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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21화)
제8장 백호의 꿈[白虎之夢](2)


조인항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을 본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마치 이번 일을 설영이 주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설영의 나이가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 연호는 알지 못하였다. 막연하게 자신보다 너덧 살 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많이 봐줘도 이십대 중반에 불과한 설영이 삼만에 달하는 평로군의 향방을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새삼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다.
잠시 후 연호가 설영의 뒤를 따라 이회옥의 사저 안으로 들어서자 정원에서 화초들을 손질하고 있는 이회옥의 모습이 보였다.
연호는 조금은 수척해 보이는 이회옥의 얼굴을 보자 울컥 화가 치솟았다. 지금 이회옥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것은 화초를 다듬는 소도가 아니라 전장을 호령하는 장검이어야 하는 것이다.
연호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뭐하고 있는 겁니까?”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설영! 괜한 짓을 했구나.”
약간 놀란 표정으로 연호를 쳐다본 이회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영에게 노한 어조로 질책하였다. 그는 설영이 괜스레 연호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영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가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구해 줘? 음……. 부상을 당했구나.”
의아한 표정으로 설영을 쳐다보던 이회옥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영의 야행복에 묻은 피를 본 것이다.
연호가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절도사 나리의 맥궁에 한 방 맞았습니다. 근데 그 양반 맥궁을 다룰 줄 알면서 왜 교두를 보내 달라고 한 것입니까?”
“그야, 형님도 우리 고구려 무가의 후손이니 당연히 맥궁을 다룰 줄 알지 않겠느냐. 다만 절도사께서 직접 병사들을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니 교두를 요청하신 게지.”
“그런가? 전 또 무늬만 고구려 유민이고 알맹이는 한족인 줄 알았지요.”
“…….”
이회옥은 물끄러미 연호를 쳐다보았다. 연호의 말은 후희일이 같은 고구려 유민이자 외사촌 동생인 그를 배척하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말이었다.
설영이 굳어진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넸다.
“성문을 폐쇄하였습니다. 곧 절도사의 군사가 들이닥칠 것입니다.”
“쓸데없이 일을 벌였구나.”
“장군께서 그의 편협한 성정을 인정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나로 하여금 형제에게 검을 겨누게 해야 속이 시원하더냐?”
“그가 먼저 장군님께 검을 겨누었습니다.”
“휴……. 얼마나 올 것 같으냐?”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설영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이회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설영과 연호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후희일의 병사가 얼마나 될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이회옥이 드디어 싸우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이었다.
설영이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 당장 후희일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치주군이니 삼만 정도 될 것입니다.”
“삼만이라……. 쉽지는 않겠구나.”
“해볼 만합니다. 비록 청주성 내에는 중군과 좌군을 합쳐서 일만의 병력밖에 없지만 청주성은 해자호가 둘러싸고 있어 공략이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사이 수광현에 주둔하고 있는 우군을 소환하고 철기대와 명안대만 빠른 시일 내에 복귀를 한다면 치주군 따위는 금방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 단순히 생각한다면 그러하겠지. 하지만 세상의 일이 어찌 내 생각대로만 전개되겠느냐. 나머지 사주의 군대가 생각보다 빨리 동요할 것이다. 그들은 강성한 평로군의 존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설영은 일시 말문이 막혔다. 치주군 삼만은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사주의 군대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회옥의 말대로 나머지 사주의 군대가 평로군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면 이 기회에 후희일의 편을 들어 치주군과 함께 움직일 가능성도 높았다. 그들이 움직인다면 철기대와 명안대, 심지어 수광현의 우군까지도 제때에 복귀하지 못할 수 있었다.
이회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왕지사 벌어진 일이니 이제 와서 어쩌겠느냐.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내게 있다면 기회도 주겠지. 설영은 곧바로 회의를 준비하고, 연호는 잠시 나를 보자꾸나.”
“예!”
설영이 대답하고는 즉시 달려 나가자, 연호도 이회옥을 따라 내원으로 향했다.

***

평로치청 절도사 후희일이 치주군을 이끌고 청주성으로 쳐들어온 것은 그날 오시 무렵이었다. 후희일은 자신을 암살하려 한 설영의 목을 내놓고 이회옥도 책임이 있으니 모든 군권을 내놓고 요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후희일의 요구 조건에 이회옥은 나직하게 코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차피 명분을 쌓기 위한 주장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주의 군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려야 하는 후희일은 이회옥을 칠 명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차분한 대응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불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후희일이 정한 시한인 내일 아침 진시까지 수광현에 주둔하고 있던 평로군의 우군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이미 사주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된다면 청주성에 남아 있는 일만의 군사만으로 삼만에 달하는 치주군과 장기전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주위가 어둑해지는 술시 무렵이 되자 연호는 치주군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서문의 망루에 올랐다. 율리평을 빽빽하게 메운 치주군의 막사와 병사 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뒤로 높다랗게 솟아 있는 노산의 봉우리 너머로 저녁 해가 붉은 노을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느냐?”
고개를 돌려 보니 설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호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뭐하러 왔어요?”
“충분히 움직일 만하다. 의원의 말이 네가 일찍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쇳독이 퍼져서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하더구나. 고맙다.”
“에이, 쑥스럽게 뭘 그런 말을 다 하실까? 그보다 수광현의 우군은 아직 소식 없어요?”
연호의 물음에 설영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직은 소식이 없구나.”
“흠……. 장군님의 생각대로 나머지 사주의 군대가 움직인 것인가? 수광현이면 반나절 거리인데…….”
“아직은 섣불리 판단을 할 수 없구나. 갑작스럽게 전서를 받았으니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그보다 장군님이 달리 지시한 것이라도 있느냐?”
설영이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이회옥이 연호를 따로 불러서 무슨 말을 하였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연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뇨. 별거 아니었어요? 치주군의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연호는 시선을 돌려 다시 치주군의 진영을 노려보면서 이회옥이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려 보았다.
설영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얼버무렸지만, 이회옥이 그에게 해 준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이회옥은 사부인 흑 노사가 서찰에서 자신이 사신지안의 소유자인 것 같다는 말을 언급하였다고 전하면서 사신지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사신지안은 삼한에서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였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지안을 가진 네 명의 인물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과 운명을 지니고 있는데, 만약 연호 자신이 진짜 사신지안의 소유자라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회옥 자신이 백호지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사부의 말대로 사신지안의 소유자라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사신지안이 동시대에 나타나는 이변이 생기는 것이었다.
사신지안의 소유자가 동시대에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삼한의 전설인 사신지연(四神之緣) 때문이었다. 사신지연은 사신지안의 소유자 네 명이 동시대에 나타나 힘을 합친다면 천하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이었다.
결국 이회옥의 말은 동시대에 두 명의 사신지안이 나타났으니 나머지 두 명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곧 삼한의 후예가 대륙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었다.
사신지안과 사신지연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연호는 이회옥이 대륙 정복을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호의 꿈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회옥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다.
대륙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당을 멸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역모인 것이다. 그동안 이회옥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꿈꿔 왔던 연호였지만 막상 자신의 모든 것을 이회옥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또한 그에게 있어 애증이 겹치는, 잃어버린 나라 고구려를 대륙의 땅에서 되찾겠다는 이회옥의 꿈은 연호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작 고구려 황통의 핏줄을 이은 사람은 이회옥이 아니라 연호, 고연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연호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지금은 그와 같은 문제보다도 당장 눈앞의 후희일과 치주군을 상대할 궁리를 해야 했다. 적어도 후희일은 연호 자신이 함께할 사람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었다.
“뭐하냐?”
설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연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아뇨. 모기가 많아서……. 헤헤! 그보다 그만 내려가서 좀 쉬세요.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요.”
“다른 병사들도 모두 네 녀석처럼 속이 편하다면 좋으련만, 병사들이 제법 불안해하고 있구나.”
“그게 뭐 아무래도 병세는 저쪽이 훨씬 강해 보이니까요. 그래 봤자 반군들에게도 쩔쩔매던 치주군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후희일이 비록 소인배에 지나지 않지만, 그도 우리 평로군의 무장으로서 군사를 이끌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설영의 말을 들은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후희일 역시 고구려 무가의 후예이니 당연히 맥궁을 다룰 줄 안다고 하던 이회옥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후희일은 의외로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는 고개를 돌려 치주군의 진영이 세워진 율리평 쪽을 쳐다보았다.
이제 완전히 해가져서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치주군의 진영은 조용한 적막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연호는 그 모습에서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연호가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형님, 아무래도 좀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습니다.”
“뭐? 적진을 살피러 간다는 말이냐?”
“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생각해 보니 저는 명안대잖아요. 그게 우리 명안대의 임무라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어요. 다녀와서 말씀드릴 게요.”
“그래……. 조심하여라.”
“옙!”
연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는 성벽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찌르르!
요란한 벌레 소리를 들으며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연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십 장 밖에 번초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번초를 살펴보던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번초들 중 한 명은 그가 알고 있는 방곽이었다. 연호는 어쩌면 방곽에게서 치주군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가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방곽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시발! 지지리 복도 없지 말이야. 겨우 귀검랑을 꼬셔서 맥궁을 배워 보나 했는데 말이야. 이게 뭔 짓이냐?”
“형님은 그자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 않소? 단칼에 세 명을 베고 달아났다고 하던데. 게다가 만날 우리를 뺑뺑이만 돌렸잖아요.”
“그거야, 귀검랑에게 달려든 놈들이 미친놈들이지! 죽으려고 환장한 거란 말이다. 그리고 우리 뺑뺑이 돌린 거는 어쨌든 귀검랑 말대로 체력이 있어야 맥궁을 쓸 수 있으니 할 수 없잖아.”
“하이고, 형님이 귀검랑하고 뭔 관계라도 되는 것이오? 어찌 그리 그 작자 편을 드시오?”
“이 자식이 진짜 사람 말을 안 믿네. 귀검랑이 나에게 맥궁에 소질이 있다고 직접 가르쳐 준다고 했다니까!”
“나중에 가르쳐 주지.”
“그렇…… 흡!”
대꾸를 하던 방곽이 화들짝 놀라서 헛바람을 삼키며 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다.
연호가 나타나 같이 번초를 서던 막충의 입을 틀어막고는 자신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이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연호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막충을 바닥에 눕히고는 방곽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이자는 수혈을 짚어 재웠으니 잠시 후에 깨어날 것이오. 그래, 잘 지냈소?”
“그, 그렇습니다요. 어, 어찌 여기에…….”
“그야 뭐 정탐하러 온 것 아니겠소. 그게 내 일이니까 말이오.”
“그, 그렇군요.”
“그럼 말해 보시오.”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방곽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쳐다보자 연호가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얼마나 온 것이오?”
“삼만으로 알고 있습니다. 치주성의 군사가 모두 동원되었습죠. 참! 큰일 났습니다요. 조금 전에 기습대가 출발하였다고 들었습니다요.”
“기습대라니?”
“오늘 밤 기습을 한다고 병사들이 출동을 하였습니다요.”
방곽의 말에 연호는 눈을 치켜떴다. 후희일이 얕은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치주군의 기습 부대는 자신과 마주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서문을 노리지 않고 다른 쪽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우회하여 지형이 평탄한 북문 쪽을 노릴 가능성이 컸다.
연호는 다급해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방곽을 돌아다보며 말을 건넸다.
“고맙소. 혹시 이번 싸움에 참가하더라도 궁수이니 가급적 뒤쪽에 있으시오. 그래야 나중에라도 맥궁을 배울 것 아니오.”
“예. 헤헤!”
방곽은 헤벌쭉 웃음을 보였다. 연호는 나중에라도 그에게 맥궁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