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륙풍 1권(9화)
제3장 명안대(明眼隊)(4)


스걱!
연호는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마치 두부를 베어 내는 것 같은 느낌이 검을 타고 손끝에 그대로 전해졌다. 연호는 사람의 살갗이 그처럼 손쉽게 잘려나간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차례 검으로 시체를 긋고 나자 연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시체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벤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흑 노사가 다시 말을 건넸다.
“힘이 들 것이다. 시체를 베는 것도 그러하거늘 살아 있는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느냐. 하지만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지난 한 달 동안의 박투로 너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베는 것도 그와 같다.”
“…….”
연호는 애써 호흡을 안정시키며 흑 노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연호는 익숙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맛보고 나서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던 박투 수련은 한 달이 지나자 그에게는 가장 즐거운 수련이 되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베고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도 두려움 없이 죽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명안대원들의 표정을 보니 죽음이라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연호의 눈빛이 점차 안정을 찾자 흑 노사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에는 냄새조차 이기지 못하던 네가 이제는 시체 냄새 정도는 무덤덤해지지 않았느냐. 사람을 베는 일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네가 앞으로 겪게 될 수 많은 죽음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죽음이 없다는 것만은 반드시 기억하여라. 그것을 잊고 죽음에 익숙해진 자는 살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
“그래, 나는 먼저 군막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는 이곳에 남아 죽음과 좀 더 친해지도록 하여라.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 봐서 전장에 나설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기면 돌아오너라. 물론 그럴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대로 떠나도 좋다.”
말을 마친 흑 노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시체를 모아 놓은 군막을 떠났다.
연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체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부의 말대로 이제부터 이 시체들을 보면서 죽음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연호가 명안대의 군막으로 돌아간 것은 희미하게 동이 터 오는 여명이 비출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전에 평로군은 사조의가 지휘하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정주(鄭州)로 향하였다. 사조의는 안록산과 함께 안사의 난을 주도한 사사명의 서자(庶子)로, 아비인 사사명을 죽이고 반란군을 장악한 패륜아였다.


제4장 출정(出征)(1)


“헉!”
잔뜩 긴장하여 굳어진 얼굴로 앞쪽을 노려보고 있던 연호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치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어깨를 친 사람은 다름 아닌 양무오였다. 그는 연호의 놀란 표정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적진을 앞에 두고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연호의 얼굴에서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본 것이다.
양무오가 곧바로 정색하며 말을 건넸다.
“무얼 그리 긴장하고 있느냐? 적의 진영이 코앞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저기 목책 위의 초소들을 보아라!”
연호는 양무오가 가리키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오십 장 정도 떨어진 앞쪽에는 양쪽의 계곡 사이를 연결하는 성곽과 같은 높이의 목책이 희미하게 밝아 오는 여명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삼 장의 높이로 높다랗게 세워진 목책에는 네 개의 초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각 초소들에는 두 명씩의 적군이 번초를 서고 있었고, 그들의 옆에는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위급한 상황이 발생되면 북을 울려 신호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다시 양무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반드시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좌측에서 두 번째 초소를 맡아야 한다. 우리 명안대의 대원들이 목책에 접근할 동안 초소 위의 번초들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지체 없이 화살을 날려 그들을 제압해야 한다. 다른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올 때에도 마찬가지로 즉시 놈들을 제압해야 한다.”
“예, 이미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반드시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대원들이 목책에 도달할 때까지 적의 북이 절대로 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
연호는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였지만, 양무오의 눈에는 걱정의 빛이 남아 있었다. 범양에서 이곳 복양(며陽)까지 이동하는 동안 틈틈이 가르쳤기 때문에 연호의 실력은 믿을 만하였지만, 아무래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것이기에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양무오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이동하자 연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맡은 목책 위의 초소를 노려보면서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천천히 살매김을 하였다. 이어서 줌통을 쥔 왼손에 힘을 주면서 등을 살짝 펴자 시위의 탄력이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잠시 후, 앞쪽의 수풀이 바람에 흔들리자 연호의 눈에는 더욱 긴장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명안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원들이 목책에 도달하는 시간은 반 각 정도 걸릴 것이지만, 연호에게는 반 시진보다도 더 긴 시간이 될 것이었다.
점점 시간이 지나 손끝에서 땀이 느껴질 즈음, 연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맡고 있는 번초의 적들이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대원들의 접근을 눈치챈 것 같았다.
연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호흡을 멈추고는 등을 활짝 폈다. 다소 느슨하게 걸려 있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만작을 이루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느낌과 함께 북채를 드는 적군의 당황한 표정이 연호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지금이 시위를 놓아 화살을 날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연호는 시위를 놓지 못하였다. 손에 아교를 바르기라도 한 듯이 그의 오른손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두려움이 그의 손을 아교처럼 감싸고는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쉬익!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북채를 든 적군의 머리에 정확하게 박혀 들었다.
연호가 화들짝 놀라는 순간, 또다시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며 네 개의 초소들을 덮쳐 갔다.
연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시위를 놓았다. 그의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 맹렬하게 허공을 날아 초소의 기둥에 박혀 들었다. 그가 쏜 화살은 빗나간 것이다.
놀란 연호가 황급히 다시 화살을 뽑으려는 순간, 다시 다른 쪽에서 화살이 날아가 적군의 가슴에 박혀 들고 있었다.
초소의 번초들이 모두 제거되고 주위가 다시 고요한 적막감에 휩싸이자 연호는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이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다.
짝!
연호의 뺨에서 불이 일었다.
“멍청한 놈! 우리 대원들을 모두 죽일 셈이냐!”
양무오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연호는 차마 고개를 돌려 양무오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도 자신의 잘못으로 명안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뻔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하고 있는 게야! 빨리 따라오지 않고!”
양무오의 호통에 연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양무오가 저만치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목책을 오르고 있는 대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과 합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잠시 후 양무오와 함께 목책에 도달한 연호는 곧바로 목책 위의 초소에 올랐다. 그사이 명안대원들은 이미 적들을 베고 목책의 문을 열고 있었다.
삐이익!
연호를 데리고 초소에 오른 양무오가 즉시 신호전을 쏘아 올리자 날카로운 소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평로군의 철기대가 목책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놈들이 몰려온다!”
양무오의 호통에 연호는 정신을 추스르고 앞쪽을 노려보았다.
목책 안쪽에 펼쳐진 군막에서 놀란 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적들은 대부분 갑주도 걸치지 않고 검이나 창을 들고 달려 나오고 있었는데 평로군의 기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화시!”
양무오가 나직하게 호통치자 연호는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기름통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쉭! 쉭!
불꽃이 일렁거리면서 양무오와 연호의 활을 떠난 화시들이 적의 군막을 불태우기 시작하였고, 평로군의 철기대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덮쳐 가자 적의 진영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화시를 모두 날린 연호가 쳐다보자 양무오는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적의 장수를 노린다. 적들 가운데 무공이 뛰어난 자들을 노려라!”
“예!”
연호는 급히 화살을 시위에 걸고는 아래쪽을 살폈다.
적들은 대부분 평로군의 철기를 당해 내지 못하고 달아나기 바빠 보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몇몇은 말에 올라 용맹하게 평로군의 철기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특히 연호의 눈길을 끄는 자는 백마를 타고 언월도를 휘두르고 있는 적장이었다.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적장은 세 명의 장수들과 함께 평로군의 철기대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언월도를 마치 가벼운 검처럼 휘두르며 철기대들을 물러서게 하고 있었다.
연호는 백마를 탄 적장을 목표로 정하고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단전으로 숨을 내렸다. 단전에서 열기가 치솟아 오르자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목표로 한 적장의 분노한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연호가 천천히 등을 펴자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일어난 진동이 그의 몸 전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백마를 탄 적장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연호는 서서히 잦아지고 있는 몸의 진동이 딱 멈추는 순간, 화살을 쥔 오른손을 슬그머니 미끄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