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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8화)
2. 돈을 내시면 무공을 배워드리지요(5)
“크흑!”
약초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던 유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불에 덴 듯한 화끈한 열기가 어깨에서 전해졌다.
시뻘건 핏물이 웃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벌써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도 흐려져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있었다.
“이야―앗!”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피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자신을 살려달라는 뜻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고함과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 적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뻗었다.
싸움을 밥 먹듯 하는 청룡맹 왈패들이 당할 리가 없었다.
가볍게 유심의 주먹을 피하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퍼버벅!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크흑!”
유심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죽어! 죽어! 이 벌레 새끼야!”
“네놈이 감히 대청룡맹을 개무시해!”
놈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더욱 빨라졌다.
피를 본 야수.
날뛰기 시작했다.
유심은 방어할 생각도 못한 채 그들의 주먹과 발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미친 듯 날뛰던 그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스르릉!
이미 칼을 뽑아 든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일제히 빼 들었다.
그들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죽일 생각은 아니다. 아니,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산 채로 잡아오라는 맹주의 명령이 있었다. 그러나 사지는 잘라도 좋다고 말했다.
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이야―앗!”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기합이 터져 나왔다.
슈칵!
검광(劍光)이 번쩍였다.
“……!”
왈패 네 명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투두두둑!
눈을 부른 뜬 모습 그대로 그들의 머리는 바닥을 뒹굴었다.
* * *
사방에 널린 시신들.
그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가슴에 검과 도를 겨누고 있었다. 검을 든 사내의 옷은 아래위 가리지 않고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도를 든 사내.
청룡맹주 고유발이다. 그리고 사방에 나뒹구는 시신들은 그의 수하들이었다. 부하들이 이렇게 참혹한 시신으로 변하는 데에 불과 일각이 걸렸을 뿐이다.
이제껏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특히 도를 든 자신을 해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고수.
자신의 가슴에 검을 겨눈 채 담담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사내는 절대고수가 분명했다.
“패웅각(覇雄閣)의 졸개였느냐?”
사내의 말에 고유발의 몸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가 들고 있는 도신 역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도를 든 자세만으로도 사문을 알아냈다.
자신이 상상했던 그 이상의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불안했다. 아니, 정상적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니, 가능성이라도 찾아야 했다.
“타앗!”
기합과 함께 먼저 도를 휘둘렀다.
고유발이 찾은 해법은 선공이었다.
스팟!
도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도영만화(刀影萬花).
그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도법, 패웅십삼도(覇雄十三刀)의 마지막 초식. 이제껏 도영만화를 펼쳐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을 사문에서 파문당하게 만든 하북팽가 무사와의 대결에서도 도영만화는 상대의 몸뚱이를 갈가리 찢어 버렸었다.
청룡장에 가득 찬 도영이 몸에 도달했는데도 사내는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귀신이라 해도 이제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겼다.’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순간!
그의 눈앞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기다란 혈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쩍 하고 갈라졌다.
쿠궁!
반으로 잘린 그의 몸뚱이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떨어졌다.
* * *
“……!”
정신을 차리자마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유심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뻘건 핏물이 가득한 옷. 유심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이 내려앉았다.
오 년 만에 만난 아버지.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약초를 구한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오 년 전보다 훨씬 추레한 모습이었다.
“아프냐?”
“아버지!”
유심이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부르며 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자신이 이러는지 유심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힘드냐?”
“…….”
유심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더욱 꽉 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걸이 그런 유심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유심아,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한다.”
유심을 안고 있는 연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 우리 모처럼 토끼구이 함께 먹을까요?”
토끼구이라는 말에 연걸의 몸이 들썩였다. 사실 그는 바로 숲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오 년 동안 자신을 꼼짝 못하게 했던 그것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토끼구이.’라는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오 년 전, 아들 유심과 마지막으로 함께 먹었던 것이 바로 토끼구이였다. 유심은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좋지.”
“제가 한 마리 잡아올게요.”
유심이 손을 풀고 일어나려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멀쩡했다.
분명 자신은 누군가의 기습을 받았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어깨에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여 어깨를 보았다.
벗겨진 웃옷, 베인 부위로 보이는 곳에 흰 천이 감겨져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다.
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어제 숲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들리더구나. 그래서 나가보았지. 그랬더니 네가 쓰러져 있어서 방으로 옮겼다.”
“그래요. 혹시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은 못 보셨어요?”
“너만 쓰러져 있던데. 유심아 무슨 일이냐?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아아, 아니에요. 그냥 시비가 좀 있었어요. 그나저나 아버지 솜씨는 역시 알아줘야 돼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문을 나서며 연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의술만은 인정했다. 어렸을 적 산골을 천방지축 돌아다니느라 수없이 많은 부상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상처 없이 자신을 되돌려 놓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부상을 당한 것은 어제 밤. 불과 반나절 만에 칼에 벤 자신을 거의 완벽하게 치료해 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버지의 의술만은 천하제일일 것이라고 유심은 생각했다.
기습한 자가 청룡맹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새끼들, 다 죽었어.’
이미 청룡맹이 초토화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는 복수를 다짐했다.
타닥타닥!
걸어 둔 토끼에서 기름이 빠져나가며 모닥불에서는 연신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유심이 토끼 다리 하나를 큼지막하게 잘라 연걸에게 내밀었다.
“아버지 드세요.”
“너부터 먹지 않고.”
“에이, 장유유서. 어서 드세요.”
“그래 잘 먹으마!”
연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유심이 건넨 토끼다리를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나머진 내 거!”
유심이 나머지를 통째로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녀석!”
유심을 보는 연걸의 입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유심의 어리광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정상적인 집에서 태어났다면 아직도 부모님 품에서 한참 어리광을 부릴 나이. 마음 한쪽이 무너졌다.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심은 토끼 한 마리를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열흘 동안에 다시 오십 냥을 벌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촉촉한 눈길로 사라지는 유심을 바라보던 연걸 역시 몸을 돌려 숲으로 향했다.
숲으로 향하는 연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유심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 * *
“엄마야―!”
집 앞 싸리문을 나서던 혜령이 귀신이라도 만난 듯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축 늘어져 죽은 토끼 한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유심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토끼를 잡고 있었다.
아버지와 먹으려고 토끼를 잡는 김에 한 마리 더 잡았다. 어제 부상당한 자신을 보살펴 주고, 또 청룡맹에서 은자를 받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그렇지만 그것을 본 혜령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죽은 토끼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거기다 껍질까지 벗겨져 속살만 드러나 있었다. 유심은 먹기 편하게 손질을 한 것이지만 혜령에게는 그 모습이 더욱 참혹하게 보여 무서웠다.
“영아야,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 그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이라니 누구?”
“소소, 소협이요.”
“소협?”
“어르신 접니다!”
혜령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유심이 안쪽으로 향해 큰소리로 대답했다.
“허허허, 자넨가?”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관무백이 얼굴을 내밀었다.
유심이 관무백을 향해 토끼를 번쩍 추켜들었다.
“그건 토끼 아닌가?”
“예, 아침에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 들고 왔습니다.”
“그래 고맙네. 마침 자네에게 할 말도 있었는데 잘됐군. 부엌에 놔두고 잠시 들어오게나.”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바빠서…….”
“어허, 내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잠시 망설이던 유심이 토끼를 부엌에 두고 방으로 들어가 관무백 앞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렀지만 관무백은 그저 유심을 살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솔직히 유심은 마음이 급했다. 무슨 일인지 요즘 들어 은자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록 품속에 불한당잡배명부가 들어 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열흘 안에 은자 오십 냥을 마련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르신 무슨 일이신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사천전충이었지만 천무신장 관무백은 그에게 있어서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네 무공 한 번 배워보겠나?”
“무공이요?”
유심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유심에게 이보다 솔깃한 제안은 없었다.
‘무공을 익힌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특히 어제 일을 겪고 난 후, 그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더구나 스승 될 사람이 천무신장 관무백이다.
관무백의 제자.
그것 하나만으로 사천성은 물론이고 중원 어디에서도 무시당할 일은 없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있다면 관직에 언제든지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심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관무백의 제자가 되어 그의 무공을 익히게 되면 은자를 벌 시간이 없다.
오늘 아침 보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싫습니다.”
관무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말하기만 하면 유심이 곧바로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릴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놈 보게.’
‘사내놈이 이 정도는 돼야지.’
서로 다른 두 마음이 관무백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마음의 결과는 한 곳으로 향했다. 놈을 꼭 붙잡아 자신의 발아래 꿇리겠다는 오기였다.
신양악바리로 살았던 관무백 특유의 승부욕이 살아난 것이다.
“그래도 무공을 가르치겠다면?”
“돈을 내십시오.”
“지금 뭐라고 그랬나?”
“어르신, 제가 누굽니까? 장유심입니다. 돈 되는 일이 아니면 절대 안 한다는 사천성 돈.벌.레.가 바로 접니다. 돈을 내십시오. 그러면 무공을 배워드리지요. 한 시진에 한 냥!”
“뭐?”
“그럼 이만!”
멍한 표정을 짓는 관무백을 보며 유심이 볼일 다 봤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