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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5화)
2. 돈을 내시면 무공을 배워드리지요(2)
씨―잉!
음산한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호유곡.
우거진 수풀 한복판에 한 사내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얼굴 전체가 수염으로 덮여 있어서 그 용모조차 파악할 수 없는 괴인.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돌부처인 양 그저 묵묵히 한 곳만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다.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높이 두 자 정도. 얼핏 보면 풀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피면 가지도 있고 잎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듯 보이는 푸른빛의 작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괴인의 시선은 바로 그 열매에 고정되어 있었다.
괴인, 그는 바로 사천전충 장유심의 아버지 장연걸(張椽傑)이다.
벌써 오 년이 흘렀다. 그가 나무에서 시선을 떼는 시간은 열흘에 단 일각, 아들 유심이 놓고 간 약을 가지러 가는 시간뿐이다.
잠도 앉아서 잤다. 먹지도 앉았다. 아니, 아들 유심이 건넨 약초는 약이자 식량이며 물이었다.
정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면 손에 닿는 풀들을 뜯어 먹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늑골이 모두 드러난 깡마른 몸에 휑한 얼굴은 해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 그나마 그 눈빛이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쿨룩!”
기침과 동시에 사내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주루룩!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바지를 적셨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바지는 온통 핏빛이다. 그중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부분도 상당했다.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아들 덕분에 아직 생명은 붙어 있다. 그렇지만 피를 토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유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살아본 세상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유심의 별호가 사천전충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얼마나 힘겹게 약초를 구해오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와드득!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시선을 다시 고정시켰다.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요물(妖物)!”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 * *
‘여, 여기가 어디지?’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지그시 미소 짓는 관무백이었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꿈틀거리는 찰나, 어디선가 ‘형.’ ‘오라버니.’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반가운 마음에 세 녀석이 유심을 덮친 것이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눈웃음은 양손으로 유심의 허리를 있는 힘껏 와락 끌어안았다.
‘이것들이 왜 여기에?’
소리를 통해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심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본 것은 관무백의 얼굴, 더구나 자신은 관무백과의 눈싸움 중의 의식을 잃었기에 이곳은 그의 집, 무신장이거나 의원일 것이 분명했다.
‘근데 이건 뭐지?’
가슴으로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눈웃음이 자신을 보며 요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기다 속옷 바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외마디를 토하며 눈웃음의 몸뚱이를 황급히 밀어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유심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관무백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쓰러진 자신을 보살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그래 몸은 괜찮은가?”
“예, 덕분에.”
관무백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소문과는 달리 유심이 나름대로 예의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유심의 예의는 거기까지. 관무백을 잠시 바라보던 유심이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닷 냥은…….”
“외상값은 갚아라. 이 말인가?”
“예, 은혜는 은혜고 은자는 은자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런가? 그렇지만 은혜는 반드시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알고 있네!”
“물론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금수와 같지요. 그렇지만 은혜를 갚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 또한 도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
말문이 막혔다.
유심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이기는 하지만 작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색을 내는 것 또한 군자의 도리는 아니었다.
‘말발도 밀리지 않는 놈이로군.’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의 난관을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적들을 상대했지만 오늘에야말로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심의 모습에 정작 화가 끓어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호걸주가 주방장 겸 주인, 왕평상이었다.
왕평상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바로 관무백이다.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서?
물론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장군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왕평상이 관무백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것은 관무백이 현직에서 물러나 이곳 성도 외곽 남촌으로 들어온 이후였다.
남촌은 본래 마을이 아니었다. 관무백의 식읍(食邑)이다.
선대황제는 관무백의 공을 생각해 무신장이라는 친필 현판과 함께 성도 동남쪽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 농지를 관무백의 식읍으로 하사했다.
관무백은 그 농지를 전장에서 부상당한 부하, 그리고 목숨을 잃은 부하의 처자식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공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운 그들 덕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은 순식간에 중원에 퍼졌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그의 옛 수하들이 수백 명이나 몰려들었다.
관무백은 자신의 식읍을 똑같이 나누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이 바로 남촌이다. 그리고 유심이 이곳에 들어설 때 처음 보았던 거대 현판은 식읍과 함께 받은 선대 황제의 친필 현판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관무백을 존경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왕평상 역시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그가 옛 동료 장군들과 함께 호걸주가를 찾았을 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허름한 주가에 중원의 전장 영웅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주문하지도 않은 요리를 내놓고 술도 그들이 주문한 싸구려 백주(白酒) 대신에 최고급 죽엽청주(竹葉靑酒)를 내놓았다.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관무백은 절대 그냥 마실 수 없다며 주가를 나서며 숨겨두었던 외상 장부를―문제는 정상적인 외상 장부가 아니라 불한당잡배명부라는 것이지만 어쨌든―집어 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과 외상 금액을 적었다.
찢어 불태워야 했다. 그러나 불한당잡배명부에 적힌 이름과 금액은 관무백의 친필이었다. 잘 표구해서 집안에 걸어둘까도 생각했지만 그 내용이 외상 장부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대로 남겨둔 것인데 유심이 왔을 때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넘겨 버린 것이다.
자신의 실수로 가장 존경하는 분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에 왕평상은 화가 치밀었다.
“이런 망할 새끼!”
보다 못한 그가 유심의 등 뒤로 다가가 꿀밤을 날렸다.
빠악!
갑작스러운 기습에 속절없이 당한 유심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떤 새…… 아저씨!”
왕평상이 노려보고 있었다.
“왜 때려요?”
기습한 사람이 왕평상이라는 사실에 유심은 놀란 토끼눈이 됐다.
“내 놔!”
왕평상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심은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것이 답답했는지 왕평상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 장부 내놓으라고 이 자식아아――!”
“왜요?”
“찢어 버리려고 그런다.”
“누구 맘대로요? 잊으셨어요? 제가 한 냥 드렸잖아요.”
“망할 놈 돌려주면 되잖아.”
왕평상이 호주머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유심에게 내밀었다.
“됐지?”
“되긴 뭐가 되요. 아저씨 도둑놈이에요?”
“뭐? 도둑노∼옴?”
“예, 도둑놈이 아니면 오백 냥도 넘는 물건을 어떻게 한 냥에 팔라는 거예요?”
왕평상은 어이가 없었다. 오늘 오전 오백 냥도 넘는 물건을 은자 한 냥에 팔라고 했던 놈은 바로 유심 아닌가?
“그럼 너도 도둑놈이냐?”
“물론 아니죠. 저는 한 푼도 안 되는 쓰레기를 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맘씨 좋은 사람이죠.”
“새끼야, 똑같은 물건인데 왜 그렇게 달라?”
“주인이 다르니까요.”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왕평상을 향해 유심은 말을 이었다.
“본래 물건이란 그 임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법이에요. 살수가 칼을 들면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흉기지만 대장군이 그 칼을 잡으면 나라를 구할 영검이 되는 것처럼요.”
“장부가 칼이냐?”
“마찬가지지요. 아저씨한테 그 장부는 쓰레기지요. 아니, 아저씨의 홧병을 돋우는 망할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주인이 저라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전 그 돈을 모두 받아낼 자신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예요. 이 장부를 되돌려 받고 싶으면 은자 오백 냥을 내라는 거지요. 물론 아저씨가 사시겠다면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백 냥 정도는 깎아드릴 수도 있어요.”
“…….”
조금 전 관무백이 그랬던 것처럼 왕평상 역시 말문이 막혔다. 멍한 표정을 짓던 그가 급히 품으로 손을 넣었다. 은자 닷 냥이 있으면 당장 관무백에게 건넬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워낙 급하게 나오느라 그가 가진 돈은 조금 전 호주머니에서 꺼낸 은자 한 냥이 전부였다.
‘어떡하지?’
고민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왕평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은 인정에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자신이라면 그 방법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좋다. 그렇지만 관 대장군님의 기록은 찢어다오.”
“솔직히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절.대.로. 그럴 수가 없네요.”
“왜?”
“아저씨, 제가 지금까지 그나마 수월하게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저를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악바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르신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돌면 그 인식은 한번에 무너지죠. 그러면 앞으로 영업하기 힘들죠.”
“에라. 새끼야!”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고 왕평상은 등을 돌렸다.
왕평상을 간단히 해치운(?) 유심이 다시 관무백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르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은자가 없으면 몸으로…….”
“할아버지, 도와주세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드르륵하며 방문이 열렸다. 방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한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어라! 쟤는?”
유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방으로 들어선 여인은 유심도 잘 알고 있는, 아니, 일면식이 있는 소녀였다.
조금 전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동풍로를 걸을 때 흑천문 하급무사에게 희롱당하던 그 아이였다.
‘뭐야? 저 계집애가 대장군의…….’
눈동자를 굴려 관무백을 곁눈질로 살폈다.
관무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방금 안으로 들어선 소녀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아야, 방금 뭐라 하였느냐?”
관혜령(關慧玲).
방금 들어선 소녀의 이름이다. 천무신장 관무백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이자 유일한 혈육이다.
아들 관천호는 십육 년 전, 북벌원정대 좌장군(左將軍)으로 출전하였다가 전사했다. 며느리 역시 관혜령을 낳은 다음 해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여웠는지, 아니면 유일한 핏줄에 대한 노인의 정이었는지 관무백은 하나뿐인 손녀 관혜령을 끔찍하게 아꼈다.
관혜령은 조용히 관무백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조금 전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를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하셨죠?”
“오냐?”
“하오니 저 소협(小俠)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관무백의 말에 혜령이 환한 미소를 짓고는 조금 전 동풍로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 과장까지 섞어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 비록 대장군의 손녀라고는 하지만 이제껏 싸움 구경을 해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자신이 본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유심은 희롱당하는 혜령이 안타까워서 흑천문 무사와 싸움을 벌인 것이 아니다. 그저 녀석이 자신을 ‘애.송.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열 받아서 싸움을 벌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새 자신이 혜령을 구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유심이 그렇게 자기 합리화에 열중하는 와중에도 혜령의 수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할아버지, 그러니 저 소협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라는 말로 혜령의 설명은 끝났다.
관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령의 말을 들으니 나름 의협심도 있는 듯 보였다. 훌륭한 근골에, 근성, 거기에 의협심까지 갖춘 인물을 이런 곳에서 썩게 하기는 아깝다고 생각했다.
‘이놈은 내가 잡는다.’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