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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19화)
제7장 귀검랑(鬼劍郞)(3)
“쓰읍!”
빠르게 들숨을 들이쉰 연호가 재빨리 삼재보와 반삼재보를 번갈아 밟더니 앞으로 나아가며 허리를 슬쩍 숙였다가 다시 튕겨 일어서며 뒤쪽의 허공을 향해 팔꿈치를 찍었다.
팡!
허공을 울리는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자세를 낮춰 오른발로 바닥을 쓸어 간 연호는 용이 솟아오르듯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양발을 번갈아 허공을 찼다. 또다시 날카로운 파공음들이 터져 나왔다.
연호는 바닥에 착지를 하자마자 흐물거리듯이 움직이며 이리저리 신형을 흔들어 대더니, 한순간 허리를 튕겨 앞으로 나아가며 석사자 등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연호의 주먹이 석사장 등의 바로 앞에서 멈추자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흐으!”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날숨을 내쉰 연호는 석사자 등을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바닥에 잠시 만들어 놓은 흔적들을 살폈다. 보법이 제대로 펼쳐졌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연호는 자신의 흔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이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회옥이 건네준 승룡권의 비급에 적힌 대로 마음속에 적의 형상을 떠올리며 초식을 펼쳐 보았지만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명안당으로 돌아가 형들과 박투 수련을 하면서 익혀야 할 것 같았다.
발로 바닥을 휘저어 보법의 흔적을 지운 다음 신형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옮기던 연호가 갑자기 벼락같이 월동문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허억!”
월동문의 입구에는 다급하게 헛바람을 집어 삼키는 소리를 내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방곽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목 바로 앞에는 연호의 검이 멈추어 서 있었다.
연호가 검을 거두며 말을 건넸다.
“말 대가리군. 여긴 무슨 일이냐?”
“저, 저기, 이걸 드리려고…….”
방곽은 부들부들 떨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양손에는 구운 오리 한 마리와 화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방곽은 그것을 연호에게 주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연호가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흠, 오리 구이와 화주라. 제법 기특하군.”
“고 교두님께 드리려고 특별히 구한 것입니다요.”
“좋아! 일단 들어가지.”
연호가 검을 갈무리하면서 자신의 처소로 향하자 방곽이 급히 뒤를 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선 연호는 방곽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병영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보기보단 능력이 있는 모양이군. 속셈이 뭐냐?”
“아이고, 속셈이랄 게 뭐 있습니까? 신궁의 솜씨에 감격을 해서 그런 것입지요. 일단 한 잔 받으십시오.”
방곽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에 화주를 가득 따라 연호에게 건넸다.
연호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화주를 한 모금 삼키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네놈의 술을 얻어 마셨으니,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아이고, 정말로 달리 원하는 것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닙니다요. 정말로 낮에 보여 준 활 솜씨에 감격했습니다. 이놈도 활을 만진 지 오 년이 넘었지만 그런 솜씨는 처음 봤습죠. 저는 시위도 제대로 당기기도 힘들던데 어찌 그런 속사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요?”
방곽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음을 본 연호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을 건넸다.
“낮에도 말했지만, 그 때문에 내가 온 것이 아닌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자네들도 머지않아 그런 실력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야.”
“예! 정말 배우고 싶습니다요. 가르쳐만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요.”
“그래, 낮에 보니 자네도 그리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니더군. 그나마 소질이 있으니 그 정도라도 날린 것이야.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배워 보게.”
“예! 정말 감사합니다요.”
연호는 탁자에 고개가 닿도록 허리를 숙이는 방곽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방곽의 모습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이회옥의 말투를 흉내 내며 짐짓 점잖게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였고, 사 년 만에 달라진 자신의 처지가 재밌기도 하였다.
연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방곽입니다요.”
“그렇군. 방곽, 병영에서 이런 것을 구해 온 것을 보면 밖의 소식도 좀 알겠군. 혹시 소문을 들은 것은 없나?”
연호가 은근한 표정으로 묻자 방곽은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명안대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요. 해주에 파견되어 해적들을 토벌하고 있는 명안대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명안대가 해주에…….”
연호는 눈에 이채를 띠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해주도 평로치청의 영역이니 명안대가 가서 해적을 토벌하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자신이 빠진 상태에서 출정을 하였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것인지 왠지 떨떠름하였다.
방곽이 연호의 눈치를 살피며 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명안대라고 하면 귀검랑이라고 불리시는 고 교두님을 떠올리는데, 이번 출정에 참가하지 못하시어 섭섭하시겠습니다요.”
“아쉽기는 하군. 몸이 근질근질한데 말이야. 혹시 그것 말고 다른 소식은 없나?”
“글쎄요.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요. 특별한 소식은 아니지만 절도사 대인께서 내일 연회를 여실 모양입니다.”
“연회라니?”
“치주자사이신 왕 대인께서 이번에 새로이 병마사가 되신 것을 기념하여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술이나 좀 마시게 되나 하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습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왕 대인이 병마사가 되다니! 병마사는 이 장군님이 아니시냐!”
왕이현이 새로이 병마사가 되었다는 방곽의 말에 연호가 눈에 기광을 일으키며 다그치듯 물었다.
“모,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미 보름 전에 이회옥 장군님을 병마사에서 직위 해제하신다고 공표를 하였습니다요. 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고…….”
“보름 전에? 혹시 이 장군님에 대한 소식은 모르느냐?”
“그냥 묵묵히 퇴임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요. 워낙에 공적이 많으신 분이니 갑작스런 퇴임에 대해서 말들이 많습니다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이회옥 장군께서는 별말씀 없이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우리 치주군의 사람들조차도 납득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
방곽의 말을 들은 연호는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했다.
그가 들었던 소문대로 이회옥의 능력을 질시한 후희일이 강수를 둔 모양이었다. 병마사에서 직위 해제를 시켰다는 것은 이회옥으로부터 군권을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청주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방곽은 연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건넸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요.”
“그래, 방곽. 덕분에 술과 요리를 먹는구나.”
“아이고, 아닙니다요.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곧바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요.”
연호가 가볍게 손을 들자 방곽은 다시 한 번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방곽이 물러난 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연호는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새로 병마사가 되었다는 왕이현에게 말을 하고 청주로 돌아갈 작정을 한 것이다. 만일 왕이현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치주성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행랑을 꾸린 연호가 왕이현의 처소가 있는 청주성의 내원 앞에 이르자 병사들의 군례를 받으며 막 월동문을 나서는 원세연의 모습이 보였다.
연호는 원세연을 보고는 반색을 하였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원세연이니만큼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고 왕이현을 만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연호가 다가가자 원세연이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건네 왔다.
“고 교두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오?”
“왕 대인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소. 안에 기별을 해 주시오.”
“흠, 그것이 지금은 절도사 대인과 같이 계신지라…….”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소. 절도사 대인께도 같이 드릴 말씀이니 일단 기별을 해 주시오.”
“그,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오.”
원세연이 쭈뼛거리며 대답하고는 신형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내원이 있는 안쪽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객이다!”
“후 대인을 보호하라!”
“자객!”
원세연이 화들짝 놀라며 연호를 쳐다보았다.
놀라기는 연호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원세연을 쳐다보았다.
“여, 여기서 기다리시오.”
원세연이 다급하게 말을 하고는 허둥지둥 안으로 달려가자 연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빼서 안쪽을 쳐다보았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왔지만 자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안쪽을 살펴보고 있던 연호는 병사들이 온통 안쪽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월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내원 마당의 좌측에서 병사들이 자객을 포위한 채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복면을 하고 야행복을 입은 자객은 제법 무위가 뛰어난 모양인지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연호는 자신이 뛰어들어 자객을 제압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하고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자객과 병사들의 싸움을 쳐다보고 있던 연호의 눈에 점차 기광이 어리기 시작하면서 팔짱을 끼고 있던 그의 팔이 슬그머니 내려왔다. 자객의 체형이 낯익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날렵하게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약간 좁은 어깨하며 잘록한 허리는 분명히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
“설영……?”
연호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낯이 익은 체형은 설영의 모습과 비슷하였던 것이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연호의 눈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자객은 다름 아닌 설영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절도사 후희일이 이회옥을 병마사의 지위에서 쫓아냈다면 설영이 앙심을 품고 후희일을 노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객은 설영이 분명해 보였다.
“시발!”
연호는 오랜만에 욕설을 내뱉으며 신형을 날렸다. 자객이 설영이라는 확신이 든 이상 그냥 잡히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창! 창! 창!
신형을 날린 연호의 허리춤에서 검광이 폭사되자 순식간에 세 자루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연호가 자객의 옆에 내려서자 원세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고, 고 교두!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 사람은 내가 데려가야겠소!”
“그, 그자는 자객이오!”
원세연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연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 길을 비키시오. 내가 왜 귀검랑인지 잘 알지 않으시오.”
“그, 그런…….”
원세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귀검랑 고연호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당황스러운 것이다.
자객과 연호를 포위한 병사들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창천곡에서 귀검랑 고연호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갑시다!”
연호가 나직하게 말을 건네고 움직이자 자객은 눈에 이채를 띠더니 즉시 연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연호의 앞을 막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서자 원세연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마, 막아라!”
스각! 스각! 스각!
원세연의 외침에 어정쩡하게 달려들던 세 명의 병사가 연호의 검에 당해 나뒹굴었다. 그들의 목은 정확하게 한 치 반만큼만 잘려 나가 있었다. 단지 검광이 한 번 번쩍였을 뿐인데 세 명의 병사가 즉사한 것이다. 전귀(戰鬼)라는 귀검랑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연호의 무위에 놀란 병사들이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연호와 자객은 이미 내원의 담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원세연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들이 담장을 넘는다면 잡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활을 쏴라!”
원세연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뒤늦게 달려온 궁수들은 화살을 잴 시간도 없었다. 이미 연호와 자객이 담장 위에 올라서고 있었던 것이다.
쉭!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번뜩이는 화살 한 대가 갑작스럽게 날아들어 자객의 어깻죽지에 박혀 들었다.
연호가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왔는지 후희일이 맥궁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다.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후희일이 맥궁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 의외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호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화살을 맞은 자객이 담장 너머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자객의 옆에 내려선 연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래, 가자!”
설영의 목소리가 자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연호가 확신한 대로 자객은 설영이 맞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