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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12화)
3. 마존(魔尊)의 제자? 개가 웃을 일이로군(4)


주향(酒香)이 장문인실을 가득 채웠다.
술 냄새 때문인지 그의 더러운 몰골 때문인지 장로들이 일제히 얼굴을 찡그렸다. 오직 한 사람, 장문인 운석 진인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백! 오랜만에 뵙습니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끄윽! 나야 술과 벗하며 세월 잘 보냈지. 장문인도 얼굴이 통통하니 잘 먹고 잘살았던 모양일세그려.”
“예, 사백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염려? 그래 내가 자네 염려는 조금 했네. 자네가 나보다 먼저 우화등선해 버리면 어떤 작자가 본 도의 술을 대겠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사제들이 하나같이 좀팽이 아닌가. 클클클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장로들의 얼굴을 훑는 무허자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
무허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은 이곳에 모인 장로들의 사백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사부터 올려야 했다. 아무리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예법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할 뿐 고개조차 까닥거리지 않았다.
장문인 운석 진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네놈들 모두 인사하는 법도 까먹은 듯싶구나.”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장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무허 사백님을 뵙습니다.”
“쯔쯔쯔, 한심한 것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도 모르는 놈들이 무슨 도를 깨우치겠다고.”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무허자가 툴툴거리며 운석 진인의 좌측 빈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운석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밖에 시립했던 제자 두 명이 문을 닫았다.
“자, 이제 태상장로께서도 도착하셨으니 장로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장로들을 급히 부른 것은 중원에 큰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큰일이라니요?”
“마존의 제자가 나타났습니다.”
“예에?”
마존도 아닌 마존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말에도 장로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쾌섬마존은 그런 존재였다.
시비를 거는 자라면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죽이는 살인마.
그가 강호에서 활동한 것은 불과 오 년 남짓. 그러나 그의 검에 죽은 무림인들은 무려 삼백에 달했다. 삼백 명. 수없이 많은 무림인들을 생각한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지간한 문파끼리의 생사결이라면 단 한 번에 죽을 수도 있는 숫자다. 그러나 마존이 죽인 삼백 명은 의미가 달랐다. 그들 대부분이 일문을 대표할 수 있는 고수였다.
무려 일백이 넘는 무림문파들이 그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뒤를 쫓았다. 공동파 영재, 무허자가 강호로 나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일 갑자가 흘렀다 이제 무림은 마존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제자가 나타난 것이다.
“장문인, 확실히 마존의 제자입니까?”
“당가에서 알려온 소식이니 확실할 겁니다. 그 문제로 무림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으음!”
질문을 던졌던 대장로 운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보고라면 확실했다.
당가 역시 당가오봉(唐家五峰)이라 불리던 후기지수를 마존의 손에 잃었다. 본래 당가는 독과 암기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의술로도 알려진 곳이다. 의술을 모르고 독을 다룰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중원에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었다.
“지랄하네!”
침묵을 깨는 상스러운 소리와 함께 무허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허자에게 뭐라 말하는 장로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반병신이 된다는 것을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장로들 대부분이 그들의 사부가 사형인 무허자에게 복날 개 맞듯 얻어터지는 모습을 한두 번은 보았었다.
이럴 때는 눈을 질끈 감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사백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뭘 묻나? 마존의 제자라면 당연히 때려잡아야지!”
운석 진인의 물음에 무허자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뭐? 마존의 제자라고? 개가 웃을 일이군.’
무허자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나저나 가평, 이 친구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봐! 가평이―! 가평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술친구부터 찾았다.



4. 준비된 기연을 만나다(1)


퍼버벅!
운지학의 주먹이 유심의 배꼽부터 한 치씩 올라오며 틀어박혔다.
“크흑!”
신음과 동시에 유심의 몸이 흔들렸다. 그러나 엿새 전, 처음 당했을 때만큼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다.
운지학에게 얻어터지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유심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구잡이 주먹질처럼 보였지만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마지막 일격에는 일정한 규칙―그것이 임독양맥(任督兩脈)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어쨌든―이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한 가지 생각이 유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천전충 유심의 주 수입원은 남이 맞을 매를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다.
곤장을 맞을 때 엉덩이에 힘을 주면 덜 아픔 것처럼 타격이 가해질 지점에 미리 힘을 주면 훨씬 고통이 줄어든다는 것을 유심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유심은 운지학의 주먹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그곳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운지학이 내뻗는 주먹은 번개였다.
힘을 주려고 마음먹는 그 순간, 그의 주먹은 벌써 그의 몸을 강타했다. 그래도 방법은 그것뿐이었기에 유심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사흘이 흘렀다.
오늘 아침.
유심의 몸에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운지학의 주먹이 떨어질 곳에 저절로 힘이 몰렸다. 그렇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운지학의 주먹이 떨어진 이후에야 그곳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반나절이 흐른 지금, 그의 몸은 완전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운지학의 주먹이 떨어질 곳이 어딘가를 생각하기만 하면 유심의 몸은 스스로 그곳에 힘을 주고 있었다.
유심이 흔들리는 중심을 재빨리 바로잡고 주변을 살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땅바닥에 큰대자로 뻗어 있는―사실은 일어나 봐야 매만 더 맞을 뿐이라는 생각에 뻗은 척하고 있을 뿐이지만 어쨌든―꺽다리와 뚱땡이가 보였다.
‘이번엔 네 녀석들 빚까지 한 번에 받아주마.’
유심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운지학을 마주했다.
유심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운지학이 처음으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운지학 역시 오늘 아침부터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유심이 어떻게 변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지 못했다.
‘설마 벌써 운기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아는 한 수련에 임한 지 엿새 만에 운기를 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유심은 정식으로 심법을 익힌 적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운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있을 리 없었다.
불가능한 일. 그러나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어쩌면?’이라는 의심도 점점 커졌다.
“좋아. 그렇다면 확인을.”
유심과 마찬가지로 운지학 역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순간.
유심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운지학이 놀란 듯 몸을 흠칫거렸다. 유심이 이렇게 먼저 달려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공격을 펼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확실히 뭔가 달라진 것이 분명했다.
공력―물론 그것은 권기(拳氣)가 아닌 보기였지만―을 슬쩍 더 끌어올렸다.
그 사이, 유심은 벌써 삼 장 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타―앗!”
기합과 동시에 유심의 주먹이 운지학의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동안 맞았던 것을 한꺼번에 갚겠다는 일념이 담긴 그의 주먹은 제법 날카로웠다.
운지학은 침착하게 기회를 기다렸다. 유심의 주먹이 막 닿으려는 찰나, 운지학이 슬쩍 양발을 움직이며 어깨를 틀었다.
슈슉!
유심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운지학의 몸을 스치듯 지나갔다. 두 사람은 이미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서로 가까이 붙었다. 유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처럼 펼친 공격이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제길!”
절로 욕이 나왔다.
운지학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금이 바로 그가 기다린 순간이었다.
운지학의 주먹이 파공음을 내며 연이어 날아갔다.
비록 외팔이었지만 운지학의 번개 같은 움직임은 부족한 한 팔을 채우고도 남았다.
주먹이 향한 곳은 복부 주위의 전신세혈. 그중에서도 힘을 가장 강하게 넣은 곳은 임맥 이십혈 가운데 십이, 십삼, 십사혈인 중완(中脘), 상완(上脘) 그리고 거궐혈(巨闕穴)이다.
퍼버벅!
주먹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오류가 있었다. 당연히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심은 이를 악물며 버티고는 운지학을 향해 반격을 가했다.
퍽!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유심의 주먹은 그의 복부 한복판에 틀어박혀 있었다.
“으음!”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놀란 듯 커진 눈으로 가슴을 보았다. 비록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제법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유심의 주먹은 매서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심은 운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공격을 정확히 받아내며 이렇게 반격을 펼칠 수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왜 대장군 관무백이 은자까지 쥐어주면서 유심을 제자로 삼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이미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심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운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에 천부적인 기재였다.
‘역시 주군이시구나!’
유심과 대련을 한 이후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참으려고 했지만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보게, 지금 뭐하는 건가? 얼른 정신을 차리게.”
관무백의 전음이 들렸다.
운지학이 급히 미소를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홉!”
장소를 토하며 있는 힘껏 몸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 유심을 향해 양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쌔애애액―!
주먹을 내뻗을 때와는 바람 가르는 소리부터 달랐다. 더구나 그의 양발은 모두 멀쩡했다. 한 팔을 사용해 공격할 때보다 속도 역시 배는 빨랐다. 유심이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양발이 구미, 중정, 단중혈을 십여 회 이상 강타했다.
“케헥!”
유심이 비명을 토하며 일 장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유심은 이를 악물었다.
“제가 이래 봬도 사천전충이거든요. 이 정도에 쓰러지면 벌어먹고 살기 힘들죠. 크크크크.”
‘저 녀석이.’
유심의 모습에 놀라고 당황한 것은 운지학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유심과의 대결 아닌 대결.
겉모습은 멀쩡했지만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발을 사용했다. 이미 주먹에 단련된 유심이었기에 수련을 이어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운지학에게도 제법 큰 부담이었다. 하여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고자 조금 전 발길질에 일성 정도의 공력을 얹었다.
그 정도라면 어지간한 무사 정도는 혼절시키고도 남을 만한 위력이었다. 아무리 내공을 갖추고 운기를 할 수 있게 된 유심이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일어서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곧바로 일어나 웃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거 누가 수련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군.’
유심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타앗!”
기합과 동시에 공력을 이성 가까이 끌어올려 옥당, 자궁, 화개혈을 때렸다.
“후우―”
한숨을 토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남은 한 팔로 슬쩍 훔쳤다.
“뚱땡이, 어떻게 좀 해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죽은 듯 누워 있던 꺽다리가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뚱땡이를 향해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라고 형님이 얻어터지는 게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방법이 없잖아.”
뚱땡이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꺽다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뭐가?”
“생각해 봐. 형님이야 워낙 특출난 분이니까 대장군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쳐도 장군이라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같은 놈들을 제자로 받아들였겠어? 이게 다 합법적으로 우리를 개 패듯 패려고 한 늙은이 꿍꿍이였다니까.”
“글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말대로라면 맞아야 하는 건 우리야. 그런데 지금 맞는 건 우리가 아니라 형님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뚱땡이의 말을 들어보니 그 말이 맞았다. 그렇지만 꺽다리는 그의 말이 맞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 꺽다리의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 뚱땡이의 재촉이 이어졌다.
“어때 내 말이 틀려?”
“그그, 그건 다음에 생각하고…… 형님은 어떻게 할 거냐니까?”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잖아.”
“이 망할 자식아. 그거 생각하다가 형님 돌아가시겠다. 그나저나 형님도 참 미련하지. 우리처럼 그냥 뻗은 것처럼 누워 있으면 될 것을 왜 자꾸 일어나는…… 어어!”
꺽다리가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를 흘렸다. 멀리서 누군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치마를 입었으니 당연히 여인.
며칠 동안 자신만 빼돌리고 사라지는 꺽다리와 뚱땡이의 행방을 찾다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눈웃음이었다.
“오오, 오라버니!”
쓰러진 유심을 보고 눈웃음이 황급히 달려가 그의 윗몸을 안아 들었다.
유심이 시끄럽다는 듯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눈을 떴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눈웃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운지학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웃음기 대신 독기가 자리했다. 먹이를 눈앞에 둔 독사의 눈빛.
‘이건 또 무슨 물건인고.’
운지학이 잠시 눈웃음의 정체를 생각하는 사이.
“뒈져! 이 늙다리 새끼야―!”
표독스러운 일갈과 함께 품에서 비수 두 자루를 빼 들었다.
“이, 이봐! 눈웃음!”
유심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이미 비수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