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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19화)
5. 혹시 노망나셨나요?(4)
다음 날.
유심과 공동파 제자들은 떠날 준비를 마치고 아침 일찍 밖으로 나왔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마차들이 무관 앞 대로에 늘어서 있었다. 한 대당 두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마차에 꽂힌 작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광원표국, 중원표국, 천하표국, 황금표국…….
표국의 깃발이다.
세사에 공짜는 없는 법.
운산자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유심은 공짜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사천전충의 본능에 따라 급히 은자를 계산했다.
먼저 대충 마차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오십여 대.
마차 한 대당 장검 한 자루 값인 이십 냥만 치더라도 일천 냥. 입이 딱 벌어질 거금이었다.
“많구나.”
“장로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근처에 있는 표국에서 감숙성으로 가는 표물들을 모두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니 상관없겠지.”
유심과 공동파 도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 뒤를 표행단이 조용히 따랐다.
* * *
광원을 출발한 지 나흘.
유심은 공동산에 들어섰다.
공동파 도인들뿐이었다면 사흘이면 도착할 수 있었지만 표행단과 함께 오느라 하루가 더 걸렸다. 그래도 유심이 생각했던 것보다 배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서래제일산이라 불리는 명산 공동산. 그렇지만 유심은 공동산의 경치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심이 보기에 공동산은 자신이 살던 금양산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산에 불과했다.
“소협, 저깁니다.”
유심은 걸음을 멈추고 운산자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유심이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도인들이 모여 도를 닦는 도량.
유심은 깊은 산속에 자리한 암자를 떠올렸었다.
너른 바위 위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좌선한 채 도를 닦는 신선의 뒤쪽 산등에 달라붙은 오막살이. 그것이 유심이 생각한 공동파의 모습이다. 물론 도인들이 많은 곳이니 그런 소축(小築)들이 공동산 곳곳에 여러 채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가 성도에서 흔히 보았던 장원들과 비슷했다. 단지 그 건물들이 산속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본전으로 보이는 건물은 그동안 유심이 보았던 건물 중에서 가장 컸던 화우전보다도 커 보였다.
공동파.
정말 크다.
멀리서 볼 때도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본전으로 보이는 건물은 화우전보다 배는 커 보였다. 그것 말고도 화우전보다 큰 건물들이 십여 채는 넘게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표현밖에 쓸 말이 없었다.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유심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허리춤 안쪽에 차고 있던 홍조수아를 밖으로 꺼냈다.
“소협, 그게 뭡니까?”
“차용증섭니다.”
“예? 그럼 이곳에 빚을 받으러 오셨단 말씀입니까?”
“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운산자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얼핏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유심이 허리춤 밖으로 내놓은 것은 홍조수아였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유심은 차용증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인간을 어디서 찾지?’
고민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사람도 많은 이곳에서 아버지에게 빚을 진 빚쟁이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꼬르륵!
그의 고민과는 달리 배에서 뭔가를 채워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침을 먹은 뒤 거의 저녁 무렵인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이 빨개졌다.
“허허허, 요기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시지요.”
운산자가 앞장섰다.
“여깁니다.”
운산자의 말에 문 안쪽으로 막 한 발을 내딛고 들어선 순간.
“이노―옴! 당장 내놓지 못할까―!”
귀를 찢는 호통과 함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급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수 한 자루가 섬광을 일으키며 유심을 향해 날아들었다.
“……!”
생각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그저 살겠다는 생각으로 급히 머리를 숙였다.
비수가 정수리를 스치듯 지나가 문설주에 틀어박혔다.
“휴우―!”
한숨과 함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골로 갈 뻔했다고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어떤 자식이!’
눈을 부릅떴다.
딸기코 노인 한 명이 도인인 듯 보이는 청년을 향해 호통을 치며 손에 움켜쥐고 있는 뭔가를 하나씩 뽑아 연신 날려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도인은 미친 듯 몸을 흔들며 돼지 멱따는 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쳤다.
“뭐야? 젓가락이잖아.”
그랬다. 노인이 쉴 새 없이 던지는 것은 비수가 아니라 음식을 집어 먹을 때 사용하는 평범한 나무젓가락이었다.
피잉! 피잉!
젓가락[箸]은 푸른 섬광을 내며 날아가 단단한 건물 벽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벽을 뚫을 정도라면 사람의 몸은 간단히 관통할 위력, 그러나 다행스럽게 젓가락은 아슬아슬하게 스칠 뿐 도인의 몸에는 틀어박히지 않았다.
푸른 섬광, 흔히 말하는 검강(劍|)이다.
검이 아니라 젓가락이니 정확히 말하면 저강(箸|)이다. 그러나 검강을 모르는 유심은 그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잠시 자신이 위험했었다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도 노인은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날렸다.
젓가락에 스친 도복이 칼에 잘린 것처럼 매끄럽게 찢겨 나갔다. 오직 살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흔들던 도인이 지친 듯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야말로 위기의 순간.
당장에라도 노인에게 달려가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노인의 실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연히 객기를 부려 나섰다가는 도인을 구하기는커녕 자신도 도인과 함께 황천길에 오를 것 같았다.
노인의 무공은 그만큼 엄청나게 보였다.
이제껏 그가 보았던 최강자는 운지학이다.
중원사왕 가운데 창왕이라 불리는 사부 관무백의 무공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하여 그가 직접 확인한 사람 중에 최강자는 운지학이다.
운지학도 노인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렸다.
공동파 대장로 운산자가 있었다.
제자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데도 운산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야 공동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외인이지만 운산자는 공동파 대장로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운산자는 노인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이든 아니면 그를 설득하는 것이든 어떤 조치를 취해야 옳았다. 설령 노인과의 싸움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그는 제자를 보호해야 했다.
“소협, 이상하십니까?”
“예, 아주 이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실망입니다.”
“허허허, 제가 두려워서 그런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아닙니까?”
유심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운산자가 나서지 않으니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소, 소협!”
운산자가 황급히 유심을 불러보았지만 그는 벌써 노인에게 다가가 있었다.
“어르신, 이제 그만하시죠!”
“……?”
노인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손을 허리에 떡하니 얹은 채 자신을 노려보는 녀석이 보였다.
어이가 없었다.
공동파에서 자신을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노려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공동파 장문인이라 해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라면 다르지만 운석 진인도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향해 먼저 허리를 숙여야 했다.
더구나 놈은 아무리 보아도 약관을 넘지 못한 자였다.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장난감을 갖고 놀던 어린아이가 강아지를 처음 본 심정이라고나 할까?
유심의 정체부터 알아볼 생각으로 겉모습부터 찬찬히 살폈다.
일단 이곳 기식정(氣食停)은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원에 위치해 있어 단순한 방문객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왔다면 공동파에 정식으로 입문한 도인이거나 무공 수련을 위해 들어온 속가제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유심의 모습은 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식제자라면 도복을 속가제자라면 무복을 입고 있어야 했는데 유심은 평범한 단삼을 입고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속가제자로도 입문하지 못한 신출내기가 분명했다.
“나를 향해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공동파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놈이로구나.”
“예, 오늘 처음 들어왔습니다. 하여 노인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함부로 해하는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뭐? 짐승만도 못한 놈? 지금 그 말 내게 한 것이냐?”
“그럼 제가 저기 쓰러진 도사님께 말씀 드리겠습니까?”
유심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도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런 고얀 놈!”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물론 해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겁을 주려는 것뿐이다.
“사백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허자,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운산자와 그를 따르던 도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태상장로?’
유심의 눈이 동그래졌다.
혹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공동파 도인들은 분명 노인을 태상장로라고 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태상장로라면 일문의 가장 큰 어른이 되는 사람이다.
노인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일을 생각해 보았다.
‘미쳤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조금 전 노인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파의 가장 큰 어른이 나이 어린 제자를 상대로 미친 듯 공격을 펼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심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운산자가 무허자 앞으로 다가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사백님, 다녀왔습니다.”
“됐고. 이 새끼는 뭐냐? 이번에 네가 주워온 물건이냐?”
손을 들어 유심을 가리켰다.
운산자가 놀란 듯 몸을 흠칫거렸다. 아무리 공동파 태상장로라 하지만 천무신장의 제자를 두고 이 새끼 저 새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사, 사백님.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소협은 천무신장 어르신의 제자입니다.”
“뭐? 이놈이 관 형의 제자라고?”
이번에는 무허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다 말았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나름 재미있는 장난감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며 가지고 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다루기에는 너무 큰 거물이었다.
“그래. 마존의 제자인가 하는 놈은 때려잡았느냐?”
“송구스럽지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럼 뭐하러 당가까지 갔다 왔어? 돈 뜯으려고?”
“돈을 뜯다니요? 사백님, 그게 무슨……?”
“네놈들이 밖에 나가서 표국 등 쳐서 은자 뜯는 짓 하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사백님, 그거야 표국에서 자발적으로 건네는 성의 표시가 아닙니까? 다른 문파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고요.”
“그래서 구파일방 놈들이 다 도둑놈이라는 거야?”
“예?”
“솔직히 구파일방이 마음만 먹으면 그깟 산적 놈들 열흘 안에 모두 없앨 수 있어. 속가제자들까지 다 불러봐! 아마 산적들보다 그놈들이 더 많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안하는 이유가 뭐야? 그게 다 표국에서 은자 뜯어내려는 수작이잖아.”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 말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개방을 제외한 구파는 모두 도가나 불가로서 본래 살생과는 거리가 먼 곳들이다.
부득이한 경우 살수를 쓰기는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을 때뿐이다. 그렇지만 구파일방이 정말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많은 산적들을 해치지 않더라도 그들을 해산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