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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3화)
1.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덕분에(3)


“헉!”
성도 남촌(南村)에 들어서자마자 유심은 걸음을 멈추고 외마디를 터트렸다. 유심을 놀라게 만든 것은 남촌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거대한 현판 때문이었다.
이제껏 보았던 가장 큰 현판은 사천당가의 현판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한 크기를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현판은 그런 사천당가의 그것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황금 칠을 한 듯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거대 현판. 화려함만을 놓고 본다면 사천당가의 그것을 홍등가 주루의 현판으로 전락시킬 정도였다.
현판만으로도 그 장원 주인이 어떤 위세를 갖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신장(武神莊).

현판에는 이렇게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현판을 바라보던 유심은 품에서 불한당잡배명부를 꺼내 천천히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이름:관무백(關武伯).
거주지:남촌 무신장.
직업:전직 상승대장군. 백전불패의 명장. 그 공을 인정받아 퇴임시 황제로부터 천무신장(天武神將)이라는 별호를 하사받음.
(중략).
외상 금액:은자 닷 냥.

장부 밑에는 외상 내역에 관한 구체적인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관무백의 기록을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렇지만 이곳으로 오기 전 미리 읽었던 내용과 똑같았다.
유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유심이 무신장을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현판은 그 계획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배신당한 느낌이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거기에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사실은 천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제길,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악으로 깡으로 어떻게든 받는다.”
주먹을 불끈 쥐고 무신장으로 향했다.
이곳 성도에서 사천전충이란 별호를 달고 생활한 게 오 년이지만 유심은 이곳을 처음 들렀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남촌 사람들이 남의 돈을 떼먹거나 누구에게 맞을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유심에게 무엇을 부탁할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 뜻이다.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
남촌으로 들어선 유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의 모습은 성도 외곽에 있는 여느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띠집이고 나무나 벽돌, 기와 등을 이용해 그럴듯하게 만든 집들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보였다.
유심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마을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성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팔이 하나 없거나 다리가 없는 불구자들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성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여인이거나 열 살이 넘지 않아 보이는 아이들이다.
낯선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섰음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유심에게는 그게 편했다.

* * *

“루∼루∼루루∼루루루∼∼”
유심이 관무백을 찾아 남촌으로 들어선 그 시간, 호걸주가 주인 겸 주방장 왕평상은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칼질을 하고 있었다.
왕평상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은 그나마 휴지가 될 뻔했던 불한당잡배명부가 한 냥 이라는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사실 장사가 제법 잘되는 호걸주가 주인, 왕평상에게 한 냥은 그렇게 큰 돈이 아니다. 왕평상의 기분을 더욱 좋게 해준 것은 사천전충 장유심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때문이다.

“다음부터 여기에 적힌 인간들이 외상으로 뭘 처먹을 염려는 없게 할게. 그럼 아저씨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잖아. 안 그래?”

다른 사람 말이라면 ‘개.소.리!’ 라고 단칼에 씹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의 장본인이 장유심, 왕평상은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왕평상에게 이보다 큰 기쁨은 없다. 일 년에 오백 냥 정도의 은자를 버는 셈이다.
“새끼들, 당해봐라. 켈켈켈켈.”
사천전충에게 걸려 쩔쩔매고 있을 불한당잡배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자자, 잠깐!”
미친놈처럼 혼자 웃음을 토하던 왕평상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점점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
“크크크, 큰일이다!”
휘이―잉!
왕평상이 들고 있던 부엌칼을 주방 바닥에 팽개치고는 황급히 호걸주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고, 이를 어째? 그분 이름은 찢어 버렸어야지 이 돌대가리 새끼야――!”
왕평상은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며 성도 시장통을 달리고 또 달려 대로로 나왔다.
“왕씨 아저씨,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아줌마 바람났데요?”
“……!”
정신없이 달리던 왕평상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로변에 위치한 주루 화빈각(華賓閣)에서 손님 끄는 일을 하는 꺽다리가 이 층에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 이놈아, 큰일 났어!”
“……?”
“돈벌레 새끼가 큰 사고 치게 생겼어. 말려야 돼. 무조건 말려야 된다고!”
“뭐요? 혀혀혀, 형님이요?”
재미있다는 듯 왕평상을 보던 꺽다리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화빈각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눈웃음, 뚱땡이, 빨리 나와! 형님한테 사고 났데――!”
와장창!
꺽다리의 큰소리와 동시에 화빈각 옆에 있는 부용루(芙蓉樓)와 용호각(龍虎閣) 두 곳의 정문이 박살났다. 동시에 눈웃음과 뚱땡이가 개구리처럼 튀어나왔다. 더구나 눈웃음은 지금까지 퍼질러 자고 있었는지 속옷 바람이었다.
속옷만 걸친 기생의 맹렬한 질주.
그것이 신기했는지 길을 걷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눈웃음을 보았지만 눈웃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속옷을 휘날리며 앞서 달리는 꺽다리와 왕평상의 뒤를 따랐다.
꺽다리는 벌써 왕평상을 앞지르고 있었다.
“이놈아, 어딘지는 알고 가는 게야?”
“참, 형님 계신 곳이 어디예요?”
“그건 나도 몰라. 그렇지만 녀석보다 남촌에 무조건 빨리 도착해야 돼!”
쌔애―앵!
왕평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꺽다리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자신 때문에 성도 시장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은 모르고 유심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현판만을 응시하며 여유작작하게 무신장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척!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정면을 향했다.
“이건 또 뭐야?”
정면을 응시하던 눈이 풀렸다. 허리춤에 올렸던 손도 힘없이 내려왔다. 거대한 현판에 어울리는 거대한 장원을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저 무거운 현판을 어떻게 머리위에 얹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장원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말이 장원이지 장원이 아니다.
일반 백성, 그것도 아주 가난한 백성이 살고 있을 법한 세 칸짜리 작은 띠집이 자기 몸보다 더 큰 거대 현판을 받쳐 들고 있었다.
유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네. 집을 팔아도 닷 냥 받기 어렵겠어. 하긴 그래서 여기가 첫 번째지만 말이야. 크크크크.”
“허허…… 뉘신데 남의 집을 팔려고 하시는가?”
“……!”
유심이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태어나 별별 사람을 다 만나보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 같은 이는 처음이었다.
칠 척에 이르는 거인.
키만 큰 것이 아니다. 몸 또한 거대했다. 두 자가 넘는 긴 수염이 바람에 펄럭이고, 굵은 팔뚝은 당장 산이라도 뽑아 올릴 기세로 연신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사천전충으로 활동하면서 무인들 중에 팔 척 가까운 자도 만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유심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눈빛이었다.
수염과 같이 흰 눈썹 밑에 자리한 두 눈은 산중지왕 호랑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무시무시한 안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태산(泰山).
사내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그것이었다.
“노인장께서 관 대장군이십니까?”
“허허허, 내 벌써 노인이라 칭함을 받기에는 그렇지만 자네가 말한 사람이 관무백이라면 맞네.”
유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전 칠십이 넘어 퇴역한 노장이라면 지금은 팔십이 넘은 그야말로 노인네. 만만히 생각했는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천무신장이라는 별호가 이보다 더 어울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감탄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움츠러드니 입이 닫혀 버린 것이다.
“허험!”
헛기침부터 터트렸다.
쪼그라드는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그것이 최고였다. 역시 헛기침을 하고 나니 다시 호기가 솟았다.
“대장군께 외상값을 받으러 왔습니다.”
“외상? 그게 무슨…….”
“호걸주가를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호, 호걸주가!”
‘호걸주가’라는 한마디와 함께 관무백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들른 적이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주가를 들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멀리서 찾아온 전우이자 친구였던 퇴역 장군들에게 술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허허, 이런 낭패가 있나.’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니 잊지는 않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내 잠시 잊고 있었네. 내 곧 갚을…….”
“지금 주십시오.”
“뭐?”
“지금 달라 하였습니다. 벌써 반년이 넘었으니 기다릴 만큼은 기다렸다고 생각됩니다.”
“허허, 그건 그렇군. 허나 없는 은자를 어찌 주겠는가?”
“은자가 없으시다면 몸으로 때우셔야지요.”
“엥! 매품이라도 팔라는 것인가?”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매품팔이는 저 혼자 해먹기도 바쁘거든요. 장군님과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늘어서 단가 낮아지는 것은 질색입죠.”
‘경쟁자?’
관무백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동안 그에 대한 소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이 허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아니었다. 보아하니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성주도 어려워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강짜를 부리는 녀석이라니…….
‘이 녀석 보게.’
한편으로는 괘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심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먼저 눈부터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대의 기선 제압을 위해 눈싸움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유심 역시 그런 관무백의 의도를 알아채고 눈을 부릅뜨며 상대했다.
‘고얀 놈이로고.’
백만 대병을 눈빛 하나로 수족처럼 부렸었다.
그의 수하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보는 자는 없었다. 아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자도 없었다. 그런데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꼬마가 자신의 날카로운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었다.
슬쩍 내공을 끌어올렸다.
칠십 년이 넘는 무공 수련과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하사한 영약들을 꾸준히 복용한 덕분에 천무신장 관무백의 공력은 삼 갑자(三甲子)에 달했다. 공력만으로 따진다면 대장군 관무백은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엄청난 강자다.
‘이놈 봐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사이, 어느덧 삼성 가까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 정도면 거의 일 갑자.
절정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류고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솜털도 가시지 않은 하룻강아지가 담담히 자신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오성까지 끌어올렸다.
거의 일백 년 공력. 그제야 유심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었지만 유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눈자위 주변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조용히 기다리거라.”
“…….”
유심은 그저 이만 악물었다. 그것은 유심의 선택이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기혈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역류한 핏줄기가 그의 목까지 차올랐다. 입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피를 쏟고 죽을 것만 같았다.
관무백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해(害)하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유심이 마음에 들었다.
‘허허허, 나보다 더한 놈이 있다니.’
관무백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 역시 어렸을 적 고향 신양(信陽)에서 독종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죽으면 죽었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의지가 한낱 병졸에 불과했던 그를 상승대장군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