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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20화)
제8장 백호의 꿈[白虎之夢](1)


설영과 함께 달아나다 치주와 청주 사이에 자리한 노산(老山)의 초입에 들어선 연호는 앞장서서 홍운곡으로 내달렸다. 홍운곡은 그가 과거에 노산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발견한 은밀한 동굴이 있는 곳이었다.
홍운곡의 동굴에 이른 연호는 설영을 먼저 들어가게 하고는 나뭇가지로 입구를 위장한 다음 불을 피울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안으로 갔다.
동굴의 한쪽 벽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설영은 이미 복면을 벗고 있었는데 그의 영준한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아마도 피를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연호가 설영의 옆에 주저앉아 불을 피우고는 말을 건넸다.
“형님, 괜찮아요?”
“이 자식이, 곧 죽어도 형님이냐?”
“말씀하시는 것 보니 견딜 만한가 보네요.”
“그래, 견딜 만하다.”
“흠, 얼굴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한 번 봐요.”
연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설영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급히 말을 이었다.
“네놈이 걱정할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말아라.”
“에이, 그래도 화살은 빼야죠. 등 돌려 봐요.”
“괜찮다니까. 그러는구나.”
“진짜 왜 이러실까. 화살촉을 빼지 않고 놔두면 쇳독이 오른다는 것은 신참들도 아는 상식인데 천하의 섬전무영께서 투정을 부리시네. 빨리 등 돌려 봐요!”
연호의 채근에 설영은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뒤쪽에서 설영의 어깻죽지에 파고든 화살은 제법 깊숙이 박혀 있었다.
연호는 품에서 소검을 꺼내 모닥불 위에 얹어 놓았다. 화살촉을 빼내기 위해 소검을 달구려는 것이다.
설영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뭘 하려고 그러느냐?”
“뭐하긴요. 화살촉을 빼내야지요. 조금 아프더라도 참으세요.”
“그냥, 살대만 잘라라. 화살촉은 나중에 청주에 가서 빼마.”
“무슨 소리예요. 이 상태로 놔두었다간 청주에 닿기도 전에 중독되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몰라요. 화살촉 정도는 한두 번 빼 보는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스각!
다시 대꾸를 하려던 설영은 검광이 번뜩이자 움찔했다. 연호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등에 박힌 화살의 살대를 잘라 버린 것이다.
연호가 입가에 살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별로 아프지 않죠?”
“그래, 제법이구나.”
설영은 진짜로 감탄한 눈치였다. 연호가 살대를 잘라 내었음에도 그다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몸속에 박힌 화살촉에 충격을 주지 않을 만큼 연호의 검이 예리하다는 말이었다.
연호가 실실거리며 달궈진 소검을 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젠 화살촉을 빼낼 것이니 웃옷을 벗으세요.”
“그, 그냥 빼내거라.”
“엥! 옷 입은 채로요? 그러면 살대를 잘라 낼 필요가 없었잖아요. 나 참, 남자끼리 부끄러울 일이 뭐 있다고…….”
연호가 투덜대며 화살이 박힌 부위를 슬쩍 건드리자 설영은 움찔하면서 대꾸했다.
“그냥 귀찮아서 그런다. 그러니 대충 뽑아내고 약이나 발라라.”
“예, 예! 알아서 치료합죠. 근데 재갈은 안 물려도 되려나.”
“쓸데없는 소리…… 웁!”
치이익!
냉랭하게 대꾸하던 설영은 연호가 느닷없이 불에 달궈진 소검을 들이대자 극심한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살이 타는 노린내와 함께 적당히 상처를 찢은 연호는 화살촉을 잡아 뺐다.
설영은 연호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것인지 처음 신음을 흘린 이후로는 입을 꽉 다문 채 조그만 신음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화살촉을 제거하고 지혈산을 뿌린 뒤 금창약까지 바른 연호는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그냥 놔두면 여름철이라 종창이 생길 수도 있는데……. 어디 붕대를 할 만한 거 없나…….”
“어차피 곧바로 청주로 갈 것이니 괜찮다. 조금 있다 바로 출발하자꾸나.”
“벌써요?”
“후 대인은 아마 나의 정체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청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절도사가 형님을 알아봤다고요?”
“그래, 그는 너보다 나를 훨씬 나를 오래 본 사람이다. 네가 나를 알아봤는데 어찌 그가 나를 몰랐겠느냐?”
설영의 말을 들은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설영의 말대로라면 그는 절도사 후희일이 자신을 바로 알아볼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자객행을 한 것 같았다.
결국 필살의 의지가 있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지를 후희일에게 보여 주려고 한 것 같았다.
연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장군님이 병마사에서 물러났다는 말은 뭐고, 형님이 왜 갑자기 자객 놀이를 하는 겁니까?”
고개를 돌려 연호를 잠시 쳐다본 설영은 눈에 노기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절도사 후희일이 장군님을 배신하였다. 그자는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장군님을 포용할 그릇이 아니었어. 장군님을 병마사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고는 자신의 심복이랄 수 있는 왕이현에게 군권을 물려주었다.”
“저도 오늘에서야 그 소식을 듣고 청주로 돌아가려고 왕이현을 찾아갔던 겁니다. 근데, 절도사가 그렇게 한다고 장군님에게서 군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병사들은 모두 장군님을 지지하잖아요.”
“그래서 그자는 치사하게 일을 꾸몄다. 명안대를 해주로 보내고, 철기대도 마적들의 토벌을 핑계 삼아 체주로 보내 버린 뒤 갑작스럽게 그와 같은 공표를 한 것이다. 우리 평로군의 주력을 모두 떼어 놓은 뒤에 그처럼 개 같은 짓을 벌인 것이지.”
“젠장! 명안대가 해주에 갔다는 말은 들었는데, 철기대도 체주로 보냈군요. 그 인간 보기보다 교활하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연호의 말에 설영은 침중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명안대와 철기대는 당장 복귀하도록 전서를 보냈다. 문제는 장군님이다. 장군님은 고종사촌 형인 후희일을 치는 것을 망설이고 계신다.”
“아! 그래서 형님이 나선 것이군요. 성공하면 절도사를 암살할 것이니 그대로도 좋고, 실패한다면 절도사가 움직일 것이고, 결국 장군님도 할 수 없이 전쟁을 각오하실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 네 녀석의 말이 맞다.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벌인 일이었다. 후희일은 장군께서 순순히 병마사에서 물러났다고 하더라도 안심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 내가 빌미를 제공하였으니 모든 것을 장군께서 사주한 것이라고 우기며 장군님을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연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야 설영의 자객행이 왠지 어설퍼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설영은 처음부터 후희일을 직접 제거할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후희일이 잠든 시각도 아닌 이른 시간에 잠입하여 들킨 것도 단지 후희일을 자극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연호는 문득 얼마 전에 읽어본 손자병법에 적힌 구절이 생각나서 말을 건넸다.
“흠……. 적을 잘 움직이는 자는 태세를 보여 적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이로움을 보여 주면 적이 반드시 취하려고 할 것이니, 이로움으로써 적을 이끌어 내고, 병사들을 대기시켜 적을 멸한다.(故善動敵者 形之 敵必從之 予之 敵必取之 以利動之 以卒動之) 손자병법의 병세편에 나오는 말이죠. 형님의 계책이 딱 그대로네요.”
“호! 네가 손자병법도 알고 있느냐?”
설영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연호를 쳐다보며 말하자 연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받았다.
“뭐, 그 정도야 군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본이죠. 하하하!”
“요 녀석이!”
설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리며 연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잣거리에서 패악질을 하고, 난데없이 평로군에 들게 해 달라고 떼를 쓰던 어린아이였던 연호를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남들이 귀검랑이라고 부르며 경외시하는 연호였지만 그에게는 늘 철없는 어린아이다.
그러나 오늘 자신을 구하고 이회옥의 거취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연호는 더 이상 그가 생각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설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머쓱해진 연호가 실실거리며 말을 건넸다.
“에이 뭘 또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형님의 미모가 유달리 출중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전 연상은 싫거든요. 그러니 저한테 반하시면 곤란합니다. 아, 물론 남자는 더욱더 안 되고요.”
“뭔, 헛소리냐! 설령 내가 여자라 해도 너 따위 코흘리개 찌질이한테 반할 일은 없으니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이제 가자!”
설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호도 따라서 신형을 일으키고는 갑자기 고의를 풀었다.
설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뭐하려는 것이냐?”
“뭐하긴요. 불은 꺼야지요. 마침 소피가 마려웠거든요.”
“그, 그래. 흠흠…….”
“형님도 소피 마려우면 동참하시지요. 한 줄기보다는 그래도 두 줄기가 낫지 않겠어요?”
“나, 난 괜찮다.”
설영은 더듬거리며 대답하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치이이익!
“갑시다!”
“어, 응, 그래.”
타오르는 장작에 물을 끼얹는 묘한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설영은 볼일을 다 본 연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황급히 대답하고는 뒤를 따랐다.

밤새 노산을 넘은 연호와 설영이 청주성에 이르자 날이 훤하게 밝았다.
다행히 아직은 후희일이 군사를 이끌고 청주성에 도착하지 않았는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충!”
연호와 설영이 다가가자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설영을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군례를 올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설영은 군례를 한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조장이 누구냐?”
“예, 황기천 조장님입니다.”
“황기천?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 그것이……. 저기 오고 계십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병사는 성문 안쪽에서 급히 달려 나오고 있는 황기천을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외쳤다.
황기천이 복장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소초에서 자고 있다가 군례를 하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서 황급히 달려 나오는 것 같았다.
황기천이 숨을 헐떡이며 급히 인사를 건넸다.
“헉! 헉! 부관님을 뵙습니다.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성문을 열고 나서 잠시…….”
황기천이 고개를 조아리자 잠시 노려보던 설영이 정색을 하고는 말을 건넸다.
“지금부터 내 말을 명심하라. 당장 성문을 폐쇄하고 내 허락 없이는 쥐새끼 한 마리도 들여보내지 말라.”
“예? 아니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설령 절도사가 온다고 하더라도 성문을 열어 주지 말고 내게 연통을 넣어 지시를 기다려라.”
“저, 절도사 대인이 오더라도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 평로군의 철기대와 명안대를 제외한 어떤 군사도 성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
“옛! 알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황기천은 설영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사단이 생겼음을 눈치챘는지 곧바로 수긍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군문에서 십 년을 넘게 보낸 그였으니 그 정도 눈치는 있었던 것이다.
그르르릉!
성문과 관도를 잇는 해자교가 굉음을 내며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해자교를 올린다는 것은 전시 상황임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해자교가 올라간 뒤, 이어서 성문이 폐쇄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설영은 황기천에게 나머지 성문에도 알려 자신의 지시 사항을 전하라 하고는 연호와 함께 이회옥의 사저로 향했다.
병마사에서 물러난 이회옥은 청주성의 동쪽에 위치한 그의 사저에서 은거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호와 설영이 이회옥의 사저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평로군의 무장들이 갑주를 벗고 평복을 한 채 모여 있었다.
연호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영을 쳐다보았다.
설영이 나직하게 설명을 하였다.
“저들은 장군님이 퇴임하신 이후 계속 이곳에 모여 병마사 퇴임을 철회하실 것을 종용하고 있다.”
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회옥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평로군의 무장들은 그의 퇴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설영과 연호가 다가가자 평로군의 좌군 부장인 조인항이 다가오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설 부관, 어떻게 되었는가?”
“놈을 해치우지는 못했습니다만, 자극을 하였으니 곧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놈이 반응을 보이면 장군님도 더 이상은 방관하고 계시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군. 수고하였네. 일단 장군님을 만나 보시게.”
“예, 성문은 폐쇄하라고 일러두었으니 조 장군님도 준비를 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렇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