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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20화)
5. 혹시 노망나셨나요?(5)
“사백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이리 노하셨습니까?”
급히 화제를 바꿨다.
무허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운산자가 왜 갑자기 화제를 돌렸는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자신 역시 공동파에 몸담고 있는 도인. 더 이상 그것을 말해 봐야 누워서 침 뱉기에 불과했다.
“청수, 저 망할 놈이 내 술을 꿀꺽했거든.”
“술이요?”
“그래. 그게 보통 술이면 내 말도 안 하지. 천하명주 후아주야. 내가 그 술을 구하려고 황금원숭이가 있는 산이란 산은 모조리 쑤시고 다녔어. 그게 없어졌다 이 말이야!”
무허자가 눈을 부릅뜨고 도인을 보았다.
도인은 몸을 벌벌 떨 뿐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가가, 가만. 사백님, 혹 그 술이라면 팔선대(八仙台)에 묻어두시지 않으셨습니까?”
“팔선대?”
“예, 정확히 그것이 무슨 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년 전인가 삼 년 전에 아주 귀한 술이라 하시면서 팔선대에 묻으러 가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아―! 맞다. 내 그것을 깜빡했었구나. 클클클, 이래서 나이 먹으면 죽어야 하는 법이야. 그나저나 이거 미안해서 어이할꼬. 청수야, 내가 공연히 너를 의심했구나. 대신 네게 복마대구식(伏魔大九式)을 직접 전수해 줄 것이니 용서하거라. 클클클클.”
무허자가 언제 화를 냈었느냐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청수가 그런 무허자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무허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유심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노망이 났다면 모를까.
‘혹시 노망나셨나요?’
목구멍까지 그 말이 올라왔지만 꼭 눌러 참았다.
정말 노망이 났다면 그 말 한마디에 목숨이 날아갈 것 같았고, 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보다 큰 실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무허자는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며 유심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유심을 뒤로하고 한 발을 내딛던 무허자가 무슨 일인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부릅뜬 눈.
유심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무림 고수 중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춘 자도 있다는데 혹 무허자가 그런 인물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무허자의 눈빛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유심의 허리춤에 달린 홍조수아.
휘익!
유심이 손쓸 틈도 없이 무허자는 홍조수아를 낚아챘다.
“이놈아, 이것은 어디서 훔쳤어?”
유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노망나셨나요?”
꾹 참았던 말을 툭하고 내뱉었다.
6. 마존(魔尊)의 무공, 쾌섬(快閃)을 익히다(1)
운산자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유심을 보았다.
노망.
망언 중에 망언이다. 일반인도 화를 낼 수 있는 말이다. 더구나 그 당사자가 괴팍하기로 중원에 소문이 자자한 공동파 술귀신 무허자였다. 비록 그가 천무신장의 제자라 하더라도 칼부터 날리고 볼 것이라 생각했다.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
이젠 자신이 말릴 수도 없었다.
급히 사백, 무허자의 얼굴을 살폈다.
“푸하하하!”
운산자의 걱정과는 달리 한참 동안 유심을 노려보던 주귀, 무허자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운산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무허자가 이렇게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사실 무허자는 노망이라는 말이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웠다.
이제껏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가 마존을 사로잡겠다며 공동파를 떠났다가 돌아온 지 어언 오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망언은 고사하고 변변한 인사 한 번 올리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그가 중원에서 돌아올 때 함께 온 처사, 가평뿐이었다.
어느덧 공동파 중심이 된 청(靑)자 항렬 제자는 물론이고, 공동파 어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운(雲)자 항렬 장로들조차 그를 보면 허리를 숙이는데 급급할 뿐 먼저 말을 건넬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존경하기 때문에?
물론 그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
그들이 말을 붙이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허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무허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나이 어느덧 졸수(卒壽=구십).
나이를 먹은 노인이다.
혈육이 없는 그에게 청자 항렬의 제자들은 손자나 증손자 같은 아이들이다. 노인들의 낙 가운데 하나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손자 녀석들이 재롱은커녕 할아버지가 무섭다면서 슬금슬금 도망간다면…….
섭섭하다.
무허자 역시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쪽 끄트머리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약관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향해 당당히 노망 나셨느냐고 물었다.
복잡한 심정.
어린 손자에게 수염을 잡힌 할아버지의 마음이 지금과 같을까?
‘가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무허자를 바라보던 유심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있는 이 노인이 아버지가 건네준 홍조수아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찾았다.’
미소가 퍼졌다.
이제 빚쟁이를 찾았으니 빚만 받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사천전충에게 그것은 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아버지는 무엇을 받아오라는 말없이 주는 대로 받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무허자가 꿀밤 한 대를 때리며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냥 한 대 맞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주십시오!”
“뭘?”
“뭐라니요?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할 것 아닙니까?”
유심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허자가 그런 유심을 보았다. 아까는 노망나셨느냐고 묻더니 이제는 밑도 끝도 없이 빚을 갚으라고 한다. 가만 보니 녀석은 자신을 홍조수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크크크, 네놈이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구나. 이놈아, 난 빚진 적 없어!”
“예?”
“그건 내 게 아니야.”
“정말이십니까?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아버지께서는 분명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 빚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미친놈, 네 아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난 빚진 적 없다니까. 그런데 뭔 빚을 갚아?”
유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술술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버리기에는 일렀다. 아버지가 건넨 홍조수아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그 주인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주인이 누군지는 알고 있으시겠군요.”
“물론!”
“그게 누굽니까?”
“너같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한테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는…….”
“날세!”
누군가 무허자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유심이 재빨리 소리가 들린, 문 쪽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신선처럼 길게 자란 수염을 휘날리며 노인 한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사부 관무백과 비슷했다.
오십여 년 전 주귀 무허자와 함께 공동파로 들어온 가평이었다.
유심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유심이 그를 향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당사자인 유심도 몰랐다. 어쩌면 사부의 모습과 비슷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평이 품에서 작은 옥 조각을 꺼내더니 유심이 들고 있는 홍조수아 잘린 면에 댔다.
원래 하나인 듯 두 조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내 것이 확실하네. 그래, 이것을 자네에게 준 사람이 부친이라 했는가?”
“예.”
“부친께서는 평안하신가?”
“예, 얼마 전까지는 거동이 조금 불편하셨지만 지금은 외부로 출입하실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지셨습니다.”
“다행이로군. 그래 자네 부친께서 내게 무엇을 받아오라 하셨는가?”
“모릅니다. 어르신께서 주시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내겠다는 말이로군. 허허허허!”
한동안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트리던 가평이 웃음을 끊고 다시 유심을 보았다.
이십여 년 전 만났던 의귀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그래, 빚을 모두 받아낼 자신은 있는가?”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빚을 받아내는 일이라면 세상에서 저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물론입…….”
휘릭!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가평은 유심에게 달려들어 그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유심의 몸이 휘청거렸다.
가평이 유심을 옆구리에 끼고 기식정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봐 가평이―!”
무허자가 가평을 부르며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운산자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유심을 안고 가는 가평을 바라보았다.
점혈법(點穴法).
상승무학을 생각한다면 점혈법은 무공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간단한 수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방금 가평이 펼쳐 보인 점혈법은 운산자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유심이 갑자기 잠자듯 쓰러졌기에 가평이 점혈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뿐, 그가 수혈을 짚는 모습은 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그를 향해 점혈법을 펼쳤더라도 막지 못했다는 뜻이다.
만약 그것이 점혈법이 아니라 권장법이라면, 아니, 손에 칼을 움켜쥔 검법이라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태상장로 무허자와 함께 들어온 사람이기에 그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무허자를 능가하는 초절정고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 * *
“이이, 이럴 수가?”
무허자가 놀란 듯 고함을 질렀다.
그가 놀란 것은 관무백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공동파를 떠나기 전 몸을 살폈을 때의 그것과 같았다. 열댓 살 정도에 불과한 녀석의 몸속에 육십 년, 일 갑자가 넘는 공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거기에 기혈마저 일반인과는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무공을 익히기에 완벽한 무골이다.
고개를 돌렸다.
무허자가 고함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가평은 조용히 유심을 지켜볼 뿐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 역시 속마음은 무허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게 유심의 내공과 기혈 때문이 아니다.
유심에게는 다른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백팔대맥(百八大脈)은 물론 전신세맥(全身細脈)까지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진력. 그것이 공력의 두 배가 넘었다. 그 정도 진력이면 어지간한 상처나 내상은 자연치유할 수 있을 정도다. 상승심법을 익히게 된다면 그 공력들은 언제든 본신공력과 합쳐질 수 있다. 그것은 이백 년 공력을 단전에 모아두는 것보다 훨씬 효용 가치가 높다.
유심의 몸을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면 그를 일 갑자가 조금 넘는 정도의 고수로 보게 된다. 그것은 적이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생사를 걸고 벌이는 싸움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고수의 대결은 평정심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의 안정을 잃는다는 것은 고수 간의 대결에 있어서 곧 목숨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기습과 선제 공격. 그것 역시 상대방의 평정심을 깨기 위한 방법이다.
일 갑자가 조금 넘는 절정고수와 대결을 벌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대가 이백 년 넘는 공력을 쏟아낸다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의귀의 솜씨다. 이놈은 괴물이야.’
유심의 몸속에 흩어져 버린 백사십 년 공력.
의귀 장연걸은 그것을 자신의 조급함에 기인한 절반의 실패라고 생각했지만 가평은 그것을 의귀만이 펼칠 수 있는 특별한 대법으로 완성한 엄청난 안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놈 누군가? 아니, 이놈 아비가 누군가? 도대체 누구기에 이런 엄청난 놈을 만들어 낸 게야?”
“의귀!”
“뭐?”
그렇지 않아도 놀랐던 무허자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유심의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오귀 중에 한 명이라니.
“과연 의귀로군. 하긴 그자가 아니라면 일 갑자가 넘는 공력을 간직한 괴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겠지.”
주귀의 말에 가평이 눈과 입을 움직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오귀 가운데 최강이라는 주귀 역시 유심의 몸속에 일 갑자가 넘는 공력이 있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 전신세맥에 그보다 엄청난 진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몰랐다.
“이보게, 그나저나 의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빚을 받으러 왔다는 것을 보니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맞네. 그에게 빚을 진 적이 있지.”
“누가 그걸 몰라? 그 빚이 뭐냐니까?”
주귀가 궁금하다는 듯 가평을 향해 더욱 바짝 다가왔다.
“독에 당한 적이 있었네.”
“뭐? 자네가? 천하의 쾌섬마존이 독에 당했단 말인가?”
“이보게, 나도 사람일세.”
“누가 개돼지라고 했어?”
“허허허허!”
가평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다.
쾌섬마존.
현존 중원최강자라 불리는 그였지만 독에 당한 적이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단 세 사람의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