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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10화)
제4장 출정(出征)(2)
쇅! 쇅!
연호의 눈에 이채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쏜 화살은 한 대인데 두 대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백마를 탄 적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화살을 발견한 적장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비트는 순간 첫 번째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투구를 비켜 갔다. 그러나 그 순간 거의 동시에 날아간 두 번째 화살이 사정없이 적장에 목에 틀어박히고 있었다.
연호는 백마를 탄 적장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양무오를 쳐다보았다. 자신과 동시에 적장을 노릴 사람은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무오는 실소를 흘리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꼬맹이, 운이 좋구나! 네가 적장 이회선을 잡았다.”
“…….”
연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적장의 목을 꿰뚫은 화살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허공을 격하고 이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날린 화살이었지만, 상대의 살갗을 손쉽게 찢어 내며 목을 파고드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날 사부인 흑 노사의 손에 이끌려 시체를 검으로 베던 그때의 느낌 그대로였다.
연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살의 가운데인 줌통을 쥔 왼손은 펴지지도 않았고, 시위를 당겼던 오른손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첫 살인의 감각이 그의 손끝에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보고 있던 연호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적장이 쓰러진 곳을 쳐다보았다. 평로군의 철기들이 남아 있던 적의 장수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바로 이회옥이 철기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회옥의 무공은 연호가 상상하던 대로 굉장하였다. 이회옥은 마상에서 쓰는 긴 장검을 마치 작은 소검처럼 가볍게 쓰고 있었는데 그의 검에서 시퍼런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적장의 창이 잘라져 날아갔고, 적장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또한 이회옥은 적장의 목이 피 분수를 뿜으며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회옥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연호가 갑자기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적장들을 모두 베어 버린 이회옥이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은 채 그를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연호는 이회옥의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 그의 무공을 부러워하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정신 차려! 가자!”
호통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연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회옥은 이미 철기대들을 이끌고 달아나는 적들을 도륙하며 나아가고 있었고, 양무오 또한 검을 뽑아 들고는 신형을 날려 목책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양무오는 다른 명안대원들과 합류하여 철기대를 피해 달아나는 적들을 베려는 모양이었다.
양무오의 모습을 보고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던 연호는 눈빛을 차갑게 굳히며 맥궁을 갈무리한 뒤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침내 연호는 베어진 병사들의 몸에서 뿜어진 피가 붉은 안개를 이루는 참혹한 전쟁터 속으로 뛰어들 결심을 한 것이다.
스각!
목책 아래로 뛰어내린 연호는 이미 목이 반쯤 베어 진 채 비틀거리던 적병이 무너지듯이 덮쳐 오자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상대의 배를 그어 버렸다.
조금 전 적장을 화살을 잡을 때 느꼈던 살갗을 찢어 내는 이질감보다 더욱 진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그의 뇌리에 전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검으로 배를 갈라 버린 상대가 검붉은 내장을 쏟아 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본 연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로 그 순간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적 병사가 갑작스럽게 앞쪽에서 나타나 커다란 도를 휘둘러 그의 머리를 쪼개어 왔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연호는 몸을 굴려 상대의 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날 오골계 강연추의 발차기를 겪었을 때처럼 또다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스각!
좌측에서 도가 하나 불쑥 튀어나와 연호에게 덤벼들고 있던 적의 허리를 양단해 버리자 뜨거운 핏물이 연호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뭐야! 이 새끼가 뒈지려고 환장했냐! 오줌이나 지리고 있으려면 저기 찌그러져 있어, 새꺄!”
갑작스럽게 나타나 적을 양단시켜 버린 자는 오골계 강연추였다.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조소를 흘리며 연호에게 말을 내뱉고는 다시 또 다른 적을 베어 가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피를 뒤집어 쓴 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호가 갑자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강연추의 빈정거림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에이, 시발! 닭대가리 새끼야!”
연호가 갑작스럽게 욕설을 내뱉자 강연추가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연호를 노려보았다.
연호는 자신을 노려보는 강연추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달아나고 있는 적에게 달려들며 상대의 등을 검으로 찍어 가고 있었다.
“크악!”
자신의 검에 등을 찔린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꼬꾸라지자 연호는 손목을 비틀며 검을 뽑아내고는, 다시 그에게 도를 휘둘러 오는 적을 마주하여 나아갔다.
“지랄! 병신 새끼 삽질하네!”
강연추는 뻣뻣하게 선 채로 적을 맞이하는 연호의 모습을 보고는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뻣뻣하게 적을 맞이하던 연호가 갑작스럽게 신형을 낮추어 적의 품으로 뛰어든 뒤 어깨로 상대의 가슴을 찍어 뒤로 튕겨 내고는 곧바로 목에 검을 박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열네 살 어린아이의 솜씨로 보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기술이었다.
“병신 새끼, 그래도 금방 뒈지지는 않겠네…….”
연호의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연추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신형을 돌려 적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헉!”
연달아 두 명의 적을 상대한 연호는 가슴을 들썩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체력적으로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두 명의 사람을 제 손으로 베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진 것이다.
“정신 차려라! 어떤 상황에서도 배로 숨을 쉬라고 하지 않았느냐! 들숨을 단전으로 내리고 중심을 안정시켜!”
귓전을 울리는 흑 노사의 호통에 연호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부인 흑 노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호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 순간 다시금 흑 노사의 호통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뭐하는 게야!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적을 봐라! 우측!”
그러나 흑 노사의 호통이 끝나기도 전에 연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연호는 몸을 낮춰 우측으로 구르며 검으로 상대의 다리를 그어 버렸다. 다리가 반쯤 잘린 상대가 그대로 주저앉자 연호가 발을 차올려 상대의 턱을 날려 버리고는 다시 허리를 튕겨 신형을 세웠다.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을 덮쳐 오던 상대가 바닥을 기며 달아나고 있었다. 냉랭한 표정으로 다가간 연호는 오른발로 상대의 등을 밟고는 검을 상대의 등에 내리찍었다. 바동거리는 상대를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던 연호는 상대가 완전히 축 늘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로 상대를 밀며 검을 뽑아냈다.
“지랄! 그냥 목줄을 끊어 버리면 되지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냐!”
연호의 고개가 빠르게 좌측으로 돌아갔다. 강연추가 조소를 띤 채 쳐다보고 있었다.
강연추가 다시 말을 뱉었다.
“뭘 쳐다보냐? 병신 새꺄!”
“에이, 시발! 자꾸 병신이라고 하네!”
“뭐! 시발! 이 새끼가 뒈지고 싶냐!”
“퉤! 어느 놈이 뒈질지는 해 봐야지! 시발!”
“이 새끼가 병신 같은 놈들 몇 놈 해치우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강연추는 연호가 자세를 낮춘 채 냉랭하게 노려보며 말을 뱉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연호가 다시 대꾸를 하려는 순간, 부대주 조주한의 호통이 들려왔다.
“야! 뭐하냐! 빨리 집결하라는 소리 안 들리냐!”
“너 이 새끼, 나중에 보자!”
“그러시든지…….”
연호의 빈정거리는 대꾸에 강연추는 눈에서 기광을 뿜어내며 잠시 노려보았지만 손을 쓰지는 못했다. 조주한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호가 다가가자 조주한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여! 첫 싸움부터 한 건 했다며!”
“예?”
“네 녀석이 적장인 이회선을 잡았다던데?”
“아, 그, 그거야 운이 좋아서…….”
“운이고 지랄이고 꿩 잡는 놈이 매인 법이지! 나중에 한턱 내라, 이 녀석아! 포상금이 두둑이 나올 거다.”
“포상금도 줘요?”
“당연하지. 이회선 정도면 아마도 은자 열 냥은 줄 거다.”
“헤에! 은자 열 냥이나요?”
“그래, 그러니까 한턱 단단히 낼 각오를 하고 있어라.”
“예. 헤헤!”
“지랄, 병신 육갑하네…….”
적장을 잡은 공에 대해 포상금이 있다는 말에 연호가 실실거리자 강연추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뱉고 지나쳤다.
연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강연추를 노려보자 조주한이 연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저 새낀 또 왜 지랄이야. 자자, 신경 쓰지 말고 집결하러 가자!”
“예.”
연호는 대답하고는 조주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사부인 흑 노사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흑 노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이게 뭐냐?”
화살대를 손질하고 있던 양무오는 연호가 주머니 하나를 슬그머니 내밀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포상금으로 받은 은자 열다섯 냥의 반인 일곱 냥이에요.”
“그런데 왜 그것을 내게 주는 것이냐?”
“그야, 무오 형님께서 제게 궁을 가르쳐 주셨고, 그날 적장을 잡은 것도 사실 형님 덕분이잖아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네게 궁을 가르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고, 그 날도 어차피 내가 쏜 화살이 아니더라도 놈은 네 화살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괜한 짓 말고 그냥 넣어 두어라!”
“그냥 넣어 두게. 녀석이 그래도 기특하지 않은가 말일세.”
양무오와 연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흑 노사가 빙긋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연호가 반색하며 흑 노사에게 말을 건넸다.
“어! 사부님, 어디 갔다 오세요? 한참 찾았잖아요.”
“왜? 나도 뭐 있냐?”
“에이, 당연하죠. 사부님이신데. 여기요. 근데 사부님 것은 조금 작아요. 형님들한테 화주 사 주느라고 네 냥이나 썼거든요. 그래서 세 냥밖에 없어요.”
“흐음. 그래도 그게 어디냐. 고맙구나. 무오, 자네도 챙겨 두게. 나중에 돌아가서 전답이라도 조금 사려면 있을 때 챙겨야지.”
“그래요, 형님! 넣어 두세요. 전 앞으로도 공을 세울 일이 많을 거니까 그때 많이 모으면 돼요!”
연호가 싱글거리며 말을 하자 흑 노사와 양무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양무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고맙구나. 그런데 한 가지 네게 물어볼 것이 있다. 네가 적장을 잡았다고 말해 주었을 때, 너도 이미 적장을 맞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더구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 확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해서 네가 쏜 화살이 적장을 잡았다는 것을 확신하였느냐?”
“그야…… 손끝에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서…….”
“손끝에 감각이 전해지다니? 설마 네가 기궁을 안단 말이냐?”
자신의 말에 양무오가 화들짝 놀라며 묻자, 연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궁이라는 말은 그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흑 노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건넸다.
“기궁이라니 당치 않은 말일세. 저 아이의 내기는 이제 틀을 잡았을 뿐이네.”
“그, 그렇겠죠. 근데 손끝으로 감각이 전해진다고 하니…….”
양무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연호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한 기궁이라는 것은 화살에 내기와 의념을 담아 적에게 날리는 방법으로, 화살과 시전자가 내기로 연결되어 있어 화살을 통해 감각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전자의 의지대로 이미 날린 화살을 조종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였다. 그야말로 신궁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궁사들이 꿈에서도 갈망하는 궁법이었던 것이다.
연호가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기궁인지 뭔지는 아니고요. 그냥 느낌이 전해지던데요.”
“느낌이라니, 어떤 느낌이었느냐?”
“그러니까 그게……. 화살촉이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나 상대의 놀란 근육이 수축되고 화살이 미세하게 진동을 하는 느낌 같은 것들이었어요.”
“흠, 아마도 이 아이의 감각이 조금 남다른 것 같네. 이를테면 육감 같은 것이 남들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는지도 모르지.”
“육감? 예, 맞아요! 제가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일진이 사나운 날은 정확하게 알아요. 딱 느낌이 안 좋다 싶으면 그날은 하루 종일 재수가 없었거든요.”
연호의 말에 흑 노사가 실소를 흘리며 말을 받았다.
“흠, 그러냐? 안 그래도 검법을 배우지 못한 네가 검으로 적을 세 명이나 해치웠다는 말을 듣고 이제 검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검을 배워 보면 너의 그 특별한 감각이 정말 특별한 것인지 알게 되겠지.”
“어, 정말요? 안 그래도 사부님께 검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헤헤! 근데 특별한 감각을 알게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검을 다루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상대의 검이 향하는 방향을 빠르게 읽는 능력이지. 물론 그러한 능력은 박투에서도 중요한 능력이지만, 한순간에 죽거나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검투에서 특히 요구되는 아주 중요한 능력이란다.”
“그, 그렇군요.”
연호가 왠지 자신이 없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흑 노사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흠, 왜? 너의 그 예감이 잘 안 맞을까 봐 걱정이 되느냐? 아닌 게 아니라 말이 나온 김에 당장 나가서 검을 배워 보자.”
“예? 지, 지금요?”
“그래, 지금 말이다. 무오, 자네도 심심하면 구경이나 오게.”
흑 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자 연호와 양무오도 머뭇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