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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15화)
제6장 전귀(戰鬼)(2)


아우우!
대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잿빛 늑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을 향해 울부짖자, 사방에서 모여든 늑대들이 천천히 눈을 빛내며 괴인을 향해 다가들었다.
그러나 괴인은 백여 마리의 늑대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다가와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크르르릉! 캬오!
괴인의 앞에 이르러 몸을 낮추고는 낮게 으르렁거리던 늑대들 가운데 세 마리가 각기 세 방향에서 뛰어들었다.
스각! 스각! 스각!
섬광과 함께 세 번의 살을 베어 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자,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던 세 마리의 늑대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뻗어 버렸다. 어느새 괴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새파란 광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캬오오!
세 마리 늑대의 죽음에 자극을 받았는지 늑대들은 더욱 흉포하게 괴성을 내지르며 사방에서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괴인도 늑대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괴인의 발이 어지럽게 바닥을 쓸며 미끄러지듯이 움직였고 그의 허리가 좌우 전후로 꺾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쉴 새 없이 시퍼런 검광을 뿌려 댔다.
일각!
괴인의 주변에서 늑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일각 만에 칠십여 마리의 늑대가 시체가 되어 사방에 널브러졌고 나머지 늑대들은 모두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괴인은 검을 사선으로 휘둘러 검에 묻은 늑대들의 피를 바닥에 뿌린 다음 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하였다.
이윽고 괴인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허리를 숙여 자신의 검에 베인 늑대들의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덟! 휴…….”
마지막 늑대를 살펴본 괴인이 숫자를 내뱉으며 나직한 한숨과 함께 신형을 일으켰다.
“여덟이라……. 그 정도면 준수하구나.”
괴인이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초로인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초로인은 바로 흑 노사였다.
“준수하다면……?”
괴인은 뭔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흑 노사를 바라보았다.
늑대들과 싸운 괴인은 바로 연호였다. 정주에서의 반란군 진압이 있은 이후 사 년이 지나 열여덟 살이 된 연호는 어린 소년에서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키는 육 척을 훌쩍 넘어 보였고, 혹독한 수련을 거친 몸은 무복을 입고 있어도 탄탄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은 그대로였지만 우뚝 선 콧날과 다부진 턱은 호남아의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흑 노사가 오랜만에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일흔두 마리에 여덟이면 성에 돌아가도 될 것 같구나.”
“정말이죠?”
연호는 반색하며 물으면서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금 나타난 흑 노사가 죽은 늑대의 숫자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 노사의 관법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였다.
반면에 흑 노사 역시 연호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연호는 일흔두 마리의 늑대를 베면서도 여덟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정확하게 한 치 반의 깊이로 늑대를 베었다.
한 치 반의 깊이는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가장 적당한 깊이였다. 짧아서도 안 되고 길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흑 노사의 지론이었다. 짧으면 적을 살려 줄 수 있고, 길면 쓸데없이 동작이 커진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흑 노사를 감탄케 하는 것은 연호가 백여 마리의 늑대를 상대하면서도 단 한 군데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연호의 특이한 감각 탓일 것이다.
‘사신지안! 이 아이는 분명히 사신지안을 지녔다. 백호와 현무는 아니니 청룡이나 주작일 터인데 과연 어느 쪽일까?’
연호를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며 내심 의문을 떠올리던 흑 노사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더 이상은 네가 상대할 늑대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고, 이 정도면 전검의 기본은 익혔다 할 수 있으니 그만 내려가야지 않겠느냐?”
“그, 그렇죠!”
연호의 얼굴에 화색이 가득하였다.
드디어 지난 여섯 달 동안 머물던 이 지긋지긋한 만랑곡을 떠나 청주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어라? 분위기가 뭐 이래. 닭대가리 형!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홀로 저녁 수련을 마치고 명안대의 숙소인 명안당으로 들어선 연호는 실내의 분위기가 무거운 것을 느끼고는 강연추에게 말을 걸었다.
“몰라, 색햐!”
강연추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는 밖으로 나가 버리자 연호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라도 난 것 같았다. 평소의 강연추라면 자신이 닭대가리라고 부르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호가 다시 검을 닦고 있는 한만구에게 다가가 옆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만구 형님! 뭔 일이요?”
“뭔 일은, 보면 모르겠냐?”
연호는 검을 닦고 있는 한만구의 모습을 보면서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전쟁이었다. 무거운 실내 분위기와 세심하게 검을 닦고 있는 한만구의 모습은 전쟁이 다시 벌어 졌음이 분명하였다.
“전쟁이요?”
“그래, 내일 아침에 곧바로 출정이라고 하니 너도 준비해라.”
“흐음, 왜 갑자기 전쟁이지?”
“그야 모르지. 우리 같은 놈들이야 까라면 무조건 까야지 별 수 있냐?”
“쩝, 그런가? 나도 준비해야겠네.”
연호는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향하였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연호는 전통을 꺼내 화살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비어 있는 흑 노사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흑 노사는 만랑곡에서 자신과 함께 돌아오지 않고 알아볼 것이 있다면서 이회옥에게 전할 서찰만 건네주고는 훌쩍 떠났었다.
연호는 이제껏 흑 노사가 없이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린 나이부터 전쟁에 참가하면서 흑 노사의 존재는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가 사부 흑 노사였던 것이다.
실제로 흑 노사는 늘 연호를 주시하면서 그를 지켜 주었다. 연호도 무공을 수련하면서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늘 그를 일깨웠던 의문의 소리가 흑 노사의 전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흑 노사가 곁에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히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아니었다. 그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늘 지니고 있던 것을 두고 가야 한다는 불안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친 연호는 새벽 묘시가 되자 명안대원들과 함께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에는 오천의 평로군 철기대가 삼월의 새벽 기운에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집결해 있었다.
잠시 후 명안대주인 검우곤이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타나서는 손을 들고서 빙빙 돌렸고, 그를 중심으로 백 명에 달하는 명안대원들이 둥그렇게 둘러쌌다. 출정이 있을 때마다 벌어지는 명안대의 의식이었다.
그러한 의식은 명안대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명안대원들은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의 상황을 세세하게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출정 직전에 대주인 검우곤이 직접 대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검우곤의 상황 설명이 끝나고 명안대가 각자 말에 올라 출발을 했다.
연호는 고개를 돌려 철기대가 있는 쪽을 보았다. 이회옥도 이번 출정에 참가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회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기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병마사가 된 이회옥에 이어 철기대주가 된 하목운이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뒤쪽에서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와 하목운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뒤늦게 달려온 장수는 바로 설영이었다. 아마도 이회옥을 대신하여 그의 부관인 설영이 이번 출정을 참관하게 된 모양이었다.
지난 사 년 동안 이회옥의 처소에 갈 때마다 매번 마주쳤던 설영은 변함없이 퉁명스럽게 그를 대하였다. 그러나 연호는 묘하게도 그런 설영이 좋았다. 그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탓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묘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 설영이었다.
하목운과 이야기를 하던 설영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있는 쪽을 쳐다보자 연호는 손을 흔들었다. 주위가 어둡고 거리가 먼 탓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호의 눈에는 설영이 피식거리며 웃고 있는 듯이 보였다.

***

치주자사 왕이현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설영과 하목운은 후희일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했다.
후희일의 뒤를 따라 하관이 갸름하고 하얀 얼굴을 지닌 전형적인 문사의 풍모를 지닌 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이곳 치주의 자사인 왕이현이었다.
설영은 후희일이 자리에 앉자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사 년 전 평로 절도사로서 이회옥과 함께 평로군을 이끌고 사조의가 일으킨 반란 진압에 참가했던 후희일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이제 평로치청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평로 이외에도 청(靑), 치(淄), 기(沂), 밀(密), 해(海)를 관장하게 되어 모두 여섯 주를 다스리는 제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물산이 풍부한 산동 지역의 대부분을 다스리는 제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잡은 후희일이지만 병사들로부터의 신망은 전보다 더욱 잃고 있었다. 반란군 진압이 있은 이후에도 수차례 전투가 있었지만, 후희일은 병사들을 동원하여 사냥을 하거나 사찰이나 불탑을 세우는 일에 더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사들은 대부분 반란군 진압이나 그 이후의 전투에서 직접 그들을 이끌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회옥을 존경하고 지지하였다.
특히 설영은 후희일의 모든 공적과 지위가 이회옥이 만들어 준 것임을 알기에 거들먹거리는 후희일을 내심 비웃고 있었다.
설영이 전서를 꺼내 놓으며 말을 건넸다.
“명안대로부터 전서가 왔습니다.”
“흠, 그래?”
전서를 펼쳐 꼼꼼히 읽어 보던 후희일은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서를 자신의 옆에 자리한 치주자사 왕이현에게 넘겼다.
심드렁한 표정의 후희일과는 달리 전서를 읽고 난 왕이현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연락이 끊긴 그의 휘하 군사인 치주군 오천의 행방을 명안대가 찾아낸 것이다.
후희일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원세연이 무능하군. 기껏 제남성을 구원하라고 보냈더니 오히려 적에게 포위를 당했단 말인가?”
“아마도 관도에서 적의 매복에 당한 모양입니다.”
왕이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후희일이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 원군으로 간다면 당연히 매복에 신경을 썼어야지. 그래 창천곡은 어디인가?”
“예, 창천곡은 제남성의 초입에 있는 회룡산과 마주 보는 형산 사이의 분지와 같은 곳입니다. 놈들이 형산과 회룡산 자락에 군사를 숨겨 놓았다가 급습을 하였다면 원세연은 창천곡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현의 말에 철기대주인 하목운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흥! 놈들의 매복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어리석지만, 군사들을 창천곡으로 물린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창천곡과 같은 곳은 얼핏 보면 지키기가 좋지만 반대로 곡의 입구만 틀어막으면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지요.”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오천이나 되는 우리 군사가 포위를 당했으니 그들을 구해 내야 하지 않겠나?”
하목운의 말에 후희일이 대꾸하자 설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원세연의 잘못을 비난하던 후희일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왕이현이 얼른 대답했다.
“원세연이 판단을 잘못하여 적의 함정에 빠졌지만 오천이나 되는 병사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흐음, 현재 치주에서 출정할 수 있는 병사는 얼마나 되는가?”
“그, 그것이 원세연이 최정예의 병력을 모두 이끌고 나간 터라 최소의 수비 병력을 제외한다면 거의 없습니다.”
왕이현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하목운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원세연이 이끌고 나간 병력이 겨우 오천인데, 그들을 제외하면 동원할 병력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치주군의 병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오!”
“억지로 동원하자면 더 있기야 하겠지. 그러나 반군이 기세등등하게 지척인 제남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니 만약을 대비하여 수성도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치주의 병력을 무리하게 운용하였다가 적이 제남을 버리고 이곳을 노리기라도 한다면 어찌 막겠나?”
후희일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하자 설영과 하목운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반군이 이곳 치주를 공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목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제남은 군세가 약하여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곳 치주는 우리 평로치청의 육주 가운데 한 곳입니다. 저들이 감히 우리 평로치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세상사가 내 판단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각설하고, 이왕 자네가 제남의 원군으로 출정을 하였으니 우리 평로 철기대의 위용을 보여 주게. 이번 일은 자네의 철기대가 맡아 주어야겠네.”
“하나…….”
하목운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후희일이 입가에 조소를 띠고 다시 말을 건넸다.
“평로군 최강의 부대라는 철기대와 명안대가 겨우 반군들 따위에 겁을 먹는단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지…….”
“알겠습니다. 군명이니 그리하겠습니다.”
하목운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반박하려 하자 설영이 그를 만류하며 먼저 대답했다.
하목운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설영은 냉랭한 어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후 대인의 말씀대로 겨우 반군들입니다. 동북 최강의 평로군이 반군들 따위와 세를 논할 수는 없지요. 이번 일은 우리 평로군이 전적으로 맡겠습니다.”
“좋네! 역시 설영답군. 기대해 보겠네.”
후희일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의 입매와는 달리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