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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17화)
5. 혹시 노망나셨나요?(2)
화우전(花雨殿).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가 본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열다섯 명.
쾌섬마존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사천당가의 연락을 받고 무림회의에 참석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직 한 사람, 앞머리가 훤한 반대머리 노인 한 명만이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열심히 딴짓을 하고 있었다.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열심히 코를 파기도 하고 턱밑에 자란 수염 몇 가닥을 비비 꼬기도 했다. 그것이 지루했는지 이제 뒤엉킨 뒷머리를 박박 긁어댔다.
처음 이곳 사천당가로 달려올 때만 해도 그들은 마존의 제자를 당장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추살령(追殺令)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무림 공적으로 선포하고 추살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대량 학살을 벌인 범인이나 피해자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청룡맹은 무림문파도 아니고 범인이 마존의 제자라는 것 또한 아직은 가능성 높은 추측일 뿐이다.
결론도 없는 지루한 회의.
마음속으로 누군가 이 지루한 회의를 끝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정작 먼저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마존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회의 주제가 무겁고 중했다.
“이런 고얀 놈!”
호통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노인의 시선은 방금 자신이 손바닥으로 내려친 방바닥에 꽂혀 있었다.
“찾았다!”
노인이 두 손가락으로 뭔가를 집어 들었다. 노인의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살짝 묻어 있었다. 안력을 돋우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이 한 마리.
“제길, 이놈도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좋으련만.”
노인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털었다.
그를 제외한 열네 명이 일제히 얼굴을 찡그렸지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반대머리 노인이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식귀(食鬼) 추빈(鄒貧).
오귀 가운데 한 명.
개방(짵幇) 태상장로.
타구봉법을 극성으로 익힌 개방의 최고수.
먹을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이 뭐든 장소가 어디든 시간이 언제든 상관없이 달려들어 깨끗이 해치우는 중원의 대식가. 하여 무림인들은 그를 식개(食짵)라는 정식 별호 대신 식귀라 불렀다.
“아무래도 어르신이 결론을 내주셔야겠습니다.”
사천당가 가주 당우강(唐優剛)의 말에 추빈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낄낄낄, 지난 열흘 동안 당가에 달라붙어 공밥 얻어먹는 재미에 주둥이 닥치고 살았는데 이제 그것도 끝이로구먼. 사실 결론이야 처음부터 나온 것 아니오. 먼저 범인을 찾아야지. 그래야 추살령을 내릴지 조용히 잡아 관에 넘길지 결정할 수 있지 않겠소. 단, 조용히 찾아야 하오. 아직 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존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트려 중원을 소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열네 명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 역시 태상장로님과 같습니다. 혹 다른 생각이 있으신 분 계신지요?”
“…….”
“아무도 없으시군요. 그렇다면 추 장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당우강의 말에 모든 이들이 “좋습니다.”라고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문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일제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허허, 늦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관무백이 유심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무백 형님!”
식귀 추빈이 소리치며 달려와 관무백을 와락 끌어안았다.
“추 대협을 이곳에서 뵙다니 뜻밖이오. 그래 그동안 잘 지내셨소?”
“낄낄낄, 나야 형님이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잘 지냈습죠. 그나저나 형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도 그 마존의 제자인가 지랄인가 하는 놈 때문에 오셨습니까?”
“허허허, 나야 본래 무림인도 아닌데 그럴 리가 있겠소. 내 공동파 제자 분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소이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나저나 오늘 밤 한잔하셔야지요. 제가 사겠습니다.”
“내 아무리 가난하게 사는 시골 노인네지만 추 대협에게 얻어먹을 수야 있겠소. 내가 한잔 사리다.”
“낄낄낄, 사실 그 말을 기대했습죠. 거지 새끼가 뭔 돈이 있겠습니까. 낄낄낄낄!”
“허허허허!”
식귀 추빈과 창왕 관무백의 웃음소리가 문밖까지 울려 퍼졌다.
* * *
사천당가를 나선 지 사흘.
유심은 공동파 도인들과 함께 수직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유심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오래전 촉의 명재상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웅심을 품고 만든 검문촉도(劍門蜀道)다.
중원의 외곽 지역인 사천성에서 중원으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만 그 길은 좁고 험했다.
폭은 겨우 세 자.
길옆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직 절벽이다. 자칫 한 발만 삐끗해도 큰일이 나기에 길을 걷는 사람들은 긴장하고 또 긴장했다.
무공 수련으로 생활하는 공동파 도인들 대부분도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유심만은 예외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뒷짐까지 진 채 한가로이 걷는 모습이 마치 뒷집 놀러가듯 여유로웠다.
당연한 일이다. 길도 없는 호유곡 절벽을 드나들었던 유심에게 검문촉도는 마차 서너 대가 지나는 대로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유심은 일 갑자가 넘는 공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공동파 도인들은 그런 유심의 모습이 더없이 신기했다.
공동파 장로, 운산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갓 열다섯 정도에 불과한 듯 보이는 소년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검문촉도를 걷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운산자가 걸음을 빨리해 유심 옆으로 다가섰다.
“과연 창왕 어르신의 제자답습니다. 소협.”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사님.”
유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험한 길을 그렇게 수월하게 넘으시다니 대단하단 말씀입니다.”
“에이! 이까짓 게 뭐 별건가요? 그나저나 왜 저에게 존댓말을 하십니까?”
“소협, 소협의 사부님이신 창왕 어르신은 저의 사부님보다 배분이 높습니다. 그런 분의 제자에게 하대를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전 불편한데……. 도사님, 저와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안 되겠습니다.”
유심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분이 무엇인지는 유심도 알고 있다. 민가에서 말하는 항렬과 같은 것이 강호에서의 배분이다. 민가에서 항렬이 중요하듯 강호에서 배분이라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운산자가 자신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말을 말자.’
그렇게 생각하고 재빨리 발을 움직여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를 걸었을까?
유심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와―!”
유심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거대한 관문.
이제껏 사천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성문과 관문을 보았지만 지금처럼 거대한 관문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문관(劍門關)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아― 이곳이 검문관이구나.”
유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한 번도 온 적은 없었지만 검문관은 유심도 들어본 곳이다. 촉의 마지막 명장 강유가 삼만의 군사로 위의 십만 대군을 막아낸 천혜의 요새.
한눈에 봐도 철옹성임을 알 수 있었다.
검문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군사 요새인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십여 명의 병사들이 관문 앞에서 창을 들고 경계를 서는 와중에 병사 두 명이 들어서는 사람들의 짐을 일일이 뒤졌다.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며 유심은 계속해서 관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운산자와 공동파 도인들은 검문관에 도착했다.
“소협, 가시지요.”
“예에.”
유심이 운산자를 따라 줄 뒤쪽으로 갔다.
거의 일다경 정도가 흘러서야 유심 일행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창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공동파 도인들의 허리춤에 달린 장검 때문이다.
짐을 뒤지는 역할을 하는 두 명 역시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디에 속한 도인들이시오?”
“공동파 장로 운산자라 하외다.”
“공동파 장로요?”
병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공동파라면 구파일방에 속한 명문, 그곳의 장로라면 자신이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말만 믿고 검문관을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통행증을 보여주셔야겠습니다.”
“통행증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앞에 분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소?”
“그 사람들이야 무기가 없지 않습니까? 검을 갖고 통과하시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합니다.”
“통행증 없이 지나갈 수는 없겠소?”
“검을 이곳에 풀어놓고 가시면 됩니다.”
“허허, 이거 참. 여기가 무슨 해검지도 아니고.”
무림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져 지름길을 택해 검문촉도로 들어선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돌아가려면 사흘을 까먹는다. 아니, 이곳까지 오는데 사흘이 걸렸으니 엿새다.
공동파 체면에 검을 풀어두고 갈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관병을 상대로 무력을 쓸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난감했다.
그것은 유심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아버지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 사부에게 무공을 배워야 하는데 잘못하면 며칠을 까먹어 버릴 수도 있었다.
‘이걸 꺼낼까?’
유심이 품속을 만지작거렸다. 유심의 품에는 사부 관무백이 그에게 건넨 물건 하나가 있었다. 앞면에 용 다섯 마리가 서로 뒤엉켜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천무신장관무백이라는 일곱 글자가 새겨진 작은 영패.
잠시 영패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다가 조용히 손을 뺐다.
사부 관무백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상황이 아니면 함부로 그것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금이 비록 급박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사부님!”
뒤를 따르던 도인 가운데 한 명이 운산자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사부님, 생각해 보니 이곳에 소우정(蘇禹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우정!”
도인의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유심과 운산자 일행의 검문을 하던 병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컸던 그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소우정은 이곳 검문관 경비를 책임지는 장군이다. 병사들로서는 얼굴도 쳐다볼 수 없는 인물. 그런데 일행의 장도 아니고 뒤에 따르는 도인 한 명이 그런 장군을 동네 강아지 부르듯 부르고 있는 것이다.
“도도도, 도인께서 소우정 장군님을 아십니까?”
말까지 더듬었다.
도인이 그런 병사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우정이 비록 속가이기는 하나 내 사제가 되는 인물이오. 혹 그가 안에 있다면 공동파 대.장.로. 운산자 님께서 오셨다고 말씀해 주시구려.”
“자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두 병사 가운데 한 명이 나머지 병사에게 눈짓을 하고는 부리나케 관문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나저나 소우정이 누구냐?”
“운암자 사숙님의 제자입니다. 사부님께서도 얼굴을 보시면 아실…… 참! 사부님. 혹 오줌싸개라고 기억하십니까?”
“오줌싸개? 그놈이라면 소병선 장군의 아들내미가 아니냐? 가만 그럼 그 녀석이?”
“예, 맞습니다. 오줌싸개 그 녀석이 소우정입니다.”
“그 철부지 오줌싸개가 벌써 장군이 되었단 말이냐?”
“사부님, 그게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일입니다.”
“허허허, 그렇구나. 세월이 참 빠르구나.”
잠시 눈을 감은 채 옛일을 생각하던 운산자가 고개를 돌렸다. 관문에서 누군가 ‘사백님!’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관문 안에서 장군 한 명이 달려오더니 그를 향해 한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사백님, 사백님께 복마소구식(伏魔小九式)을 배운 소우정입니다.”
운산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가 누군인지 생각났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얼음물을 깨고 이불을 빨던 그 녀석이 분명했다.
“벌써 이렇게 장성해 장군이 되다니 기쁘구나.”
“예, 모든 것이 사백님들과 사부님 덕분입니다. 천호 사형께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래, 오늘은 광원무관(廣元武館)에서 머물 생각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운산자가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자신의 제자뻘이 되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어엿한 장군. 그런 그에게 길안내를 시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럴 수야 없지. 혹 시간이 되면 일이 끝난 뒤 그곳으로 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대신 관문 안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운산자가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정이 손으로 안을 가리키며 일행을 안내했다.
“충!”
관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제히 복명하며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