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륙풍 1권(8화)
제3장 명안대(明眼隊)(3)
다음 날, 저녁을 먹은 연호는 다소 들뜬 표정으로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어젯밤 사부인 흑 노사에게 배운 수법으로 오골계 강연추를 날려 버릴 생각을 하면서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호는 군막 안으로 들어선 순간 기이한 긴장감을 느끼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주한에게 다가갔다.
연호가 슬쩍 조주한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부대주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어? 흠……. 뭐 별일은 아닌데, 곧 출정을 한다는구나.”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는 조주한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연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명안대 대원들을 살펴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모두들 말없이 검이나 장비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아무리 죽음에 익숙한 평로군 최고의 용사들인 명안대원들이라고 해도 출정이 결정되자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연호가 조용히 걸음을 옮겨 사부인 흑 노사에게 다가가자 흑 노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곧 출정을 해야 할 것 같으니, 당분간은 박투 수련은 못하겠구나. 그보다 너에게 줄 것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 보거라.”
“예…….”
연호가 대답하고는 곁에 앉자 흑 노사는 자신의 봇짐을 뒤적이더니 둥그런 막대를 하나 꺼내 들었다. 둥그런 막대는 바로 맥궁이었다.
흑 노사가 맥궁을 연호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궁법을 익혔으니 해궁(解弓)은 할 줄 알겠지?”
“예, 해 보지는 않았지만 하는 것은 봤어요.”
“그럼 한 번 해 보아라.”
맥궁을 건네받은 연호는 한쪽 끝의 도고자에 활줄을 걸고 반대쪽의 끝부분인 고자단장을 오른발로 밟았다. 이어서 왼손으로 죽통을 쥐고서 둥그렇게 말린 맥궁을 역으로 펼친 뒤 활줄을 당겨 아래쪽의 도고자에 활줄을 걸었다. 간단하게 해궁이 되었다.
연호가 완벽하게 해궁을 하자 흑 노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연호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탄성이 강하기로 소문난 맥궁을 자신이 너무 쉽게 해궁한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의 수련으로 힘이 예전에 비해 훨씬 세진 모양이었다.
연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흑 노사는 검우곤을 불렀다.
“검 대주!”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는 다른 대원들과 달리 평소와 다름없이 졸고 있던 검우곤은 역시나 벌떡 일어나서는 흑 노사에게 다가왔다.
“불렀수?”
“이번에 이 아이도 데려갈 것이니 전통을 마련해 주시오.”
“그, 그건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도 동의를 할 것이니 가서 물어보고 준비를 해 주시오.”
“알았수.”
검우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군막 밖으로 사라졌다.
연호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명안대와 같이 생활한 지 두 달이나 지났지만 검우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부인 흑 노사가 그라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궁금하였다.
연호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흑 노사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그는 바로 이회옥 장군이다. 검 대주는 이 장군이 가장 아끼는 심복 중의 한 명이지. 아마도 검 대주는 네가 이번 출정에 따라가는 것을 이 장군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모양이구나.”
“저도 이번 출정에 참가하게 되는 건가요?”
연호가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흑 노사는 특유의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문하였다.
“왜 가기 싫으냐?”
“아, 아뇨. 그런 것은 아닌데……. 지금 제 솜씨로는 딱히 할 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 지금 네 실력으로는 아무리 형편없는 반란군이라고는 해도 적의 병사 하나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네게 맥궁을 주지 않았느냐.”
연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인 흑 노사는 자신에게 궁수로 이번 출정에 참가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호는 자신이 과연 제대로 활을 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궁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사람을 상대로 화살을 날릴 자신이 없는 것이다.
연호의 표정을 살펴보던 흑 노사가 신형을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
“검 대주가 본영에 다녀오려면 시간이 걸릴 터이니 나가서 네 궁술이나 보자꾸나.”
“예? 에, 예…….”
연호가 머뭇거리며 대답하고 따라나서자 흑 노사는 양무오에게 다가갔다. 양무오는 명안대에 있는 네 명의 궁수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양무오는 흑 노사가 다가오자 자신의 전통과 맥궁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흑 노사와 연호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군막을 벗어나 강변에 이르자 흑 노사는 고개를 돌려 양무오에게 말을 건넸다.
“무오, 자네가 먼저 시범을 보여 주게.”
“그러지요.”
양무오는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빠르게 살매김을 한 뒤 과녁을 겨누고 잠시 호흡을 다스리는 유전의 동작도 제대로 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까마득하게 날아가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강변의 거룻배에 박혔다.
연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양무오를 쳐다보았다. 그토록 빠르게 날린 화살이 족히 이백 장은 되어 보이는 거리를 날아가 정확하게 목표에 명중한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솜씨였다.
흑 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것이 바로 맥궁의 진정한 위력이지. 삼 척의 길이에 불과한 맥궁에서 쏘아진 화살이 이백 장이 넘는 거리를 빠르게 날아가 박혀 드니 적들은 당할 수가 없었지. 과거 고구려가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철기군과 바로 저 맥궁의 위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
“…….”
연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에 든 맥궁을 매만지고 있었다. 흑 노사가 고구려를 언급하였기에 아버지의 얼굴을 잠시 떠올리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그로서는 도저히 양무오와 같이 제대로 맥궁을 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흑 노사가 다시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우리 연호의 솜씨를 한번 보자꾸나.”
“예…….”
연호가 힘없이 대답하고는 앞으로 한 발 나서자, 양무오가 자신의 호시를 한 대 건네주었다.
호시를 받아 든 연호는 전혀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살매김을 하고는 천천히 거궁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흑 노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궁법 또한 이제까지 배운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먼저 의념으로 네가 쏜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는 모습을 그려라. 그 다음 들숨을 단전에 가득 담고서 화살에 네 기를 모두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여라.”
연호의 등이 펴지고 만작이 이루어져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맥궁의 줌통을 쥔 연호의 왼손이 잠시 흔들리다가 갑자기 딱 멈추어 서는 순간, 연호의 맥궁에서 호시가 날아올라 날카로운 파공음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화살이 과녁에 닿을 때까지, 화살을 날리는 그 순간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연호는 놀란 표정으로 흑 노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쏜 화살이 양무오가 날린 화살 바로 옆에 꽂힌 것이다. 연호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양무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그래, 정말 제법이구나.”
흑 노사도 살짝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그조차도 연호가 단번에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양무오가 다시 말을 건넸다.
“쓸 만합니다. 이 정도면 데려가도 제 몫은 충분히 할 것입니다. 다만 그것만 극복을 한다면…….”
“그래, 그것은 이 아이가 스스로 극복을 해야겠지. 틈틈이 자네가 돌보아 주게.”
“꼬맹이가 배울 마음만 있다면야 저로서는 가르쳐 보고 싶네요. 기본이 되어 있으니 연사나 속사도 금방 배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럴 걸세. 연호, 너는 가서 화살들을 뽑아 오너라.”
“예? 에, 예!”
멍하니 자신이 날린 화살을 보고 있던 연호는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화살이 박혀 있는 거룻배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연호가 화살을 뽑아 들고 돌아오자 양무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흑 노사만 혼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흑 노사가 말을 건넸다.
“무오는 군막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그가 너에게 틈틈이 실전에서 쓰는 궁법을 가르쳐 줄 터이니 성심껏 배우도록 하여라.”
“예! 저도 정말 놀랐어요. 유전도 하지 않고 그토록 빠르게 화살을 날리고도 정확하게 맞혔잖아요.”
“놀랍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보다 궁법의 기초가 대단하구나.”
“그야, 뭐 사부님이 요결을 불러 주셨잖아요.”
연호는 흑 노사의 칭찬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사부인 흑 노사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지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흑 노사가 실소를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한 가지만 극복하면 되겠구나.”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따라오너라. 가 보면 알 것이다.”
흑 노사가 걸음을 옮기자 연호는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급히 흑 노사의 뒤를 따랐다.
연호가 흑 노사의 뒤를 따라 여러 군막 사이를 지나 도착한 곳은 진영의 외곽에 세워진 낡은 군막의 입구였다.
아무런 깃발도 표식도 없는 군막 앞에 이른 연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퀴퀴하고 음습한 냄새가 그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였던 것이다.
연호는 손으로 코를 막으며 물었다.
“사부님! 여긴 뭐하는 곳이에요. 냄새가……. 욱!”
“처음에는 미식거리겠지만 참다 보면 곧 적응이 될 것이다. 자, 들어가자꾸나.”
흑 노사의 뒤를 따라 이상한 군막 안으로 들어선 연호는 코를 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음산한 기운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흑 노사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윽고 흑 노사가 횃불을 한쪽에 걸자 연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곳은 시체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흑 노사가 겁에 질린 연호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어차피 네가 와 봤어야 하는 곳인데, 갑자기 출정이 결정되어 시기가 당겨졌구나. 보다시피 이곳은 시체를 보관하는 곳이다. 군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체들이 생겨나지. 그런 시체들을 이곳에 잠시 모았다가 한 번에 매장을 한단다.”
“그, 그런데 여긴 왜?”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는 것은 이처럼 시체들을 보는 것이지. 저들도 불과 며칠 전까지는 살아서 숨을 쉬던 이들이니까 말이다.”
“…….”
연호는 멍하니 눈앞에 놓인 세 구의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사부인 흑 노사의 말을 들으며 점차 놀란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죽은 이들이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흑 노사의 말대로 이들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살아서 숨을 쉬고 말을 하던 자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흑 노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를 이곳에 데려오려 한 것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너는 저기 죽어 있는 이들보다 더 차가운 심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가운 심장이라니요?”
“냉혈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차가운 심장이 필요한 법이지. 너는 언젠가는 무인이 되겠지만, 지금은 먼저 군인이 되어야 한다. 군인은 살인이 당연시 되는 존재이지. 너도 곧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사, 사람을 죽인다고요…….”
연호는 이제껏 잊고 있었던 생각이 치밀어 오르자 정신이 혼란해졌다. 막연히 군사가 되어 전쟁에 나선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흔히 화가 나면 상대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살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연호는 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 왔고,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쏟아지는 생각들로 뒤엉켜 버렸다. 횃불에 일렁이는 시체들의 창백한 얼굴이 그의 두 눈에 박혀 들고 있었다.
흑 노사의 무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베는 자는 냉혈한이 되어야 한다. 적을 상대함에 있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망설임이 일어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죽음에 이르는 자가 뒤바뀌는 곳이 전쟁터이고, 너는 앞으로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예…….”
연호는 어눌하게 대답하였다. 가슴으로는 자신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머리는 흑 노사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흑 노사는 연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이지. 한 인간의 죽음에서부터 국가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죽음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검의 역사이기도 하다. 검은 과거 신을 모시는 제사의 제기(祭器)로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살기(殺器)가 되었다. 너는 바로 그 살인의 도구인 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검을 뽑아라.”
“예?”
연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엉거주춤 뽑아 들었다.
흑 노사는 검을 쥔 연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연호는 그제야 사부의 뜻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흑 노사는 연호의 검으로 시체의 배를 그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흑 노사의 나직한 호통이 들려왔다.
“눈을 떠라! 검으로 살갗을 베어 내는 순간을 똑똑히 보고 손으로 그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