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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22화)
6. 마존(魔尊)의 무공, 쾌섬(快閃)을 익히다(3)


일다경 정도가 흘렀다.
사방 오 장여에 이르는 너른 바위가 보였다.
가평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이를 악물고 달려오는 유심의 모습이 보였다.
가평이 미소를 한 번 짓고는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 두 개를 골라 양손에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바위 앞으로 다가가 방금 주어 든 나뭇가지를 바위에 댔다.
마치 두부를 찌르듯 나뭇가지는 바위 속을 푹하고 파고들었다.
가평이 바위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때로는 가로로 때로는 세로로…….
바위에 박힌 나뭇가지가 그를 따라 움직이며 바위를 할퀴고 지나갔다.
가평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너른 바위를 보았다.
바위에 가로세로 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파여져 있었다. 언뜻 보면 바둑판처럼 보였지만 바둑판은 아닌 듯했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열아홉 줄. 그렇지만 바위에 새겨진 선은 가로세로 열다섯 줄이었다.
잠시 바위를 바라보던 가평은 줄 사이의 사각형 안에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일(一), 이(二), 삼(三)…….
일정한 규칙은 없어 보였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사각형에 숫자를 채워 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백구십육(一百九拾六).
마지막 빈 사각형에 숫자를 적고나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뭔가요?”
“자네 부친에게 갚을 빚일세.”
“예에?”
유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숫자를 순서대로 밟고 바위를 건너면 되네. 단 한 번 밟았던 숫자는 다시 밟지 못하고 선에 발이 닿아서도 안 되네. 횟수는 모두 여섯 번일세. 할 수 있겠는가?”
“…….”
유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어서?
물론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다.
아버지가 이 먼 공동파까지 가서 받아야 할 빚이라기에 나름 굉장히 큰 빚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쉬워도 너무 쉬웠다.
혹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요?”
유심이 잠시 바위에 적힌 숫자들을 보았다. 일부터 백구십육까지 적힌 곳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이내 일이라 쓰인 사각형부터 시작해서 백구십육이라 적힌 사각형까지 모두 밟은 뒤 바위 밖으로 나왔다.
“허허허, 벌써 한 번 건너갔구먼. 이제 다섯 번만 건너면 되겠군. 그래 바로 시작하겠는가? 언제 시작하든 상관없다네.”
‘나 원 참.’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유심이 그대로 반대편으로 돌아가 일이라 적힌 사각형 한복판을 밟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잘된 일이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유심은 무엇보다 사부의 무공을 배우고 싶었다. 처음 이곳을 떠나며 혹시 너무 시간을 잡아먹는 일은 아닐까 걱정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게 다라면 일각도 걸리지 않아 아버지의 심부름을 마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다.
‘일백구십사.’
이제 두 개만 더 밟으면 두 번이 끝난다.
유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이보다 쉬운 심부름은 없었다.
유심이 조금 멀리 떨어진 일백구십오를 밟기 위해 슬쩍 몸을 띄워 올렸다.
휘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선이라도 밟는 것은 아닐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던 유심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돌멩이 하나가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뭇가지 하나 역시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급히 몸을 틀어 돌멩이를 피하며 일백구십오라 적힌 곳을 밟았다.
나뭇가지 하나가 남았지만 그것은 무시하기로 했다. 슬쩍 힘을 주면 그만이다. 운지학의 발길질도 견뎠다. 노인의 무공이 평범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깟 나뭇가지에 맞는다 하더라도 부상을 당하거나 쓰러질 염려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하나만 더 밟으면 되는 일이다.
일백구십육이라 적힌 사각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순간!
나뭇가지가 그의 몸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불에 덴 것 같은 화끈한 열기. 나뭇가지에 찔린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크흑!”
신음이 절로 나오고 몸이 휘청거렸다.
이를 악물었다.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혹시 다른 무엇이 날아드는 것은 아닐까 싶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목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혀마저 굳어 버린 것이다.
나뭇가지가 마혈(麻穴)을 찔렀다는 것을 알았다.
‘젠장!’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을 수도 없었다.
‘뭐야? 아혈(啞穴)마저 짚인 거야?’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마음속으로…….
그저 눈만 말똥말똥 뜬 채 백구십육이라 적힌 곳을 바라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앞으로 가평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선사들이 좌선이나 설법을 할 때 들고 다니는 기다란 지팡이, 주장자(?杖子)가 들려 있었다.
주장자로 유심의 복부 아래쪽을 슬쩍 밀었다. 유심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몸이 선에 닿은 것은 물론이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유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굶어 죽을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그렇게 가만 놔두란 말인가?”
‘어라!’
그러고 보니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가평이 주장자로 자신의 마혈을 풀어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네그려. 지금 바로 다시 시작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결의를 다졌다.
“허허허, 그럼 다시 시작하시게나.”
언제나 그렇듯 가평은 넉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서 아버지가 받으라는 빚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일이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노인의 무공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기는 하지만 사부 관무백은 중원 최강자 중에 한 명인 천무신장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천무신장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 사부를 놔두고 아버지는 왜 노인의 무공을 배우라고 하는 것일까?
유심은 아직까지도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사람이 쾌섬마존―중원사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초절정고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의문은 품지 않았을 테지만 유심은 여전히 가평의 정체를 몰랐다.

슈슈슈슉!
나뭇가지와 돌들이 바위 위를 제멋대로 날았다.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정면으로 날아왔다.
겉으로 보면 얼마든지 그것들을 피하며 발을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심은 서너 걸음도 내딛기 전에 선을 밟거나 되돌아와야만 했다.
너무 빨랐다.
마치 빛이 날아들 듯 돌과 나뭇가지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처음 몇 번은 호기를 부려 다시 나섰지만 이젠 그럴 정도가 아니다. 아무리 단단한 몸을 가진 유심이었지만 잘못해서 돌에 맞기라도 하면 그대로 황천길로 향할 것 같았다.
유심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노인이 날린 돌과 나뭇가지를 피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가평을 보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안한 얼굴로 걸어오더니 일(一)이라 써진 사각형 한복판에 양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평이 일이라 써진 사각형 안에 왜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바꿔서 해보겠나? 만약, 자네가 한 번이라도 나를 맞춘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네.”
“참말이십니까?”
“물론!”
유심의 구겨진 아미가 활짝 펴졌다.
그에게는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다. 그것이라면 아무리 노인의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유심이 조금 전 가평이 있던 곳으로 걸어가 돌과 나뭇가지를 양손 가득 움켜잡았다.
가평은 하나씩 날렸지만 유심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심의 목적은 오직 하나 어떻게든 가평을 맞추고 사부가 있는 성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양손에 잡힌 돌과 나뭇가지를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돌과 나뭇가지들이 가평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평이 유심을 향해 날린 것보다 훨씬 빨랐다.
가평은 내공을 싣지 않았지만 유심은 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살처럼 빠르게 수십 개의 돌과 나뭇가지가 날아들고 있었지만 가평의 표정은 여전했다.

고개를 들었다.
돌이 보였다.
동시에 날렸지만 아무래도 무게가 있는 돌이 나뭇가지보다는 훨씬 빨랐다. 그러나 가평은 은은한 미소만 지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장 빨리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그의 몸에 막 닿으려는 순간.
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똥이 튀며 가평을 향해 날아오던 돌멩이가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은 쇳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날아오던 돌멩이들이 계속해서 부서졌다. 부서진 돌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를 이어 날아든 나뭇가지들 역시 번쩍하는 섬광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
지켜보던 유심이 눈을 부릅떴다.
검신 전체가 검은 빛의 묵검(墨劍).
가평은 오른손에 장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을 언제 뽑아 들었는지 유심은 보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발검(拔劍).
그러나 검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가평이 쥐고 있던 주장자가 바위에 떨어져 있었다.
묵존검(墨尊劍).
일 갑자 이전 사람들이 마검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던 마존의 애병. 사람들은 그것을 묵존검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유심은 묵존검 따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가평은 그를 향해 날아드는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잘라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뭇가지 한복판을 찌르고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평의 움직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빠른 사람은 처음이다.
아니,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빠른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자신이 날린 나뭇가지들은 정확히 반으로 잘린 채 바위에 널려 있었다. 자세히 살폈지만 멀쩡한 나뭇가지는 단 한 개도 없었다. 돌을 부수는 순간에도 가평은 나뭇가지만을 골라 정확히 반으로 잘라낸 것이다. 더구나 그의 발은 어느새 이(二)라고 적힌 사각형 한복판에서 검을 늘어뜨린 채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여전히 평안했다.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는 사이 가평은 느긋하게 움직이며 숫자를 밟아갔다.
어느새 이십칠.
그러나 바위를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아직 많은 숫자들이 남아 있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인간이라면 그렇게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쪽으로는 그래도 성공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다시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움켜잡았다. 조금 전에는 오른손에 돌, 왼손에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지만 이번에는 섞어서 잡았다.
그것이 가평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십팔을 향해 발을 내딛는 가평이 보였다.
한 발이 허공에 뜬 상태라면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게 마련. 기회였다.
슈슈슉!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나무와 돌이 섞여 날아가는 모습이 조금 전보다는 훨씬 복잡해 보였다.
카강―캉!
묵존검이 다시 움직였다.
가평에게 날아들던 돌과 나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돌과 나뭇가지를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듯 돌과 나뭇가지들이 이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숫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늘고 있었다.
비로소 유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가평이 잠깐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묵존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순간.
하나였던 묵존검이 수십 개로 갈라지며 날아드는 돌들을 막아냄과 동시에 나뭇가지들을 베어냈다. 묵존검에 닿은 나뭇가지와 돌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을 수십 개로 보이게 하는 검법은 중원에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수십 개의 검영(劍影)을 보이는 중원의 일반적인 초식은 검영 가운데 하나만이 진검이다. 나머지는 모두 환영에 불과하다. 결국 그것을 파악할 정도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방금 가평이 보인 것은 그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환상처럼 보이는 검영에 부딪친 돌과 나뭇가지들 모두 부서지고 잘려 나갔다. 수십 개, 검영 모두가 진검이라는 뜻이다.
검이 갈라질 수는 없다. 결국 한 번 검을 뻗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검을 수십 번 움직인 것이다.
당황한 유심이 다시 나뭇가지와 돌을 들고 가평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가평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쾌섬마존.
그는 암기의 고수들과도 많은 싸움을 벌였었다.
그중에는 사천당가 사람들도 있었다. 덕분에 그는 당시 암기술로는 중원제일이라는 당가 가주, 당진의 만천화우도 겪어보았다. 그런 가평에게 암기술의 암자도 익히지 못한 유심의 돌팔매질 정도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