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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13화)
4. 준비된 기연을 만나다(2)


피이―잉!
비수가 향한 곳은 운지학의 미간 한복판.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달려드는 적장의 목을 수없이 베었던 마장군, 운지학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익숙한―다른 점이 있다면 달려드는 사람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는 여인네라는 것뿐―장면이었다.
슬쩍 얼굴을 틀어 비수를 피함과 동시에 비응나연을 펼쳐 가까이 다가온 눈웃음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에는 서슬 퍼런 단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여인네가 손에 쥐어야 할 것은 바늘이나 식칼이지 단도가 아니다.”
운지학이 슬쩍 내공을 끌어올렸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비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휘잉!
눈웃음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몸뚱이가 향한 곳은 죽은은 척 누워 있는 꺽다리와 뚱땡이 위였다.
운지학은 처음부터 그들이 가짜로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어어어!”
놀란 두 사람이 미처 소리치기도 전에 쿵 소리를 내며 눈웃음이 두 사람 위로 떨어졌다.
“왜, 하필……?”
“니들이 감히 날 빼돌려. 이 더러운 새끼들아―!”
자신을 빼돌린 것이 억울했는지 아니면 운지학에게 당한 것이 분했는지 눈웃음이 밑에 깔린 두 사람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눈웃음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정말로 뻗었기 때문이다.
“고얀 놈들, 자고로 자신이 모시는 분이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워야 하거늘 제 목숨 구하고자 꾀를 부려. 그것도 하늘 같은 사부 앞에서. 이놈, 지금 네놈들 위에 떨어진 것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것이다. 알겠느냐?”
“영감탱이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허허, 그나저나 이 물건은 어이할고.”
운지학이 앙칼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눈웃음을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이 조심조심 운지학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아닐세. 설마 저 아이도 덤은 아니겠지?”
운지학이 손을 들어 눈웃음을 가리켰다.
유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됐네. 내 여인에게 무공 가르치는 방법은 몰라서 잠시 고민했지 뭔가. 파하하하!”
운지학이 모처럼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밤.
세 사람에 대한 매타작을 마치고 운지학과 관무백은 무신장 하나뿐인 방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운지학의 얼굴을 타고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전쟁터를 누벼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가 이렇게 힘들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유심을 비롯한 세 사람과의 대결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을 모를 관무백이 아니었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깟 주먹질, 발길질 몇 번에 이렇게 못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운지학은 오히려 송구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어허, 이 사람! 그게 나였다면 난 이미 자리 펴고 누워 있을 걸세.”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대장군께선 어떻게 유심을 한눈에 알아보셨습니까?”
“나도 몰랐네.”
“모르셨다니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는 관무백이 유심의 무재(武才)를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유심의 맥을 살필 때 누군가 그 아이에게 안배를 해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렇지만 녀석이 가르침 없이 운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에 특별한 소질이 있다는 것은 나도 조금 전에 알았네.”
“누군가의 안배가 있었다 하셨습니까?”
“그래. 누군가 그 아이의 몸에 손을 써둔 것이 틀림없네.”
“그게 누굽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네. 그렇지만 짐작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순간, 운지학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
그는 바로 유심의 아버지 장연걸이었다. 유심을 만나기 전 이미 사천전충에 대한 소문은 그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소문에는 사천전충이 그의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은자를 벌려고 한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혹, 유심의 아버지를…….”
“허허허, 그건 짐작일 뿐일세. 그렇지만 확실한 건 전설로 전해지는 천무지체(天武之體)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일세.”
“예에?”
운지학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오! 영아로구나. 들어오너라!”
“예.”
관혜령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작은 찻상 하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찻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보게, 식겠네.”
여전히 넋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운지학의 귀로 관무백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찻상과 찻잔이 있었다.
“영아가 다녀갔습니까?”
“그래. 식기 전에 들게.”
“예!”
찻잔을 들고 조금씩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차인지 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관무백이 그에게 했던 말은 그만큼 충격이 컸다. 그와 함께 유심의 아버지 장연걸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 * *

후욱후욱!
대장군 관무백과 마장군 운지학이 무신장 방 안에서 담소를 나누던 그 시각, 장연걸은 이마에 땀까지 흘리며 열심히 풍로(風爐)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바람을 받은 숯불이 이내 빨간 불꽃을 일으키며 살아났다.
불씨가 살아나자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커졌다. 잔가지를 계속 넣어 불꽃을 키웠다.
잠시 불꽃을 지켜보던 연걸이 옆에 있는 작은 약탕기를 들어 풍로 위에 올렸다. 옹기가 아니라 놋쇠로 만든 약탕기다. 그 뒤에도 계속 나무를 넣고 바람을 일으켜 불을 키웠다.
약탕기 안에 약재와 물을 넣고 숯을 이용해 은은히 달이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연걸은 불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키웠고 풍로 위 탕기 안에는 물은커녕 약재 한 줌 넣지 않았다. 반 시진가량이 흐르자 빈 약탕기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연걸은 품에서 천년자애실을 꺼내 벌겋게 달아오른 약탕기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탕기 주변으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벌겋게 달아올랐던 약탕기가 흰서리까지 내려앉은 모습으로 꽁꽁 얼어붙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풍로에는 지금도 불꽃을 일으키며 나뭇가지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연걸의 모습은 태연했다.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는 모양새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연걸이 뒤로 조금 물러났다. 작은 자루 하나와 다섯 자 정도 되는 대롱이 보였다. 자루를 풀었다. 자루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 모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들고 조심스럽게 대롱의 끝으로 밀어 넣었다. 대롱을 물고 반대쪽을 풍로 구멍에 댔다.
“후―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김을 불었다. 그와 함께 반대쪽 대롱으로 붉은 모래가 풍로로 날아들어 갔다.
순간!
화르르륵!
잦아들던 불길이 순식간에 거세지며 풍로를 튀어나와 약탕기 전체를 뒤덮었다. 자루에 담긴 붉은 모래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열화사(熱火沙).
현 중원무림에서 폭탄(爆彈) 제조로 가장 유명한 문파는 벽력당(霹靂堂)이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 만해도 벽력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문파, 열화문(熱火門)이 있었다.
열화문에서 만든 열화탄은 벽력당에서 만든 벽력탄과 함께 중원에서 가장 위력이 강한 화탄이었다. 밤톨만 한 열화탄 하나면 작은 건물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날려 버릴 정도로 그 위력이 엄청났다.
열화탄의 주원료가 되는 것이 바로 열화사다.
열화사는 남만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붉은 모래, 적사(赤沙)를 정제해 만드는데 그 비법은 오직 열화문에서만 알고 있는 비기 중에 비기였다.
열화사까지 넣어 불길을 키었지만 꽁꽁 얼었던 약탕기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 천년자애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진품이로군!”
장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화사까지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천년자애실을 보면 실망하는 것이 당연해 보임에도 그는 오히려 미소까지 직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연걸이 상의를 벗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치가 조금 넘는 상처. 위치는 정확히 단전(丹田). 흔적으로 보아 꽤나 깊이 찔린 자상이었다.
“아버지!”
외마디와 함께 연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친듯이 달렸다.
“크아―악!”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인예의가(仁禮醫家) 가주 장문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는 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 연걸이 안겨 있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화롭기 그지없던 인예의가였다. 그곳이 하룻밤 사이에 피바다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야습. 의가에 들이닥친 놈들은 가솔들을 인정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오직 의술만 익힌 가솔들은 검은 무복을 입은 살인마들에게 대항 한 번 못하고 죽어갔다. 아니, 지금도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턱!
문혁이 걸음을 멈췄다. 우거진 숲 사이로 자그마한 굴이 보였다. 겉으로 보면 사람 한 명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굴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제법 넓은 동굴이다. 그가 약초를 캐다가 비를 만나면 이따금 들러 비를 피했던 동굴이다.
안고 있던 아들을 먼저 밀어 넣고 자신 역시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화섭자를 들어 등잔에 불을 밝혔다.
비록 희미하기 그지없는 불빛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문혁이 급히 연걸에게 다갔다.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아들. 다행히 연걸은 살아 있었다. 숨만 붙어 있다면 살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먼저 맥을 살핀 후 치료를 시작했다.
“휴우―!”
반 시진 정도가 흐른 뒤 문혁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아들의 목숨은 염려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그의 뒤를 쫓는 자들이 있었다. 먼저 그들을 따돌려야 했다.
“아……버……지…….”
아들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문혁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연걸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아들에게 해줄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연걸아, 오늘 일은 모두 잊어라.”
“아버지, 그, 그렇지만…….”
“이놈, 인예의가는 오직 인술을 펼치는 곳이다. 절대 그것을 잊지 마라. 알겠느냐?”
연걸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문혁은 동굴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