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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14화)
제5장 정주지사(鄭州之事)(4)


창!
이회옥이 대각으로 검을 들어 올려 낭아도를 쳐올리자 재빠르게 손목을 틀어 이회옥의 허리를 베어 가던 골력문라는 황급히 신형을 뒤로 튕겼다. 어느새 이회옥의 검이 그의 목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꼬치처럼 목을 꿰뚫릴 뻔하였던 위기를 모면한 골력문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어느새 따라붙은 이회옥의 검이 뱀의 혓바닥처럼 그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
골력문라가 놀란 눈빛으로 엉겁결에 도를 내밀자 이회옥은 검을 아래로 돌려 골력문라의 낭아도를 감아 위로 날려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를 놓친 골력문라는 믿기지 않는지 멍한 표정을 하고는 이회옥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이회옥의 발이 날아들어 골력문라의 가슴을 사정없이 찍어 버렸다.
“커헉!”
골력문라는 신음과 함께 뒤로 바닥을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단상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신형을 가눈 골력문라는 수치심으로 인해 잘 익은 홍시처럼 벌게진 얼굴로 소리치며 다시 이회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유성낭아도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대가 이회옥이었다.
이회옥은 자세를 낮추어 골력문라의 주먹을 가볍게 흘림과 동시에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팔꿈치로 골력문라의 목 뒤쪽에 자리한 마혈인 풍부혈(風府穴)을 찍어 버렸다.
혈도를 찍힌 골력문라는 그 자리에 맥없이 고꾸라졌다.
이회옥이 너무 손쉽게 골력문라를 제압해 버리자 장내에 있던 오군의 장수들과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었다. 이회옥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 알았지만 골력문라를 가볍게 제압할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골력문라가 오군의 수장들께서 계시는 자리임에도 너무 방자하게 날뛰므로 본관이 가볍게 징계했다. 너희 회홀의 병사들 가운데 나와 싸워 보고 싶은 자는 앞으로 나서라!”
이회옥은 재빨리 회홀의 병사들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회홀의 병사들이 동요하여 난동을 피우기 전에 기선 제압을 하려는 것이었다.
골력문라에 대한 회홀 병사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이 골력문라가 죽은 것으로 오해하여 난동을 피운다면 진압을 해야 하는 오군의 병사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회옥의 생각대로 회홀의 병사들은 가벼운 징계를 했다는 이회옥의 말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골력문라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끙!”
짧은 침묵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직한 신음과 함께 골력문라가 힘겹게 신형을 일으키자 회홀 병사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힘겹게 신형을 일으킨 골력문라는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이회옥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졌소! 축국 시합도 졌고, 나도 졌소. 오늘은 평로군의 승리요.”
“과연 장군은 대초원의 남자답게 호탕하시오!”
이회옥은 큰소리로 골력문라를 추켜세웠다. 비록 골력문라가 제 무공을 믿고 방자한 것은 사실이지만 용맹이 뛰어난 회홀 병사들의 수장이었다. 함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인물인 것이다.
골력문라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받았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소이다. 이회옥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용사요. 그리고 평로군은 정말 용맹하오! 특히 저 꼬맹이의 용맹함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소.”
“과찬의 말씀이오!”
겸양의 말을 건네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회옥은 저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의도한 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축국 시합을 빌미로 골력문라와 용맹한 회홀 병사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평로군은 오군에서 가장 강한 군대가 되었고, 그도 오군의 수장들에게 강자로서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 주게 된 것이다.
“평로! 평로! 평로!”
평로군의 병사들 가운데 몇몇이 한 손을 치켜들며 평로를 외치기 시작하자 나머지 병사들도 따라서 연호했다. 연병장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평로군의 연호 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머지 사군의 병사들은 그저 부러운 시선으로 평로군의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평로의 병사들이 기쁨에 취해 있었지만, 단 한 사람 평로군의 수장인 평로절도사 후희일만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호통을 치던 이회옥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일의 주역은 평로군의 수장인 그가 아니라 이회옥이었다.
사사로이는 이회옥의 고종사촌 형이 되는 후희일은 이회옥의 뛰어남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평로의 절도사가 된 것도 이회옥이 평로번진의 수장인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그를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는 무공이 뛰어난 이회옥이 평로군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정식으로 조정으로부터 평로절도사에 임명되고 나자 후희일은 점점 이회옥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도 점점 욕심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형님, 무엇을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회옥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후희일은 급히 안색을 바꾸며 말을 건넸다.
“그래, 네가 장한 일을 했구나. 우리 평로군을 외치는 저 연호 소리가 참으로 웅장하지 않느냐. 이제는 어느 누구도 우리 평로군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들이 용맹한 우리 평로군의 기상을 보여 주었으니 크게 상을 내려 주십시오.”
“좋다. 당연히 그리하여야지. 저들에게 은자 열 냥씩을 상으로 내리도록 하여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회옥이 고개를 숙인 뒤 연병장 쪽으로 향하자 후희일은 순식간에 표정이 다시 차가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사촌 동생인 이회옥은 자신이 거두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었다.


제6장 전귀(戰鬼)(1)


따악! 따악!
연호의 검이 손목을 잘라 오자 흑 노사는 검을 쥔 손목을 슬쩍 뒤로 빼면서 연호의 검을 흘리고는 검면으로 연호의 손목과 머리를 연이어 두들겼다.
챙그렁!
연호의 검이 바닥에 나뒹굴며 돌과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급하게 검을 주워 드는 연호를 쳐다보며 흑 노사는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손바닥의 조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면서 초식 운운하였더냐!”
“죄송합니다.”
연호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자 흑 노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들고 있는 것은 쇠몽둥이가 아니라 검이다. 상대를 후려치는 것이 아니라 베는 것이란 말이다. 손바닥의 조임 없이 무조건 검을 휘두르는 것은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팔에 쇠몽둥이를 두드려 맞은 자와 검에 베인 자의 차이가 무엇이냐?”
“그, 그것은 쇠몽둥이를 맞은 자는 팔이 부러지고 검에 베인 자는 팔이 잘려 나갑니다.”
“바로 그것이다. 쇠몽둥이는 쇠의 무거움으로 상대를 부러뜨리지만 검은 날의 예리함으로 상대를 베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검으로 상대를 치려고 하느냐?”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베려고 한 건데…….”
연호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자 흑 노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쯧! 베려는 녀석이 검을 그따위로 휘두른단 말이냐! 상대를 베기 위해서는 검의 움직임과 속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느냐?”
“원을 그려야 하고, 속도는 처음보다 마지막이 빨라야 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손목을 부드럽게 하여 검을 상대에게 내던지듯이 휘두르고 마지막 순간에 손바닥을 조이면서 손목을 자신을 향하여 당기는 듯한 느낌으로 운용하여야 합니다.”
“그렇다. 그와 같은 일련의 동작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검 끝에 힘이 실리고 속도도 마지막에 가장 빨라지는 것이다. 너는 무엇보다도 검을 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 검이 둔하고, 상대를 베는 순간 손바닥을 제대로 조이지 못하여 검이 예리하지 못하다. 그래서는 힘을 제대로 검 끝에 싣지도 못할 뿐더러 날카롭게 상대를 베어 낼 수도 없다.”
“죄송합니다.”
연호가 또다시 고개를 조아리자 흑 노사는 조금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든 무공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검은 처음 배울 때 잘못 습관을 들이면 평생 고치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네가 익혀야 하는 전검은 찰나의 순간에 생사를 가르므로 더욱 그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
흑 노사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연호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스각!
섬광이 번쩍이자 연호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이 녀석의 기이한 감각은 더 예민해졌구나!’
연호의 반응에 흑 노사는 속으로 살짝 감탄하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말을 건넸다.
“방금 내 검을 보았느냐?”
“아, 아뇨. 못 보았습니다.”
“그래, 검의 움직임은 눈으로 보거나 머리로 판단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지 생각하면서 검을 다룰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검을 벤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연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묻자 흑 노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한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허점을 벤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상대의 허점이라는 것을 판단한 뒤에 벤다는 말이 아니다. 너의 감각에 상대의 머리가 허점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너의 검은 이미 상대의 머리를 베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관법을 익혀 감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느끼고, 몸에 검을 각인시켜 생각이 이루어지기 전에 적을 베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예가가 머리로 알고 있는 초식을 평생에 걸쳐 수련하는 이유가 바로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전검은 더욱 그러한 수련이 필요하다. 너도 겪어 봐서 알겠지만 전장이라는 곳은 언제 어디서 검이나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이다. 관법을 제대로 익히고 검을 네 몸의 일부로 만들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연호는 그가 겪었던 전장의 상황을 떠올리며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천 수백의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난전에서는 제대로 된 이성적인 판단 따위는 없었다. 베고 베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살아 있다면 그제야 산 것이다. 그것이 전장이었다.
흑 노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건넸다.
“내 말을 이해했다면, 기초 수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것이다. 오늘부터 다시 마음을 다지고 오방 찍기와 팔방 베기를 정확한 자세를 떠올리며 하루에 삼만 번씩 하도록 하여라.”
“사, 삼만 번……. 후우……. 아, 알겠습니다.”
연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연호는 막사로 돌아가는 흑 노사의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검의 기초를 가르쳐 줄 때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검을 배우게 되자 흑 노사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축국 시합이 있은 이후에 위상이 달라진 평로군은 사조의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자 요서로 돌아가지 않고 청주로 진군하여 청주성에 자리를 잡았다. 평로절도사 후희일이 평로치청 절도사가 된 것이다.
명안대 역시 다른 평로군과 마찬 가지로 청주성에 주둔하게 되었고, 연호도 흑 노사의 지도 아래 본격적으로 수련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을 수행하며 기초를 배우던 때와 달리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게 되자 사부인 흑 노사는 예전과 달리 무서울 정도로 엄격해졌다.
특유의 그 인자한 미소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고 주변에서 걱정을 해 줄 정도로 혹독하게 연호를 몰아붙였다.
얼마나 수련이 힘들었는지 오히려 다시 전쟁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덕분에 명안대원들과 하는 박투 대련이나 양무오의 궁법 수련은 연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오골계 강연추와는 여전히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축국 시합 이후로 형제와 같이 지냈기 때문에 연호는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가장 편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흑 노사를 쳐다보던 연호는 이를 악다물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흑 노사가 가르치던 검리들을 떠올리며 검을 내려 베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련이 아무리 혹독하여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무공을 익히고 싶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그에게는 확실한 꿈이 생긴 것이다.
연호의 꿈은 이회옥을 닮는 것이었다. 철기대를 이끌고 장검으로 적을 베어 버리던 모습이나, 회홀의 용장 골력문라를 간단하게 제압해 버린 이회옥의 당당한 모습은 연호가 이제부터 그려 나갈 자신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