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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21화)
6. 마존(魔尊)의 무공, 쾌섬(快閃)을 익히다(2)
마존, 가평에게도 그것은 충격이었다.
중원사왕의 협공을 받는다 하더라도 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 명의 협공을 견디지 못했다. 물론 그의 몸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엄밀히 말한다면 핑계에 불과했다. 독에 당한 것 역시 그들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펼친 독공(毒功)에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공격한 자들.
개개의 무공이 중원사왕을 능가했었다.
누가? 왜 그를 공격한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일이다.
어찌 되었든 중독된 그를 해독시켜 준 사람이 바로 의귀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가 요구한 것은 마존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마존의 무공은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쾌섬이라는 무공의 특성 때문이다.
쾌섬은 실전무공이다.
본래 쾌섬에는 초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훗날 마존은 자신의 검을 세 가지 초식으로 정리했지만 그것이 쾌섬의 전부는 아니다. 세 가지 초식에는 각각 수없이 많은 변초들이 존재했고 그것을 익히는 방법은 실전뿐이었다.
두 사람은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마존과 실전과 다름없는 대련을 펼치며 의귀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에 몰렸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귀는 쾌섬 제일식 사광탈혼(射光奪魂)을 삼성 정도 익혔을 뿐이다.
결국, 의귀와 마존은 다음을 기약했다.
유심이 가져온 홍조수아는 그 약속의 표시였다.
본래 그런 약속은 필요 없었다. 의귀는 마존의 무공을 요구했고 마존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가르쳤다.
마존은 자신의 약속을 충실히 지킨 것이다. 그것을 익히지 못한 것은 순전히 의귀의 탓. 그런데도 마존이 의귀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그에게 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검에는 정이 없을지 몰라도 그의 가슴에는 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의귀의 아들.
다시 유심을 보았다. 자신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 줄도 모르고 유심은 천하태평 잠을 자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얼굴.
갈등이 일었다.
쾌섬에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것을 물려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네 사부, 천무신장이라면 너를 대도(大道)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무신장.
관무백이 조용히 바닥에 놓인 보따리를 보았다.
‘유심에게 전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며 연걸이 그에게 건넨 것이다. 관무백은 연걸이 왜 그것을 건넸는지 알고 있었다.
비록 연걸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역시 어느 정도의 의술은 익히고 있었다. 그가 본 연걸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몸을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귀였다.
중원에서 그보다 뛰어난 의원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몸을 알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처럼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풀었다.
보따리에서 나온 것은 책 네 권.
인예의서, 의귀무록(醫鬼武錄).
관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예의서는 그의 가문이나 사문에 전해지는 의서, 그리고 의귀무록은 그가 익힌 무공들 가운데 쓸 만한 것들을 모아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관무백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나머지 책이었다.
연걸을 만났던 그때를 생각했다.
연걸은 사무친 원한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비록 연걸은 그것에 대해 말 한마디 안 했지만 관무백은 그것을 보았다. 인예의서와 의귀무록은 그런 한을 간직한 책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권은 전혀 달랐다.
논어와 도덕경.
중원에서 글을 좀 익혔다는 자들 중에 그것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무백은 그것이 인예의서나 의귀무록보다 훨씬 더 귀하게 보였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에게 책을 건넨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사무친 원한을 물려주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들이 그 길을 버리고 도리를 지키며 인간다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각.
호유곡에 위치한 유심의 집에서는 연걸이 열심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짐이라 봐야 침통 하나와 옷가지 몇 개가 들어 있는 작은 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다.
보따리를 등에 묶고 천천히 일어났다.
언뜻 보면 약초를 캐러 나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복장은 그가 단순히 약초를 캐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단삼 대신에 장포(長袍)를 걸치고 있었다.
약초를 캐러간다면 장포를 걸칠 리가 없었다. 숲을 헤치며 돌아다니는데 장포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포 안쪽 허리춤에는 네 자 정도의 장검을 차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연걸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집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아들과 함께 보낸 십오 년. 그 시간이 연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곳을 나서는 순간, 그 행복은 끝난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떠나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가문의 피 맺힌 원한을 갚는 일?
아니다.
물론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세상에서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삼 년.
삼십 년을 찾아 헤맸어도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그들을 찾기 위해 남은 삼 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가문의 혈한은 유심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다.
대신에 할 일이 있었다.
그 일 역시 가문의 원한을 갚는 일만큼 중요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장식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방.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방 안에 앉아 있는 가평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가평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무허자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무허자는 가평이 부러웠다.
늘그막에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훌륭한 자질을 갖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군자의 가장 큰 즐거움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이라고 했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
공동파 장문인 운석 진인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무허자가 제자들에게 그의 독문무공 무허육합신공을 전하지 않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해다.
그 역시 좋은 제자를 만나 자신의 독문무공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문제는 그럴 만한 영재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선택한 인물이 기식정에서 그에게 봉변을 당한 청수다. 공동파 장로들, 심지어 장문인 운석 진인까지 그가 쓸데없이 청수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청수는 물론이고 장로들과 장문인까지 모르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무허자의 입장에서 볼 때, 천하제일의 무골이라 할 만한 유심을 가르치게 된 가평은 행운아 중에 행운아였다. 그런데 자신도 참고 있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으니 그가 얄밉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후우―!”
가평의 입에서 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 놀려? 천하제일 영재를 제자로 얻어 놓고 웬 한숨이야?”
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제야 가평은 무허자를 보았다.
볼이 잔뜩 부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무허자.
“배부른 놈으로 보였나?”
“말이라고? 배 터지게 처먹은 놈이 쫄쫄 굶은 분한테 ‘넌 먹은 게 없으니 소화 안 될 걱정도 없겠구나.’ 라고 말하는 것 같으이.”
“허허허허허!”
가평이 가가대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허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공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쾌섬은 실전무공이다. 그것을 완벽하게 가르치는 방법 역시 실전뿐이다.
그런데 유심은 기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허리에 칼도 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본은커녕 칼 한 번 잡아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유심에게 실전과 같은 대련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쾌섬 기본 사초식은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련을 통해 진정한 쾌섬이라 할 수 있는 변초들을 가르칠 수 있다.
문제는 기본 사초식을 가르치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유심의 아버지 의귀도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며 일 년을 보냈지만 겨우 일식 사광탈혼을 삼성 정도 익히는데 그쳤었다.
가평이 웃음을 멈추고 무허자를 보았다.
무허자는 여전히 퉁퉁 부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보게. 사실은 말이지…….”
가평이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무허자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가평이 그런 무허자의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허허허, 자네의 얼굴을 보니 방법이 있는 모양이로구먼.”
“물론.”
“좀 알려주게.”
“클클클, 그러고 보면 자네도 참 답답한 사람일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내가 왜 청수 그 녀석을 그렇게 다루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야…… 오―호! 그렇다면?”
“그래, 자네도 던져. 녀석이 뒈질까 봐 목검도 휘두를 수 없다면 나처럼 젓가락이라도 던져라 이 말이야!”
“그렇구먼. 그러면 되겠어. 허허허허!”
가평의 입에서 조금 전보다 훨씬 큰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난데없는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가평의 웃음소리를 듣고 얼떨결에 잠이 깬 유심이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졸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쳤다.
졸음이 확 달아났다.
유심이 벌떡 일어나 가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평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았지만 유심은 손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평은 그저 빚을 받아낼 빚쟁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주십시오.”
“이 사람! 자네 눈에는 내가 빚이나 떼먹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시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좀 바빠서…….”
유심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허, 우물가에서 숭늉 찾을 사람이로고. 통성명이라도 해야지 않겠나.”
“아, 그렇군요. 저는 장유심이라고 합니다.”
“장유심. 이름 한 번 좋구먼. 그래, 내 당장 갚을 것이니 따르시게!”
“예, 어르신!”
유심이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평의 뒤를 따랐다.
‘이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무허자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공동파가 아니잖아.’
밖으로 나오니 울창한 숲이 보였다. 자신이 나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암자.
그제야 유심은 자신이 있던 곳이 공동파 경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공동파 경내에서 의식을 잃었기에 이제껏 자신이 공동파 경내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먼저 공동파를 찾았다. 그래야 자신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측,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먼 곳에 공동파 건물들이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뒤에야 유심은 가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걷고 있는 가평이 보였다.
유심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유심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급히 그의 뒤를 따라 달렸음에도 두 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가평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아주 천천히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가평을 따라잡지 못했다. 오히려 두 사람의 간격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노인의 뒤를 놓칠 것 같아 더욱 속도를 높여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르신, 같이 가시죠!”
다급해진 유심이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가평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가평은 그저 묵묵히 정면을 응시하며 여유작작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