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륙풍 1권(17화)
제6장 전귀(戰鬼)(4)


둥! 둥! 둥!
진군을 명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선두에 선 창병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각 정도가 지나 중군인 기마대가 반군의 궁수대들이 매복해 있던 지점을 지날 때까지도 아무런 반격이 없었다. 그제야 원세연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다시 급변하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커다란 함성과 함께 급박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둥! 둥! 둥! 둥!
“적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부관이 다급하게 외치자 원세연이 놀란 눈으로 검우곤을 쳐다보았다.
검우곤은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창천곡의 허리에 해당되는 낮은 언덕의 정상에 이르렀던 창병들이 반군들의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전방을 노려보던 검우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곡의 입구를 막고 있던 놈들의 저항이 시작된 모양이군. 대략 오천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빨리 돌파합시다.”
“오천이면 우리와 맞먹는 병력이 아니오. 게다가 저들은 지세가 유리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돌파가 어렵지 않겠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럼 여기서 그냥 같이 죽자는 말이오?”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원세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연호가 보기에 원세연은 답답할 정도로 소심한 자였다.
“장군님! 선두에 선 창병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관이 고함을 치자 일행들은 모두 앞쪽을 노려보았다. 희미한 여명이 비치기 시작하는 앞쪽의 언덕 위에 있던 창병들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중군인 기마대조차 위험해 보였다.
검우곤이 다급하게 호통을 쳤다.
“멍청한! 저 언덕을 뺏기면 우리는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당장 궁수대로 하여금 언덕 너머를 공격하게 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시오!”
“아, 알겠소. 궁수대 정렬!”
“명안대는 언덕까지 전속 돌진하라! 언덕을 확보해야 한다.”
원세연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검우곤도 명안대를 둘러보며 소리를 쳤다.
연호를 비롯한 명안대원들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전속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잔뜩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지만 상황이 급박함을 알기에 무능한 원세연과 치주군 탓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자칫하다간 철기대까지 위험하게 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언덕의 정상 가까이에 이른 연호는 달려가던 말이 채 서기도 전에 검을 뽑아 들고 뛰어내렸다. 이미 반군의 상당수가 언덕의 정상 위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스각! 스각!
말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두 명의 적군을 가볍게 베어 버린 연호는 우왕좌왕하는 치주군의 병사들을 향해 내력을 실어 고함을 내질렀다.
“우리는 평로군 최강의 명안대다! 우리가 선봉을 맡을 것이니 치주군은 언덕을 사수하라!”
“시발! 뭔 헛소리냐!”
강연추가 연호의 옆에 내려서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연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두 명의 적군들을 일검에 베어 버리고는 강연추에게 말을 건넸다.
“어쨌든 정신은 차리게 해야죠!”
“지랄! 짜증나게 이게 뭐냐, 시발!”
강연추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 명의 적군을 베어 버리며 대꾸했다.
그러나 연호의 외침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치주군의 병사들도 평로군 최강의 정예부대라는 명안대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연호를 비롯한 명안대원들이 언덕 위에 도착하여 적들을 가볍게 베어 넘기며 공격을 주도하자 그들도 불안을 진정하며 사기가 오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밀리던 창병들이 안정을 되찾고 다시 전진을 하기 시작하자, 원세연의 눈에는 놀람의 빛이 가득하였다. 불과 오십 명의 명안대원들이 전세를 바꿔 놓은 것이다.
검우곤이 다시 원세연을 채근하였다.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소! 놈들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밀어 붙여야 하오! 언덕 위에서는 기마대가 선봉에 서야 하니 빨리 중군을 재촉하시오!”
“아, 알겠소! 중군은 전속 전진하라!”
원세연의 명에 따라 중군인 기마대가 속력을 냈다.
잠시 후 검우곤과 원세연이 중군을 이끌고 언덕의 정상에 오르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명안대원들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원세연은 악귀와 같은 명안대원들의 모습에 질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검우곤은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적진을 살폈다.
검우곤이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음……. 놈들의 방어벽이 제법 견고하군.”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오?”
원세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방패수와 장창수가 앞에 서고 그 뒤에 기마대가 도열을 하고 있는 적의 진형이 그에게는 단단한 철벽처럼 느껴졌다.
검우곤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그냥 뚫는 거지! 궁수대로 하여금 엄호를 하게 하고 기마대를 선봉에 세워 돌진합시다.”
“하, 하지만 이대로 돌진하다간 기마대가 당할 것 같은데…….”
“그러나 방법이 없소. 이미 날이 밝았으니 더 이상 미적거리다간 철기대와 만나지 못할 수도 있소!”
대꾸하는 검우곤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반군의 진형이 단단해 보여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는 애써 무덤덤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히히히힝!
갑작스러운 말 울음소리와 함께 연호가 장창을 말에 걸고는 앞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제가 적진을 흔들어 놓을 테니 그때 돌진하십시오!”
“저 미친놈이!”
강연추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연호는 이미 한참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는 치주군에게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사부가 말한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별한 감각이었다.
검우곤이 다급하게 외쳤다.
“궁수대는 뭣들 하는가! 당장 적의 진영을 향해 화살을 날려라!”
연호가 홀로 말을 달려 내려가자 반군 진영에서도 놀랐는지 화살이 쏟아지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호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궁수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새까맣게 날아드는 치주군의 화살 비 때문에 궁수들은 제대로 연호를 겨눌 수가 없었다.
쾅!
연호가 내던진 장창이 방패진을 뚫고 네 명의 병사들을 꼬치처럼 꿰어 버렸다.
연호의 무시무시한 힘에 놀라고 있던 적들 가운데 일부가 진형을 풀고 연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연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적진 속에 뛰어들어 적의 진형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를 막기 위해 화살이 쏟아졌고 창들이 파고들었다. 말은 이미 죽어 바닥에 쓰러진 데다가 그의 목을 노리고 사방에서 무기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연호는 신형을 바람처럼 움직이며 적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포위만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적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동작이 둔한 적들에게 포위되지 않을 만큼 신법에도 자신이 있는 연호였다.
“귀, 귀신! 저, 저건 검귀야! 인간이 아냐!”
치주군은 물론이고 반군 병사들의 입에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에 찬 외침들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호의 몸에도 자상들이 생겨나고 그의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지만 연호는 여전히 빠르게 신형을 이동시키며 적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또한 그의 검은 정확하게 한 치 반의 깊이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연호에게 있어 적의 병사들은 만랑곡의 늑대들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와! 와!
천지를 진동하는 함성과 함께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연호의 활약으로 적의 진형이 흐트러지자 치주군의 기마대가 맹렬하게 돌진을 시작한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치주군은 연호에게 자극을 받아 사기가 충천하였고, 반군은 이미 사기가 꺾여 있었으며 진형마저 흐트러져 있었다.
불과 이각도 채 지나지 않아 반군은 패퇴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검을 휘두르고 있던 연호는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드는 것을 느끼고 검을 뒤로 돌렸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연호에게 달려든 이는 바로 강연추였다.
연호의 허리를 낚아챈 강연추는 발을 굴려 말에 뛰어오르면서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 네놈이 전귀(戰鬼)인 줄 아냐!”
“시발, 닭대가리. 빨리 좀 오지…….”
연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고는 축 늘어져 버렸다.
확실히 늑대와 인간은 달랐다. 늑대들에게는 상처를 입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꽤나 많은 피를 흘렸다.


제7장 귀검랑(鬼劍郞)(1)


“꼬맹아!”
검우곤이 명안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소리를 지르자 제일 안쪽의 침상에서 연호가 하품을 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꼬맹아! 빨랑 일어나!”
“에이, 진짜! 꼬맹이는 누가 꼬맹이에요. 이제는 제가 대주님보다 키도 더 크잖아요!”
연호가 짜증을 내며 대꾸했지만 검우곤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시끄럽다. 무조건 넌 꼬맹이야.”
“자꾸 그러면 저도 곰 대주라고 부를 거예요.”
“뭐, 그러든지. 뒈지고 싶으면…….”
“치이! 근데 왜 불렀어요?”
“장군님이 찾으신다.”
“쩝, 무슨 일이시지…….”
연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회옥이 그를 찾을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검우곤이 침상에 벌렁 드러누우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지는 가 보면 알 것 아니냐!”
“아무튼 다녀올게요.”
“그려…….”
연호는 검우곤의 심드렁한 대꾸를 뒤로하고는 명안당을 나섰다.
연호가 터덜터덜 걸어 이회옥의 처소인 백호각에 이르자 번초를 서고 있던 강진남이 반색하며 말을 건네 왔다.
“여! 연호 아니냐! 여긴 어쩐 일이냐?”
“장군님께서 찾으신다고 해서요.”
“그러냐? 그래, 어서 들어가 봐라!”
“예, 형님도 수고하세요.”
연호가 인사를 건네고는 백호각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강진남과 같이 번초를 서고 있던 목두향이 한껏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조장님! 저 사람이 바로 그 귀검랑 고연호 맞죠?”
“그래, 저 녀석이 그 무서운 녀석이지. 짜식! 코 찔찔거리며 찾아와서는 평로군의 병사가 되게 해 달라고 떼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헌헌장부가 다 되었네…….”
“와, 귀검랑하고 잘 아시나 보네요?”
목두향의 얼굴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평로군 최강의 부대인 명안대 내에서도 가장 용맹한 자로 알려진 귀검랑 고연호는 평로군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지난 삼월에 제남성의 반군을 제압할 당시, 창천곡의 전투에서 단신으로 수천 명의 반군 사이를 휩쓴 무용담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귀검랑이라는 별명도 그때 얻은 것이다.
강진남은 가슴을 내밀며 으스대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저 녀석을 우리 평로군에 넣어 준 게 바로 나야!”
“어! 그래요. 전 황 조장님이라고 들었는데…….”
“뭔 헛소리야. 기천이 그놈은 그냥 구경만 했고, 내가 다 손을 썼는데 말이야. 너 아까 연호가 나더러 형님이라고 하는 거 못 들었냐?”
“그러고 보니 정말 형님이라고 한 것 같네요. 이야, 우리 조장님 대단하시네요.”
“그러니까 너도 이 자식아 내 말만 잘 들으면 군 생활이 팍팍 풀리는 거야!”
“옛!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강진남은 목두향의 호들갑스러운 아부가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회옥의 집무실인 백호전의 문 앞에 이른 연호는 때마침 설영이 이회옥의 방을 나서는 것을 보고는 반색하면서 말을 건넸다.
“어, 형님! 오랜만이네요.”
“이 자식이, 누가 네 형님이냐!”
“에이!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나저나 형님은 어째 나날이 얼굴이 예뻐지십니까? 쩝! 예뻐졌다고 하니 좀 이상하긴 하네…….”
연호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설영은 보면 볼수록 영준한 얼굴이었다. 어렸을 때에는 설영의 무공이 무서워 감히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탓에 몰랐지만 친하게 되고 보니 설영은 정말 영준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 눈에 이채를 띠고 연호를 쳐다보던 설영이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건넸다.
“객쩍은 소리랑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봐라. 장군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예! 그럼 형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언제 술이나 한 잔 사 줘요!”
“어린 녀석이 무슨 술타령이냐!”
저만치 걸어가고 있던 설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를 했다.
하지만 연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설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