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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11화)
제4장 출정(出征)(3)


차앙!
흑 노사의 뒤를 따라 군막을 벗어나 으슥한 숲속의 공터를 향해 가던 연호는 흑 노사가 갑자기 검을 뽑아 자신의 목에 들이대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사부님……. 갑자기…….”
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흑 노사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무오, 자네가 보기에 어떤가?”
“흠……. 확실히 조금 특별한 감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양무오는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연호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흑 노사의 갑작스러운 발검은 웬만한 고수라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그런데 무위가 일천한 연호가 그 찰나의 순간에 제법 목을 틀어 비켜 서 있었던 것이다. 흑 노사가 그대로 검을 찔렀다 하더라도 치명상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 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있구나. 나도 너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특별한 감각이라…….”
“아, 아니 사부님. 특별한 감각은 아니고요, 전 그냥 재수 없는 날만 잘 맞추는 건데요.”
“그래, 그것도 특별하지. 그럼 제대로 검을 배워 볼까?”
“거, 검을 꼭 배워야겠죠? 헤헤!”
연호는 울지도 웃지도 않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검법을 배우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뻤지만, 이상한 감각을 자꾸 거론하는 사부를 보니 얼마나 힘든 수련을 하게 될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좀 전에 사부가 갑자기 검을 들이댈 때에도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다시 흑 노사가 말을 이었다.
“감각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관법에 대해 먼저 배워 보자. 관법이라는 것은 검을 마주하고 선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는 방법이다.”
“상대의 움직임은 그냥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래, 눈으로 보면 알 수는 있지, 그러나 조금 전에 내가 발검을 하였을 때 눈으로 보고 피할 수가 있겠더냐?”
“아, 아뇨…….”
연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흑 노사는 실소를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관법을 익히는 것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대비하기 위해서지. 먼저 관법의 첫째는 눈 두기이다.”
“눈 두기……?”
“관법에서 가장 잘못된 눈 두기는 상대를 노려보거나 한 곳에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흔히들 상대의 기를 죽이려면 험악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봐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다 먼저 골로 가기 십상이지.”
“헉! 원래 싸울 때는 그렇게 하는 것 아니에요?”
연호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흑 노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상대의 눈을 노려보면 현혹되기 쉽고, 상대의 손끝이나 발끝에 집중을 하다 보면 다른 쪽의 움직임을 놓쳐서 오히려 당하게 된다.”
“그럼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해요?”
“눈은 한 점에 고정시키지 말고, 상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전체를 봐야 한다. 이른바 먼 산 보기라고 하지. 처음에는 공간을 본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수련을 계속하면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게 된다.”
“아, 그렇군요.”
연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 노사는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말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직접 해 보도록 하자. 검을 뽑아라.”
“지, 진검을요?”
“그럼, 당연히 진검이 아니겠느냐? 목검을 대하는 것과 진검을 대하는 것은 마음가짐부터 다른 것이니. 특히 안법의 수련은 진검으로 하여야 한다.”
“그, 그렇지만…….”
연호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마지못해 뽑아 들었다. 진검으로 수련을 한다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설마 사부인 흑 노사가 자신을 죽이기야 하겠냐는 생각에 검을 뽑아 든 것이다.
연호가 검극을 흑 노사의 미간에 겨누자 미소를 짓고 있던 흑 노사의 눈에 순간적으로 기광이 어렸다.
순간 위험하다는 생각에 몸을 틀려고 했지만 이미 차가운 검의 감촉이 그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사부님…….”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느냐?”
“그, 그것이 사부님의 눈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래, 네가 내 눈을 보는 순간 너는 나의 안광에 이목이 흐려져서 나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다시 해 보아라.”
흑 노사가 검을 거두고 물러서자 연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흑 노사가 일러 준 대로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려깔면서 눈의 초점을 넓게 흩뜨렸다. 공간을 응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확실히 공간을 응시하려고 하자 흑 노사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흑 노사의 왼쪽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발검을 하려는 것이었다.
연호는 재빠르게 검을 내밀어 흑 노사의 검을 막아 갔다.
퍽!
“케엑!”
연호가 신음과 함께 왼쪽 옆구리를 붙잡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연호의 시선이 온통 흑 노사의 검에 사로잡힌 순간 흑 노사의 오른발이 연호의 왼쪽 옆구리를 강타한 것이다.
흑 노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쯧! 그렇게 전체를 보라고 하였건만…….”
“아니, 검으로 공격하려고 하시다가 갑자기 각법을 쓰시면 어떻게 해요!”
“이 녀석아! 상대가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고 하더냐?”
“씨이! 다시 해요!”
“상대의 움직임을 관조하되 그 움직임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변화를 눈으로 쫓지 말고 감각으로 예측하여라!”
흑 노사는 연호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며 외치자 진중하게 말을 건네고는 다시금 검을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연호도 얼른 자세를 취하며 상대인 흑 노사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를 차분하게 관조하기 시작했다.
퍽!
또다시 격타음이 들려오며 연호는 오른쪽 어깨를 잡고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흑 노사가 연호의 어깨를 검면으로 강하게 두들긴 것이다.
어깨를 붙잡은 채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누른 연호가 다시 자세를 취하자 어김없이 흑 노사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연호는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을 정신없이 두들겨 맞아야 했다. 공간을 응시하며 흑 노사의 움직임을 파악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흑 노사와 연호 사제 간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던 양무오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흑 노사에게 정신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연호의 움직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연호가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몸을 비틀며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조금 전 흑 노사가 갑작스럽게 검을 겨누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연호 정도의 일천한 실력으로 흑 노사의 검에 반응한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연호를 두드리고 있는 흑 노사의 눈에도 점점 기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도 연호의 기이한 반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흑 노사의 검이 빨라지는 듯싶더니 검극이 연호의 목을 파고들었다. 흑 노사가 손목을 돌려 검면으로 두들기지 않고 검극으로 연호의 목을 찌른 것이다.
스각!
흑 노사의 검이 연호의 목을 스쳐 지나가며 연호의 목에 자상을 만들어 냈다.
연호는 핏물이 배어 나오는 목을 붙잡고는 멍한 표정으로 사부인 흑 노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흑 노사가 진짜로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흑 노사는 연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검을 되돌려 연호를 찔러 왔다.
연호의 눈에 기광이 번뜩이더니 가슴을 빠르게 틀어 가슴을 찔러 온 흑 노사의 검을 가까스로 피하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연호의 가슴에 자상이 생겨났다.
연호는 사부인 흑 노사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하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여유조차 없었다. 흑 노사의 검이 이리저리 번뜩이며 폭풍처럼 그를 몰아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온 신경을 집중하여 흑 노사의 검을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반 각 동안 연호를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흑 노사의 검이 갑작스럽게 딱 멈추어 섰다.
그와 동시에 연호는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이 쓰러져 버렸다. 흑 노사의 검이 멈추는 것을 확인한 순간 긴장이 풀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쓰러져 있는 연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그의 무복에는 선혈들이 낭자하게 묻어 있었다.
눈에 이채를 띠고 잠시 쓰러진 연호를 쳐다보던 흑 노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특별한 감각이 있군. 어쩌면…….”
“사신지안! 혹시 이 아이가 사신지안이 아닙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양무오가 상기된 표정으로 흑 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흑 노사가 침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나도 그 생각을 했네. 이 아이가 내 검을 모두 피해 낸 것은 현재 이 아이의 수준을 감안하면 불가사의한 일이네. 하지만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신지안의 전설이라면 충분히 설명이 되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사신지안은 이미 인세에 나타나 있네.”
“하지만 사신은 모두 네 명이 아닙니까? 설령 이 장군께서 백호지안의 주인이라고 하실지라도 이 아이도 다른 삼신지안의 주인들 중의 하나일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신지안이 현세에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신지연!”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리던 흑 노사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놀란 표정으로 나직하게 소리를 쳤다.
양무오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어조로 말을 뱉었다.
“사신지연! 천하의 주인을 바꾼다는 그 전설 말입니까?”
“쉿! 말조심하게! 행여 그 말이 회자되기라도 한다면 이제 발톱을 가지기 시작한 이 장군은 채 포효도 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 것일세.”
흑 노사가 정색을 한 채 주위를 살피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사신지연의 전설이나 이회옥이 백호지안의 주인이라는 말은 절대 누설되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한 말들이 퍼진다면 이제야 겨우 힘을 가지기 시작한 이회옥과 평로군은 채 꿈을 가져 보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양무오가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데 정말 이 아이가……?”
“음……. 기이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니 두고 보기로 하지. 일단 자네가 이 아이를 데려가 금창약이라도 좀 발라 주게. 나는 아무래도 이 장군을 좀 만나 봐야 할 것 같군.”
“예, 알겠습니다.”
양무오가 재빨리 연호를 들쳐 업고 군막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흑 노사도 남쪽을 향해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남쪽에 자리한 이회옥의 막사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제5장 정주지사(鄭州之事)(1)


붉은 황토색으로 앙상하게 말라 버린 떡갈나무 잎이 마침내 그 연을 다해 너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허공을 가르는 섬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허공에 멈춘 듯이 서 있던 떡갈나무 잎은 두 개로 갈라져 다시금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철컥!
검을 갈무리하는 연호의 얼굴에 득의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동안 팔방 베기와 오방 찍기만을 수련해 온 연호는 군막과 조금 떨어진 숲속에 들어와 베기 수련을 하던 중에 호기심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베어 본 것이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처음 안법 수련을 하면서 사부인 흑 노사의 검에 난자당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연호는 깨어난 뒤에도 사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의 몸에 잠재된 기이한 능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무오가 차근차근 상황 설명을 해 주고, 자신의 몸에 생겼던 자상들이 사라지자 그도 점점 마음을 다잡고는 사부인 흑 노사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흑 노사가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은 오방 찍기와 팔방 베기였다.
오방 찍기는 찌르기를 수련하고, 팔방 베기는 여러 각도로 베는 수련으로, 검법의 초식을 익히기 전에 반드시 숙달시켜야 하는 기초 수련이었다.
비록 기초 수련에 불과한 오방 찍기와 팔방 베기였지만 연호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검을 다루는 법을 점점 알아 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기초에 불과한 수련만으로도 그는 복양에서의 전투 이후 이곳 정주(鄭州)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다섯 번의 전투에서 다른 명안대원들과 대등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었다.
사부인 흑 노사의 말대로 자신이 검법에 대한 특별한 자질을 타고난 것인지 모르지만 검을 다루면 다룰수록 즐거워지는 연호였다.
잠시 자신이 갈라 버린 떡갈나무의 낙엽을 쳐다보고 있던 연호는 허리를 숙여 갈라진 낙엽들을 소매에 갈무리하고는 막사를 향해 총총걸음을 옮겼다.
사부에게 이것을 보여 주고 이제 초식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쓸 작정이었다. 사부인 흑 노사가 지나가는 말로 낙엽이라도 제대로 가른다면 초식을 가르쳐 주마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입가를 씰룩이며 막사를 향하던 연호는 연병장으로 쓰는 커다란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는 것을 보고는 그곳으로 향하였다. 사람들이 손을 들면서 함성들을 내지르는 것을 보니 싸움 구경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호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가서 보니 공터에서는 두 패로 나누어 공을 차고 있었다. 아마도 말로만 듣던 축국(蹴鞠)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가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