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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16화)
4. 준비된 기연을 만나다(5)


“아흐, 잘 잤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던 유심이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휘둥그레 눈을 뜨고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어젯밤 악몽이 생각났다. 오장육부가 흔들리고 장이 꼬이고 뼈 마디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사천전충 유심도 이제껏 한 번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듯 움직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심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던 아버지 연걸을 찾았다. 방 구석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연걸이 보였다.
“아버지이―!”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잘 들린다, 이 녀석아. 목소리를 들어보니 몸은 괜찮은 듯하구나. 그나저나 오 년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으니 이거야 원.”
“지금 그게 문제예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죽을 뻔했는데.”
“물론 어젯밤에는 네 걱정을 했지. 아니, 조금 전까지도 네 녀석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멀쩡하지 않느냐? 그러니 다른 걱정을 할 수밖에.”
“내가 말을 말아야지.”
유심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연걸이 그런 유심의 모습을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유심이 잠든 사이 연걸은 그의 맥부터 살폈다.
선골청령단에서 얻은 공력 가운데 칠 할 이상이 단전에 모이지 못하고 전신세맥에 흩어져 버린 덕분에 유심이 얻은 공력은 일 갑자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당장 얻은 공력은 일 갑자에 불과하지만 꾸준하게 심법 수련을 하다보면 흩어진 공력 역시 단전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심법은 언제 익혔느냐?”
‘심법?’
심법이라면 도인이나 무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하는 것이다. 자신 역시 심법은 아니지만 아버지에게서 그와 비슷한 의가에 전하는 토납법(吐納法)을 익힌 적은 있었다.
순간, 어제 밤 일이 생각났다.
‘그게 심법일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기로 심법은 구결이 있고 그 구결에 따라 기를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화입마에 빠져 자칫 폐인이 된다고 아버지께 들었었다.
그런 심법을 익힌 적은 없다.
자신은 단지 운지학과의 대결을 통해 몸으로 체득한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기를 움직였으니 운기를 한 것은 맞지만 무인이나 도인이 말하는 심법은 아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놈, 언제 익혔느냐 묻지 않느냐?”
기다리다 지쳤는지 연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유심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자신 역시 대답을 하고 싶지만 자신도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어 대답을 못할 뿐인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화를 내고 있으니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래도 이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아버지. 그런데 이것도 심법이에요?”



5. 혹시 노망나셨나요?(1)


지난 오 년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다 보니 반 시진이 넘게 흘렀다. 연걸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유심이 천무신장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잠깐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유심이 스스로 터득한 운기법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동공(動功).
유심이 익힌 것은 동공이다.
동공이란 본래 후천(後天) 경락, 즉, 육체를 단련하는 것으로 선천진기를 근본으로 수련하는 일반적인 정공(靜功)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그러나 극성으로 수련하면 결과는 같아진다.
동공을 극한으로 익히게 되면 결국 그것이 선천진기의 수련으로 이어지고 무림인들 대부분이 수련하는 정공을 극성으로 익히다 보면 선천진기를 담고 있는 육체적 단련으로 이어진다. 놀라운 점이라면 유심의 동공 수련이 겨우 한 달 만에 거의 완벽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면 유심의 몸속 가득한 선골청령단의 기운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동공과 정공, 궁극에 이르면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무림인들이 일반적으로 익히는 심법은 정공이다. 덕분에 동공은 이제 무림에서 거의 사라지고 그야말로 진정한 도를 닦는 선인(仙人) 몇몇만이 익히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유가 있다.
정공은 동공에 비해 짧은 시간에 운기를 하고 그를 통해 훨씬 더 많은 축기(畜氣)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당연히 내공을 쌓는 데에는 정공이 동공보다 훨씬 빠르다. 그러나 정공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정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움직임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적과 대결을 펼치는 경우 내공을 소진만 할 뿐 이를 보충하지는 못한다. 하여 오랜 시간 전투를 벌이지 못한다. 자기보다 약한 하수라 하더라도 그 숫자가 워낙에 많다 보면 결국 내공 소진으로 인해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동공은 그런 단점을 충분히 보완해 준다.
적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소모되는 내공의 일부를 보충할 수 있어 최소한 자기보다 월등하게 약한 상대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이놈이 기연을 만났구나.’
동공 수련. 이미 무림에서 실전된 것이나 다름없는 동공을 익히게 된 것은 어쩌면 선골청령단의 기연에 비견될 정도의 행운이었다.
지난 오 년간 자신을 위해 돈벌레라는 소리까지 얻어가며 생활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지만 유심이 동공 수련이라는 기연을 만났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제 그에게 보낼 때가 되었어.’
연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연걸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그보다 강한 무인은 없었다. 천무신장 역시 중원사왕 가운데 한 명으로 절대고수인 것은 분명했지만 순수한 무공 실력으로만 보면 오귀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주귀 정도다. 그런 천무신장이 사왕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전공이 그만큼 위대하고, 그의 인품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래, 창왕이라면 스승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지. 그렇지만 너는 더 강해져야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심은 지난 오 년간의 일을 계속 말하고 있었다.
어느덧 유심의 설명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운 장군님한테 계속 얻어터지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 이것도 정말 심법이에요?”
“뭐뭐, 뭐라고 그랬니?”
“이것도 심법이냐고요?”
“그래, 그것도 심법이다.”
“아― 그렇구나.”
연걸의 대답을 듣자마자 유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늦었다. 더구나 오늘은 관무백으로부터 무공을 익히는 첫날. 서둘러야 했다.
“어디를 가려고?”
“남촌이요. 늦었어요.”
“남촌은 나중에 가거라.”
“예에? 왜요?”
“일단 자리에 좀 앉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한시라도 빨리 남촌에 가고 싶어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녀석, 꼭 똥마려운 강아지 같구나.”
“헤헤.”
겸연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심부름 좀 해야겠다. 아니, 사천전충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해야겠다.”
“의뢰요?”
유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의뢰를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연걸이 주머니에서 옥패가 매달린 붉은 수술을 꺼내 유심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자세히 살폈다. 어떻게 보면 여인네가 갖고 다니는 노리개처럼 보였는데 노리개라고 하기에는 좀 크고 모양도 예쁜 것 같지가 않았다.
“이게 뭐예요?”
“홍조수아(紅條穗兒)다.”
“홍조수아? 그게 뭔데요?”
“검두(劍頭)를 보면 매듭 장식이 있지 않느냐?”
“아아! 그 빨간 실 꼬아서 검파(劍把) 뒤쪽에 묶어서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거요? 그게 이거예요? 어어! 그런데 이거 잘렸네요?”
매듭에 달린 옥패를 살짝 들어 올렸다.
유심이 말한 것처럼 매듭에 달린 옥패의 끝부분은 잘려 있었다. 무엇으로 잘랐는지 모르지만 잘린 부분은 매끄러웠다. 언뜻 보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것을 가지고 공동산에 있는 공동파로 가거라. 그 옥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빚을 받아오면 된다.”
공동산이라는 말에 유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다녀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리는 곳이다.
다른 사람의 의뢰였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단박에 거절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제 악착같이 돈을 벌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오 년 동안 숲에만 있던 아버지의 의뢰였다. 말이 의뢰지 부탁이다. 아무리 무공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강해도 아버지의 첫 번째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면 사부 역시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의뢰비!”
“응?”
아버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유심은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의뢰를 하셨으면 당연히 의뢰비를 주셔야지요.”
“고얀 녀석, 아비한테도 의뢰비를 받겠다 이 말이냐?”
“당연하죠. 공은 공이고 사는 사거든요. 참고로 외상은 절.대.불.가. 은자가 없으시면 토끼구이 한 마리도 괜찮아요. 헤헤헤헤!”
유심이 맑은 웃음을 토하며 연걸을 보았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와 함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응석받이에 불과한 아들. 그의 어깨에 복수라는 힘든 짐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었다.
약해지는 마음을 잡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냐, 주마!”
한 손을 소매로 가져갔다.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지난번 선골청령단을 만들 때 생긴 단도가 들려 있었다.
“우와!”
유심이 환호성을 지르며 단도를 받아들었다.
오색영롱한 빛을 내는 단도.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청강장검 백여 자루 값은 족히 나갈 것 같은 보도다.
‘가만, 장검 한 자루가 은자 스무 냥이니까…… 헉!’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어림짐작으로 은자 이천 냥.
고래 등 같은 장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웬만한 장원 한 채는 마련할 수 있는 그야말로 거금이다. 오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의뢰를 받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의뢰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었다.
“받을 빚이 뭔가요?”
“그냥 주는 대로 받아오면 된다.”
“주는 대로요?”
“그래, 주는 대로. 그렇지만 주는 것은 반드시 모두 받아 와야 한다. 알겠느냐?”
“예! 사부님께 말씀드리고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 * *

관무백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제 막 무공을 가르치려는 순간에 유심이 떠나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관무백은 아쉬운 표정을 곧바로 지웠다. 영원히 떠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잠시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얼굴이…….’
관무백이 유심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부도 까칠까칠하고 삐쩍 말라 보였는데 오늘 보니 피부에 윤기도 돌고 얼굴에 살도 오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눈빛 역시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 자체가 확실히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유심아, 잠시 맥을 짚어 봐도 되겠느냐?”
“맥이요? 왜요?”
“먼 길을 떠나니 걱정이 돼서 그런다.”
“아아―”
유심이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실 건강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의술 하나는 중원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있다. 만약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그런 심부름을 시킬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팔을 앞으로 내민 것은 사부 관무백의 마음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관무백이 조심스럽게 유심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상했다. 유심은 분명 어딘가 변했다. 그러나 맥을 짚어보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혹시……’
슬쩍 내공을 흘려보냈다.
순간적으로 관무백의 몸이 움찔거렸다.
유심의 몸에서 막대한 진가가 흘러나오더니 자신의 진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처음 유심의 맥을 짚을 때도 그랬다. 덕분에 유심의 몸속에 비록 적은 량이지만 내공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강력하지는 않았다.
내공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여전히 유심의 진기에 막혀 자신의 내공은 유심의 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삼성을 넘겼다. 그렇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성이 넘는 공력을 끌어올리고 나서야 자신의 진력이 유심의 기맥을 타고 들어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유심의 몸속에 깃든 공력은 어림잡아 일 갑자가 넘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공력이 늘 수는 없었다.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살아 돌아와 대법을 취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약을 복용하면 가능하다. 자신 역시 황제가 하사한 영약 덕분에 지금과 같은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진다는 인형설삼(人形雪蔘)이나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공청석유(空淸石乳) 등을 복용하면 단박에 일 갑자 정도의 공력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십 년 내공에 불과한 유심은 그런 영약도 쉽게 복용할 수 없다. 잘못 복용했다가는 영약이 아니라 독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예상한 것이 맞는다면 유심은 그런 영약을 다룰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다. 공청석유나 인형설삼 등을 쉽게 다룰 수 있는 인물, 그야말로 신의라 불릴 만한 사람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
유심의 기혈을 일반인에 비해 서너 배나 확장시키고 그의 몸속에 십 년 내공을 심어둔 사람.
관무백이 천천히 내공을 거두고 유심의 손목에서 손가락을 뗐다.
“좋구나.”
“헤헤헤, 물론 그럴 겁니다. 어제처럼 가끔 이상한 약을 먹여서 사람을 고생시키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의술 하나는 끝내주시거든요.”
“아버지가 의원이시냐?”
“잘 모르겠습니다. 의술을 익히신 것은 분명한데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관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였다.
어제까지는 짐작이었지만 유심의 말을 들으니 확실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일지 더욱 궁금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유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랑 같이 가자.”
“예에? 사부님도 공동산에 가시려고요?”
“허허, 물론 그건 아니지. 어쩌면 공동파에 쉽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아무 말 말고 따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