릭스 플리겐 바일이라는 사내 같았다고.
그리고 다음 날 보면 모두 죽어 있는 시체였다. 공통점은, 손목에 그어진 나비 문양. 그것이 다였다. 웬 미친놈 집단의 살인일까. 나는 무심하게 채널을 돌렸다. 이 일대에서 살인이 일어나건 말건 그것은 내 알 바 아녔다. 집값이 내려가든 말든 나는 여기서 살 것이고, 살인이야 뭐, 나만 안 당하면 그만 아니던가.
무심한 신경은 두려움을 느끼기는커녕 권태로움으로 가득 차 결국 티브이를 꺼 버렸다. 아, 살짝 허기가 졌다.
***
평소처럼 마트를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보통 사람들보다 빠른 걸음임에도 표정이 느긋해서 느림보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얼굴에 붙은 게으름은 사실상 무관심에 가깝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머리칼에 부딪혔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머리칼은 회색에 가까워 늘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곤 한다.
색소가 결핍된 것처럼 눈동자조차도 밝고 희뿌연 회색이라 시커먼 동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회색 홍채에 비해 새카만 동공은 꼭 집어삼킬 것처럼 어둡다. 가끔, 거울을 보며 파충류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동공에 혼자 오싹해질 때가 있다. 그 정도로 난 내 외모를 혐오한다.
회색 머리칼인 이유는 어머니가 어렸을 적 나를 임신한 것을 끔찍해하며 약을 먹었기 때문이다. 살충제. 그것에도 끈끈히 버텨 낸 나 스스로 목숨에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의 행동은 거의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는데, 안타깝게도 난 죽지 못했다. 외려 약의 부작용으로 이상한 회색 머리칼과 회색 눈을 가진 채 태어나 버렸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더러운 피라는 소릴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덕에 지금은 이상하고 괴이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
평소처럼 마트에서 들러서 식료품을 사고, 약국에 들러서 신경안정제를 샀다. 난 약이 없으면 안 되는 몸이니까.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크다고 들은 내 까만 동공은 길목을 응시했다. 우둑우둑 관절이 쑤시는 게 금세 비가 올 것 같은 습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길목을 걷는 내내 길의 풍경은 내 망막에 들어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애초에 관심이 없어서, 길목에 뚜렷한 변화가 생겨도 알아채는 것에 둔감한 편이다. 덕분에 새로운 가게가 생기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오늘도 여전히 똑같은 마트에 들러서, 똑같은 식료품을 사고, 똑같은 약국에서, 똑같은 신경안정제를 샀을 뿐이다.
나는 타인들보다 공기에 부유하듯 떠 있는 느낌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김은중. 범의 소리 은, 무거울 중. 내 성향과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 붙어 버렸다. 마치 약에 붙은 라벨처럼, 그저 내 성분의 일부를 표시하는 이름표. 진짜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무관심함, 타인과는 소통이 없는 일상. 그러나 그에 걸맞지 않게 얼마 전까지 난 전화 상담원이었다. 물론, 채 한 달도 안 돼서 잘렸다. 비사교적인 성격에 말주변도 없어서 애초 걸맞지 않았다. 사는 것이 무료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국 다시 백수가 되었다.
난 신경안정제를 씹지 않으면 불안 증세가 도지곤 했다. 내 회색 머리칼을 보면서 상사는 당신 같은 ‘별종’은 필요 없다고 서류를 집어 던졌다. 난 다소 대인과 소통이 어렵고 머리카락 색과 눈 색만 독특할 뿐인데, ‘별종’ 취급을 받았다. 내 눈을 보면서, 피폐한 데다 그저 단색의 세상을 보는 것처럼 염증이 생긴다고 누군가 그랬다. 물고기 눈처럼 퍼석하게 죽어 있다고. 과연, 내가 그랬던가.
“아.”
고개를 들었을 땐, 우중충한 하늘에서 조금씩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축축한 빗물이 정수리에 떨어졌고, 고개를 든 내 콧잔등 위로 뚝, 빗방울이 떨어졌다. 입에 가만히 담배를 문 채 인상을 살며시 찡그렸다.
우산도 가지고 나오질 않았는데.
난 양손 가득히 마트 봉지를 든 채 슬리퍼를 직직 끌었다. 입에 문 담배에서는 연기가 났다.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서두르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걸음걸이는 전보다 미약하게 빨라졌을 뿐이다.
앞머리가 눈을 가려서 눈살을 찡그린 채 머리를 털었다. 빗방울이 좀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꾸물거리는 하늘을 볼 때면 기분이 최저를 찍는다. 나른해지고 몸까지 쑤셨다. 훅훅 끼치는 습한 느낌에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단층 주택 앞에 당도했다.
평소처럼 키를 꺼내고 들어가려던 나는, 곧 현관 앞에 있는 생물체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결국 주머니에서 키를 꺼낸 채, 바닥에 마트 봉투를 내려놓았다. 난 낮게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현관문 앞에 늘어져 있는,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고양잇과 포유류를 응시했다.
사실상 고양이가 아닌 맹수라고 하는 게 옳았다. 새카만 융단과 같은 털에, 몸체는 성인 남자 크기 정도 되었다. 난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맹수를 내려다보면서 슬쩍 턱을 긁적였다.
그랜드(Grand) 생물체. 지구의 산소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생물체들 중 몇몇 종은 몸체가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커졌다. 과거 중생대에 서식했던 공룡이나, 그 외 생물체의 크기가 컸던 것 또한 산소 농도가 짙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시대의 산소 농도가 25%라면, 중생대에는 30%를 넘었다고 한다. 물론, 25% 또한 낮은 수치는 아니다.
어찌 됐건, 몇몇 몸체가 비이상적으로 큰 동물들은 가끔 눈에 띄곤 했다. 가끔 티브이에 나오기도 하고, 옆 동네에서도 나타나기도 해, 이제는 좀 의연하게 넘길 정도였다. 그렇지만 난 이런 고양이와 맹수류는 처음 보았다.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늘이 아직 어둑한데도 비가 그쳤다. 아니, 정확히는 그친 줄 알았으나, 내 위로 하늘 지척을 거의 다 가린 거대한 새가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 세계는 이런 세계였다.
거대 동물이 주로 서식하는 특수 구역 또한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 구역을 빅팜(Big farm)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런 거대 동물류가 주택 근처에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정말 이렇게 큰 고양이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절대 사자나 호랑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라소니나 삵도 아니고, 애완용 고양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엄청나게 큰 고양이와 맹수가 분명했다, 특정하게 분류하기도 어려운.
“흐음.”
난 잠시 고민을 했고, 이내 망설임 없이 이 큰 고양이를 내 어깨에 업었다. 매우 무거웠지만, 난 마른 몸치고는 힘이 센 편이었다. 어지간히 무겁네. 가만히 중얼거리고는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순간 이게 잘하는 일인가 싶었지만, 금세 고개를 휘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찌 됐건, 고양이는 무언가에 다친 듯 피를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집에 고양이를 들이자마자, 바로 모르핀과 다른 약품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꺼냈다. 고양이는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고, 난 어렵지 않게 환부를 치료할 수 있었다. 치료를 다 끝낼 때까지도 고양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새까만 비로드와 같은 윤기 있는 털을 만져 보았다. 제길, 너무 부드러웠다. 난 거대한 고양이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옛날부터 고양잇과 맹수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곤 했었다. 특히나 티브이에서 거대한 사자나 호랑이만 나오면 홀린 듯 쳐다봤다. 막상 눈앞에 고양잇과 맹수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 귀여워. 난 한참 동안 그 까만 털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곧 졸음이 쏟아졌다. 난 그저 멍한 얼굴로 고양이 옆에 누운 채, 스르륵 눈을 감아 버렸다.
***
잠에 들었다. 꼭 이때쯤이면 난 악몽도 아닌, 그러나 굉장히 괴이한 꿈을 꾸곤 했다. 시커먼 허공. 무중력상태로 바닥 위로 솟구쳤다. 시간은 전혀 알 수 없는 괴이한 곳. 새까만 공간에서, 웃는 입술, 코, 눈이 떠오르고, 그 매섭고도 말간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고양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떨어지고 있는 이 공간은, 곧 낯익은 기시감을 유발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흡사하다. 정말 괴로운 건 꿈이 자각몽이라는 것이다. 깨어나려 해도 깨어날 수가 없다. 항상 그래 왔다. 난 꿈을 자각했으며, 무기력하게 그 검은 공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서늘하게 미소 짓던 고양이는 어느새 시커먼 고양이 형태가 되어 나를 응시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계시자인 체셔 고양이다. Cheshire cat. 히죽히죽 웃는 고양이. 항상 웃는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도 한다. 물론, 그 웃음은 매혹적이었다. 역시, 난 고양이가 좋다. 멍한 나를 향해, 그가 다가와 속삭였다.
“깨어나.”
화들짝, 정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나는 확연한 아침에 ,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일어났다. 몽롱한 내 얼굴에 무언가가 닿았기 때문이다. 그 생경한 감각은 내 피부를 훑었고, 좀 더 숨김없이 그대로 내 얼굴을 매만졌다. 단단한 손가락이 닿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것은 꿈치고는 너무 생생하고 뚜렷해서, 난 눈을 찌푸렸다.
곧 찌푸린 내 눈꺼풀 위로 축축한 무언가가 닿았다. 부드럽게 닿는 이질적인 느낌. 난 금세 잠에서 깼다. 멍한 시야 사이로 난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Cheshire cat? 아니, 그는 그 체셔 고양이보다 훨씬 매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깬 내 눈앞에 있는 건 새카만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깼어?”
그렇게 말한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내 입술에 키스했다. 쪽, 입술이 빨려 들어가고, 정신이 멍해졌다. 마치 머리 밖으로 혼령이 쑥 빠져나가는 기분에 동공이 풀린다. 떨어지는 민망한 소리와 동시에, 난 멍한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마치 보석 같은 아이스 청색의 눈동자가 가득 들어왔다. 남자는 잠이 덜 깬 내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난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멍한 표정, 귀여워.”
그렇게 말한 남자는 가만히 쳐다보는 내 눈, 코, 입에 막무가내로 버드키스를 날렸다. 쪽, 쪽. 난 아예 혼이 빠져 버렸다. 요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사내의 입술이 다시 내 얼굴 근처로 왔다. 그제야 난 퍽,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물러났다. 나는 입안의 단어를 굴리듯 천천히 물었다.
“……너, 뭐야?”
내 얼떨떨한 물음에, 가만히 쳐다본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뭐긴, 네가 주운 고양이지.”
퍽.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내 발길질에 넘어졌다. 난 무서운 속도로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내던졌다. 쿵. 전에 같이 대련하던 녀석이 한 말이 있다. 대련할 때마다 죽어 있던 내 눈에 살기가 돌아서 무섭다고 했었나. 난 담담히 미친 남자에게 말했다.
“좆 까지 마. 어디서 약을 팔아.”
나는 지금 신경안정제에도 중독돼서 가끔 때에 맞춰 안 먹으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금단현상이 온다. 그럴 때면 밥 대신에 시리얼처럼 약을 우유에 부어서 먹었다. 이 정도면 미친 거지. 고로, 더 이상의 약은 사절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신병자는 저 뒷동네에 있는 Lunatic asylum(정신병원)으로 가란 소리야.”
내가 남자를 억누른 채 쳐다보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프잖아.”
당연히, 아프라고 한 거니까. 난 느슨하게 고개를 꺾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킥복싱, 주짓수, 삼보, 유도. 어렸을 적부터 안에 내재하던 스트레스를 푸느라 자연스럽게 훈련을 하던 종목이 늘어 버렸다. 보기엔 가는 몸체지만, 난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난 고양이를 주워 왔으면 주워 왔지, 이런 이상한 남자를 주워 온 적은 없다.
“나가 줘.”
난 망설임 없이 남자를 일으켰다. 아, 근데 순간적으로 힘을 준 남자의 악력이 어마 무시하게 세다. 당황한 찰나, 나는 허무하게 바닥으로 처박혔다. 쿠당탕. 나를 내던진 남자가 고개를 꺾고 나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진짜야. 우리 혈족은 거짓말 따위 안 해.”
하필, 겉모양새는 왜 이렇게 멀끔해서 사람을 홀리게 하는 것일까. 확실히 악마 같은 놈들의 외양은 천사보다도 아름답다던데, 어쩌면 이놈도 같은 쓰레기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야무지게 미친 정신병자라든가. 길거리를 헤매던 부랑자나, 살인자, 범죄자일 수도 있다. 하필 살인자 같지 않은 화려한 외모에, 부랑자 같지 않은 말끔한 외양이라는 게 문제지만.
그러나 난 외양에 속지 않는다. 잘생긴 것일수록 독이 있다. 담담히 감흥 없는 눈으로 남자의 외모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신은 역시나 공평하다. 새카만 융단 같은 머리칼에 파란색 눈, 확연히 눈에 띠는 외모를 가진 남자는 미친놈이었다. 가만히 나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떡하지. 피가 끓는데.”
어쩌면 변태일 수도 있다는 항목을 추가해 본다. 사실상 처음 본 주제에 키스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니까. 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남자의 머리칼이 내 이마를 간질였다. 나는 사라락, 하는 그 생경한 느낌에 눈을 깜빡였다. 날 내리누른 남자를 응시한 채, 나지막이 대꾸했다.
“저기 찬장을 열면, 돈이 있을 거야.”
“…….”
“서랍장엔 시계랑 금품이 있어. 팔면 돈 좀 나올 거야.”
내 말과 동시에 남자는 살포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게 뭐?”
“도둑 아니야?”
집에 쳐들어온 이유가 그럼 뭘까. 외려 수고를 덜어 주는 행동에도 남자는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도둑한테 그런 건 안 알려 줘.”
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과 동시에 나른한 목소리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귀찮으니까.”
돈 같은 것에 소유욕 따위는 없으니, 얼른 가지고 꺼지란 소리다. 난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돈이 목적 아니야?”
역시, 단순한 변태인 건가. 차라리 도둑이면 나을 텐데. 도둑이면 어서 네 본분을 다하고 꺼지라는 나의 배려였는데, 아쉽게도 남자는 도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마 요즘 뉴스에서 뜨는 살인자라도 되는 걸까. 그럼 곤란한데. 내 담담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 채 남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네 맘을 훔칠 생각은 있는데.”
윽. 순간 닭살이 우수수 밀려왔다. 차라리 칼을 목에 박아 넣고 협박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보통 협박에도 전율 따윈 일어나지 않는 나인데 순간적인 오싹함에 입술을 비틀었다.
“비켜. 무거워.”
남자는 천천히, 나에게서 비켜났다. 난 훅, 숨을 내쉬고는 바로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남자를 보며 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방심은 금물.”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내 말에, 손이 붙잡힌 남자가 눈썹을 치켜떴다. 남자가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재빨리 남자의 손을 붙잡은 난 사정없이 남자를 바닥에 내던졌다. 쿠당탕. 그다음 눈살이 일그러진 남자를 일으키고, 선반 위에 놓인 베레타를 꺼냈다. 철컥, 베레타를 겨누자 남자가 끙끙거리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울리는 모양이었다.
“총이라니, 살벌하네.”
“나가.”
남자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채, 남자를 쿵, 현관문 밖으로 밀었다. 순식간에 내쫓긴 남자가 황망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잘 가.”
경찰에 신고 안 하는 건 자비라고. 그리고 문을 망설임 없이 닫았다. 아니, 문을 닫는 그 사이로 큰 손이 비집고 들어와 막았다. 빌어먹을, 순발력 한번 끝내주는군. 내가 짜증스럽게 응시하자, 남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데려와 놓고 버릴 거야?”
정말 미친 소리 아닌가. 난 가만히 남자를 보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고양이면 짖어 보든가.”
개든 뭐든, 어디 흉내라도 내 보라고. 내 말에 남자가 우뚝 멈춘 것이 보였다. 거봐, 못하지. 역시 미친 척도 연기였구나. 난 흘끔 쳐다보고는 빗장을 걸어 잠그려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철컥— 하고는 문 사이를 손으로 틀어막은 남자가, 간신히 그 틈으로 호흡을 내뱉었다. 나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 희미하게 웃었다. 우드득, 쾅!
“씨발.”
문을 박살 내다니. 문은 마치 휴지 조각처럼 박살 났다. 진짜 미친놈 아닌가. 끼익. 경첩이 흔들거리는 현관문이 처량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가 막혀서 입에 담배를 무는 내내 웃음이 나왔다.
“미치겠네.”
정신 나간 남자를 쫓아내지 않은 건 단순히 내가 멍청해서다. 아니면 정신질환을 앓던 내가 정말 미쳤다거나. 그러나 난 그 두 가지 사실을 미뤄 두고, 남자가 묘하게 홀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 합리화를 했다.
생각해 보면 남자의 목에 붙여진 밴드는 내가 해 준 밴드와 일치했다. 우연한 일치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교묘하게 모든 게 일치했다. 검은색 머리, 파란 눈. 어쩐지 비교할수록 맞아떨어지는 외모에 오싹해졌다. 정말로 그런 부류가 있단 말인가. 환수 종족이라니. 이게 무슨 망할 판타지 같은 소리야. 가만히 쳐다보는 내게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자꾸 보면 흥분하는데.”
그냥 내쫓는 게 나았을걸. 내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던 남자의 눈은 묘하게 나른하고 들뜬 느낌이었다. 여자든 남자든, 그 근원 안에 있던 어떤 음심을 건드리기도 충분할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다만 나는 신체 접촉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놈이었다.
“또 만지면 죽일 거야.”
무심한 듯 말하고는, 난 담배를 입에 또 물었다.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난 곧,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남자에게 물었다.
“배고파?”
그 말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남자가 끄덕였다.
“어. 해 줘.”
빌붙는 주제에도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행태에 할 말을 잃었다. 난 아무 말 없이, 사각팬티에 윗옷만 입은 채 레인지 후드 앞에 섰다. 원래 집에 들어서면 바지는 벗는 주의다. 냉철한 머리에 비해 몸에 열이 많아서 말이지. 진득한 시선이 내 뒤를 훑는 것이 어쩐지 살갗에 느껴지는 듯했다. 고개를 틀자,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옷 좀 입어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