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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9화)
3. 마존(魔尊)의 제자? 개가 웃을 일이로군(1)
“서라!”
밖으로 나가려던 유심이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돌렸다. 관무백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바빠서.”
유심이 슬쩍 고개를 숙이고 막 밖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돈을 내지.”
“예?”
유심이 놀란 표정으로 관무백을 보았다.
관무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유심에게 다가와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막아보았지만 그의 손은 벌써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 그건?”
유심이 관무백의 손을 가리켰다. 그의 손에는 자신의 품에 있어야 할 호걸주가의 불한당잡배명부가 들려 있었다.
“내게 은자가 없으니 은자를 줄 수는 없네. 대신에 여기에 적힌 외상값을 모두 받아주지.”
“예? 그걸 다요?”
“아, 물론 한 번에 받아주겠다는 것은 아닐세. 그랬다가 자네가 은자만 받아들고 사라지면 나만 손해거든. 어떤가? 이 정도면 되겠나?”
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심은 기다렸다는 듯 관무백을 향해 무릎 꿇고 큰절부터 올렸다.
한 번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여덟…….
스승과 연을 맺는 구배지례를 올리는 중이다.
‘허허, 내가 이렇게 서서 구배지례를 받을 줄이야.’
관무백이 그런 유심을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천하의 관무백이 제자를 이런 식으로 맞아들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심의 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심이 막 여덟 번의 절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대장군!”
고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마장군 운지학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관무백의 얼굴이 일순 얼어붙었다.
운지학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다. 특히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극진할 정도다. 그런 운지학이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장군, 어젯밤 청룡맹 사람들이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예에?”
관무백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심이다.
피잉!
절을 올리던 유심이 구부러진 대나무 일어나듯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열린 문밖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사부님, 남은 절 한 번은 일 마치고 난 다음에 올리겠습니다아아아―!”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을 때, 유심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 * *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 년 전에도 작은 나무에는 푸른 열매 하나가 지금처럼 달려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열매라는 것은 본시 일 년에 한 번 열리고 때가 지나면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런데 작은 나무에 달린 푸른 열매는 오 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그렇게 나무에 달려 있었다.
망부석인 것처럼 풀숲에 앉아 묵묵히 바라보는 연걸의 모습도 그대로다.
아니, 변한 것은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
오늘따라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지옥도.
갈라진 배를 움켜쥐고 단말마를 토하는 사람들. 눈을 부릅뜬 채 땅바닥을 뒹구는 머리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괴로웠다.
청룡맹 왈패들이 유심을 따라 이곳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어제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설령 유심이 더 큰 부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혼자 왔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었다. 놈들이 이곳을 찾은 것. 그것이 죽어야 할 이유였다.
쓴웃음이 번졌다.
사람이 사람 사는 곳에 찾아온 것이 죽을 이유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쿨럭하는 소리와 함께 급히 입을 막았다가 천천히 손을 뗐다. 매실만 한 핏덩이가 손에 들려 있었다.
핏덩이.
그의 머릿속에 지옥도가 다시 펼쳐졌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가부좌를 틀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지만 그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정면에 있는 그것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요물 너 때문이다.”
그랬다.
아들 유심이 오 년이 넘도록 고생하는 것, 그리고 청룡맹 왈패들의 떼죽음, 그 모든 것이 자애신선목(紫靄神仙木)이라는 작은 나무에 달려 있는, 주먹보다 작은 열매, 천년자애실(千年紫靄實) 때문이었다.
천년자애실.
중원에서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이름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천년자애실이라는 이름 대신에 천하제일극음지과(天下第一極陰之果)라고 부른다.
천년자애실은 복용 즉시 온몸이 얼어붙어 죽는 독과지만 그 극음지기를 온전히 다스리기만 한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단박에 일백 년 공력을 얻고,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흔적조차 낼 수 없는 강철 같은 몸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천년자애실의 극음지기를 다스리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가진 빙공의 절대고수가 복용과 동시에 일백 일간 쉬지 않고 운기조식을 취해야만 간신히 천년자애실의 극음진기를 다스릴 수 있다. 그것도 완전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확률은 반반.
일천 년 무림 역사상 그런 기연을 얻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삼 갑자 이상의 내공을 가진 절대고수는 중원무림에 항상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빙공을 익힌 자는 없었다. 천하를 통틀어 그런 절대고수는 북해빙궁의 궁주뿐이다.
단 한 사람.
그는 바로 새외사패(塞外四覇)의 하나인 북해빙궁(北海氷宮)을 세운 북해존자(北海尊子)였다. 아니, 그는 천년자애실을 복용한 후 북해제일의 고수가 되어 북해빙궁을 세웠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천년자애실의 극음지기에 맞설 수 있는 극양지물을 함께 복용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더 큰 기연을 만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의가(醫家)에 떠도는 소문에 불과했다.
독과에 불과한 열매 하나. 그렇지만 그것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릴 때마다 중원에는 예외 없이 피바람이 불었다.
그것을 쫓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보유한 빙공의 절대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언젠가 또 다른 기연을 만나 천년자애실에 뒤지지 않는 극양지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심이란 그렇게 허황된 것이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오호―!”
감탄과 함께 장연걸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 년이 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던 그것이 변하고 있었다.
푸른 열매가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신선목 주변으로 자줏빛 아지랑이[紫靄]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는 곧 신선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자애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장연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수심과 번뇌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하며 섬광이 일더니 신선목을 가리고 있던 자줏빛 아지랑이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와 함께 천년자애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갛게 변한 열매.
변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푸른빛을 자랑하며 생생한 자태를 뽐내던 신선목 역시 투명한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툭 하고 천년자애실을 따내자 신선목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푸하하하하!”
웃음과 함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피를 토하며 끊임없이 웃는 모습이 광인처럼 보였지만 장연걸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 년의 기다림.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 * *
학살이 벌어진 청룡맹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정문 앞에는 십여 명의 포졸들이 굳은 표정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고 주변으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중 몇몇은 안으로 들어가겠다면서 포졸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청룡맹 왈패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심도 그 안에 있었지만 그 역시 실랑이만 벌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사부님이랑 같이 오는 건데.’
후회가 됐지만 이제 사부 관무백이 나타나기만 기다릴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안에 있던 포졸들은 거적을 덮은 들것들을 계속해서 밖으로 빼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잔뜩 찡그린 모습이다. 몇몇 포졸들은 ‘우웩’ 소리를 내며 연신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다.
거적으로 덮여 있어 무엇이 실려 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유심은 그것들이 모두 시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룡맹에 도착해서 대충 세어본 숫자만 삼십이 넘었지만 포졸들은 계속해서 들것을 밖으로 나르고 있었다.
포졸들이 들것을 나르는 동료들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정문을 살짝 터주는 사이, 봉두난발의 여인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정문으로 달려들었다.
“멈추시오!”
잠시 옆으로 물러났던 포졸들이 여인을 가로막았다.
“비켜!”
여인이 고함을 지르며 포졸들을 노려보았다. 포졸을 노려보는 여인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핏발 선 눈에서 쏟아지는 살기에 포졸들이 몸을 흠칫거렸다.
“비키라고 이놈들아―!”
자신을 막아선 포졸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밀쳐 댔다.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여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포졸 몇 명이 곧 여인을 붙잡았다.
여인이 발버둥을 쳤지만 포졸들은 여인의 사지를 붙잡고 그녀를 멀리 데려갔다.
“쯔쯔쯔, 안됐어!”
“그러게 말이야. 청룡맹 놈들이야 인간쓰레기들이지만 그 가족이야 뭔 죄가 있어.”
“그렇지.”
여인을 막아섰던 포졸들이 안됐다는 듯 말을 주고받았다.
밖에서 소란이 벌어지는 그 시각.
안쪽에서도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무복을 입은 사람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곳 사천성의 명문대파인 사천당가(四川唐家)의 무인들이었다. 청룡맹 왈패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사천성 성주는 자신의 성에 위치한 사천당가에 급히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그것은 범인이 강호인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비록 왈패들이라고는 하지만 싸움이라면 한가락하는 자들을 하룻밤에 육십여 명이나 소리 소문 없이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은 강호인, 그것도 고수라고 불리는 자뿐이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포졸들과는 달리 그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청룡맹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신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어허.”
한 노인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여러 시신들을 살피는 다른 무인들과는 달리 그는 반 시진이 넘도록 시신 한 구만을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다. 그가 살피는 시신은 바로 청룡맹 맹주였던 고유발이었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반으로 갈린 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떨어진 고유발의 시신을 살피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상하군.”
거의 한 시진이 흘러서야 노인은 고유발의 시신에서 눈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다른 시신들의 검안이 끝났는지 다른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중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숙부님, 어떻습니까?”
“희야, 네 생각은 어떠냐?”
“놈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쾌검을 구사하는 고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사람의 솜씨입니다. 여러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시신의 잘린 단면이 너무 똑같습니다. 거기에 몇몇 시신들의 잘린 단면을 맞추어 자세히 살펴보니 한 번에 서너 명씩 베어 넘겼습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자들을 단칼에 날렸다면 쾌검(快劍)을 펼치는 고수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말은 노인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고수라…… 그래 만약 네가 그자와 겨룬다면 어떨 것 같으냐?”
“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희(唐熙)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가의 소가주이자 중원 신진고수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그였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조금 전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던 노인만이 보일 듯 말 듯 아주 조금씩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다. 만약 이자가 내가 생각한 그자가 맞는다면 너는 십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한다. 나 역시 승부를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숙부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저야 그렇다 쳐도 숙부님은 당대 무림에 위명이 자자한 칠웅 가운데 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노인은 대단한 실력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