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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18화)
5. 혹시 노망나셨나요?(3)
검문관을 넘으니 한결 편안해졌다.
마차 한 대는 그럭저럭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길도 넓었고 험하지도 않았다. 검문관에서 시간을 지체한 때문인지 운산자 일행은 속력을 높였다. 신법을 익히지 못한 유심은 거의 뜀박질을 하듯 달려야 했지만 숨이 차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걷고 달린 덕분에 유심 일행은 그날 저녁 사천, 섬서, 감숙성 인근의 광원(廣元)이라는 제법 큰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동파 도인들은 광원에서도 제법 큰 장원인 광원무관에 여장을 풀었다. 광원무관은 공동파 속가제자인 송철호라는 사람이 무술을 가르치는 곳이다.
송철호는 대장로 운산자의 제자였다.
그날 밤, 철호는 사부 운산자를 위해 무관 후원에서는 연회를 벌였다.
참석 인원만 해도 어림잡아 백여 명에 이르는 큰 연회.
대부분이 금의(錦衣)를 입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간간이 무복을 차려입은 무인들과 갑옷을 입은 장군들도 보였다.
“철호야, 사람들을 너무 많이 부른 듯싶구나.”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사부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인사를 올리겠다며 사람들이 찾아오니 제가 어쩌겠습니까? 사부님, 이제 소개를 할까요?”
“아니다. 그나저나 소협은 어디에 계시는고?”
운산자가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연회장 가장 구석에 앉아 조심스럽게 음식을 들고 있는 유심이 보였다.
“소협, 이쪽으로 오시지요.”
운산자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소년. 유심과 함께 출발한 공동파 도인들을 제외한 사람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동파 대장로가 존대를 하는 인물이라면 그 신분이 범상치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소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운산자의 재촉이 이어졌다.
“어허, 소협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 않고요.”
유심이 마지못해 운산자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상석에 앉았다.
“저 아이는 누구요?”
“글쎄, 나도 처음 보는 아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소곤거렸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운산자는 사람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운산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소협이 누구신지 궁금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운산자가 유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유심이라 합니다.”
유심이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뭐라는 건가?”
“장유심이라고 하지 않나.”
“그게 누군가? 누가 이름 알고 싶다고 그랬나?”
“난들 아나. 그렇다니까 그런 거지.”
조용하던 연회장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유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개하라고 해서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사람들 표정을 보아하니 불만이 가득했다.
‘뭘 어쩌라는 거야?’
유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산자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소협께서 강호 경험이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예(禮)가 아닌 줄은 알지만 제가 대신 소협을 소개해 드리지요.”
연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여기 이 소협은 천무신장 어르신의 기명제자(記名弟子) 올시다.”
“예에?”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은 이 연회를 마련한 송철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사부 운산자가 그를 대하는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황제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중원의 위대한 영웅, 천무신장 관무백의 기명제자라고는 짐작도 못했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란이 일었다.
‘어쩐지 용모가 범상치 않았다.’ ‘내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등 대부분 그를 칭찬하는 소리였다.
유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새끼 뭐야?’하는 표정을 짓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사람의 신분에 따라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인간들.
그들이야말로 유심이 가장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화려한 금의를 걸친 한 명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심 앞으로 다가왔다.
“대장군께옵서는 별고 없으십니까?”
“저희 사부님을 잘 아십니까?”
“중원인 가운데 대장군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허허허허!”
넉살 좋은 웃음을 토하는 사내의 귀로 유심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런 것 말고 일면식이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그, 그런 것은 아니옵고…….”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갔다.
유심 역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운산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숙소로 향했다.
불쾌한 자리, 굳이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 * *
유심이 연회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할 즈음.
천무신장 관무백은 운지학과 함께 호유곡을 걸어 유심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비나 피할 정도의 초라한 띠집.
관무백과 운지학이 걸음을 멈췄다.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연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허리에는 검파를 포함해 네 자 정도의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연걸의 손은 언제든 발검(拔劍)할 수 있도록 손으로 검파를 움켜쥐고 있었다.
연걸의 모습에 운지학이 흠칫하며 남은 한 손으로 검파를 움켜잡았다. 그것은 반평생이 넘도록 관대장군을 호위하며 살아온 운지학의 본능이었다.
“손을 떼게!”
“하지만 대장군!”
“어허, 손을 떼지 못하겠는가.”
관무백의 말에 운지학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검파에서 손을 뗐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은 연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검파를 움켜쥐고 관무백과 운지학을 노려보던 연걸이 역시 놀란 듯 몸을 흠칫하며 검파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있었다.
“귀하께서 유심의 부친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허허허, 반갑습니다. 이 늙은이는 이번에 유심과 사제의 연을 맺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무신장 어르신.”
“저를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오래전 어르신을 뵌 적이 있습니다.”
“……?”
관무백이 안력을 돋웠다. 자신이 어디서 보았다면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더구나 연걸은 해골 같은 모습이었다. 한 번 보았다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러나 연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시 한 번 연걸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허허허, 내가 늙기는 늙은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많이 변한 까닭이지요.”
“미안하지만 우리들이 언제 만났는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운강대전(雲岡大戰)을 기억하십니까?”
“허허허. 아픈 곳을 찌르십니다그려.”
관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운강대전은 그의 생애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전할 뻔했던 전쟁.
복원을 꾀하던 원의 잔당들과 산서성 북쪽에서 벌였던 최후 결전.
결국 이겼지만 승리의 대가로 휘하 병사들 가운데 거의 절반인 오만의 병사를 잃은 그로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과 같은 전쟁이다.
“잠깐!”
관무백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안력을 돋워 연걸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한 사람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그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빛이었다.
“의(醫)……! 귀(鬼)……!”
관무백의 한마디.
연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졌다.
“변하지 않은 데가 있었나 봅니다.”
“그대의 눈빛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소이다. 생각해 보니 쉽게 알아낼 수도 있었소이다. 유심의 몸을 살피고 생각을 좀 더 깊게 했다면 난 그대를 생각해 냈을 것이오.”
“그래서 유심을…….”
“아니오. 내가 유심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몸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 때문이오.”
“마음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녀석이 영악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뜻한 아이였소. 은근히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고 말이오. 어쩌면 그것이 그대를 생각하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소. 의귀는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말이오.”
“…….”
관무백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뭐라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의귀(醫鬼).
오귀 가운데 한 명.
오귀 대부분이 칠십이 넘은 노인들임에 비해 의귀는 오십대 초반으로 현재 강호에서 활동하는 칠웅들과 비슷했다. 그런 의귀가 오귀에 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활동 시기와 무공 수준이 다른 사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십여 년 전.
약관을 갓 벗어난 나이.
의귀는 등장과 함께 세인들의 이목을 단박에 끌었다.
신의라 불릴 정도의 뛰어난 의술.
‘숨만 붙어 있다면 그 앞에서 죽는 이는 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의 의술은 이미 신화경에 이르러 있었다. 사람들은 한때 그를 다시 태어난 화타라는 의미로 재림신의(再臨神醫)라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화타의 재림이 아니었다. 의술은 화타와 같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 씀씀이는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중원 의원들이 실천은 못하면서도 언제나 부르짖는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말을 개소리로 만든 인물이 의귀다.
그에게 대가 없는 의술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가는 오직 하나, 무공이었다.
바늘 하나면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더라도 그에게 가르칠 무공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음을 지켜보기만 했다.
무공에 미친 신의.
덕분에 그는 강호에 등장한 지 십여 년 만에 당대 무림 최고 고수들인 사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신의라는 말 대신에 의귀라 불렀다.
‘그렇지. 그게 나였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이유가 있었다.
가문의 복수.
인예의가 가주였던 아버지 덕분에 몸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초식뿐이었다.
모든 무공을 닥치는 대로 익혔다. 강한 무공이든 약한 무공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익히다 보면 강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데 십오 년이 걸렸다.
대가는 컸다.
한 사람을 보내야 했다.
의귀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익힌 수많은 무공은 그보다 강한 단 하나의 무공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십오 년 전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던 사람이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관무백을 보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조용히 손을 들어 방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