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단칼 1(23화)
6. 마존(魔尊)의 무공, 쾌섬(快閃)을 익히다(4)


슈칵!
묵존검이 움직일 때마다 그를 향해 날아든 돌과 나무는 힘없이 부서지고 잘려 나갔다.
묵존검의 그림자가 이내 하늘을 뒤덮었다.
여유 있게 날아드는 돌과 나뭇가지를 쳐 내고 찌르며 가평은 다음 숫자를 사뿐사뿐 밟아 나갔다.
“허허허허허!”
가평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어느새 백구십육이라 적힌 사각형 위를 밟고 있었다.
“어떤가? ‘빛을 쏘아 혼을 빼앗는다.’는 사광탈혼이라는 놈인데 쓸 만한가?”
“…….”
유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 하늘을 가득 채웠던 검영, 그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빨리 검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잠시 넋을 잃은 표정을 짓던 유심이 인기척을 느끼고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가평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심이 그를 향해 큰절을 한 번 올렸다.
그것은 가평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그의 무공을 배우겠다는 뜻이었다.
예의가 아니다. 가평에게 무공을 배우기로 했다면 가평은 사부가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구배지례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 큰절을 올렸을 뿐이다.
당연히 호통을 쳐야 했다. 그러나 가평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허허허, 내 평생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관무백 그 사람이 부럽네그려.”
“저어…… 그그, 그게…….”
유심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를 나무라는 말이 아닐세. 그저 자네 같은 사람을 먼저 얻은 천무신장, 그 사람이 부러워서 한 말일 뿐이니 게의치 말게. 허허허허!”
가평의 웃음소리가 유심의 가슴 한쪽을 찔렀다.
평소와 다름없는 넉넉한 웃음. 그러나 그 웃음에서 유심은 아버지 장연걸의 모습을 떠올렸다.
쓸쓸함.
자신을 향해 웃음을 터트리는 아버지의 웃음에는 언제나 쓸쓸함이 깃들여 있었다. 지금 가평의 웃음에도 그것이 있었다.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 사부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유심이 다시 큰절을 올리기 위해 양손을 모았다.
순간, 가평이 슬쩍 공력을 끌어올렸다. 숙여지던 유심의 몸이 일순 멈췄다. 조금 더 힘을 주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비록 늙었지만 동정을 받을 만큼은 아닐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것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죄송합니다. 어르신.”
대답과 동시에 일이라 써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매에서 아버지가 준 단도를 빼 들었다.
“준비 됐습니다.”
슈슉!
나뭇가지와 돌멩이 하나가 유심을 향해 날아들었다.



7. 공동파를 찾아온 불청객(1)


캉!
날아든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간단히 쳐 내고 다음번 숫자 이(二)에 발을 디뎠다. 다시 발을 움직이려는 순간 다시 돌과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다. 유심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돌을 향해 단도를 찔렀다. 그의 한 발이 삼이 적힌 곳을 찍었다.
고개를 돌려 다음 숫자 사를 찾았다.
약 일 장여 밖에 사(四)라는 숫자가 있었다.
삼을 찍은 발을 힘껏 내디디며 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늦게 날아든 나뭇가지를 쳐 내며 몸을 띄워 올렸다.
쌔액!
다시 돌멩이와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동공을 펼치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으로 인해 움츠러들었던 몸이 사르르 풀렸다.
‘괜찮은데.’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자신이 동공을 익혔다는 것은 잊고 있었다.
양발로 숫자를 찍음과 동시에 바로 옆에 다음 숫자 오(五)가 보였다. 그저 한 발을 들어 슬쩍 옆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왼발로 오를 찍음과 동시에 날아드는 돌과 나무를 간단히 해치웠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육이 보이지 않았다.
‘전방에 없다면?’
급히 몸을 돌렸다.
육이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돌멩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그의 등에 틀어박혔다.
퍽!
유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공을 펼치며 움직였기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공동파에 들어와 가평에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지 삼 년.
두 번을 건넜다.
그것은 쾌섬 일식 사광탈혼과 이식 쾌검비천(快檢飛天)을 이미 익혔고 쾌섬의 마지막 초식 섬전무인(閃電無人)을 익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가평이 한 번 더 건너게 한 것은 그가 직접 유심을 상대해 그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일 뿐 초식을 익히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지만 유심은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오까지밖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땅바닥에 편안히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숫자가 가득 적힌 바위가 들어 있었다.
일부터 백구십육까지 숫자의 위치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어떻게 움직일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동안의 움직임으로는 날아드는 돌과 나뭇가지를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날아드는 돌과 나뭇가지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수십 개의 돌과 나뭇가지가 온몸으로 날아들었다.
발을 움직임과 동시에 그것들을 쳐 내거나 피해야 한다. 더구나 나뭇가지와 돌멩이는 날아오는 속도가 모두 달랐다. 그것들을 모두 염두에 둔 채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를 향해 날아드는 돌멩이와 나뭇가지는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쾌섬마존 섭가평은 유심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봐, 가평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도착했는지 옆에 무허자가 있었다.
“저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턱으로 유심을 가리켰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양일세.”
“제기랄. 무공에 무 자도 모르던 녀석도 삼 년 만에 알게 되었는데 십 년 넘게 무공을 익혔다는 새끼가 머리에 똥만 찼는지 미친년 널뛰듯 도망만 다니고 있으니 이거야 원.”
무허자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씰룩거렸다.
유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청수가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울화가 치밀었다.
“내 이번에는 청수 놈 대갈통을 박살내던지, 내가 피를 토하고 뒈지던지 양단간에 결정을 보아야겠네.”
휘익!
무허자가 급히 몸을 돌렸다.
“이보게 공연히 심통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알려주시게. 청수라면 충분히 무허육합신공을 익히고도 남을 사람일세.”
“됐거든. 내 자식 죽이든 말든 자네가 뭔 상관이야!”
무허자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청수가 있는 공동파를 향해 미친듯 달려갔다.
“허허, 저 사람 저거.”
가평이 헛웃음을 토했다.
청수의 머리통이 박살날 것 같았지만 가평은 눈곱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비록 호되게 당하기는 하겠지만 청수의 머리통이 날아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눈길을 돌렸다. 바위에 주저앉아 눈을 감은 지 벌써 한 시진이 흘렀지만 유심은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평이 말한 대로 유심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나의 숫자에서 다음 숫자로 몸을 움직이는 것들을 모두 하나로 엮는 거대한 그림.
유심이 그리는 그림은 무(武)가 아니라 무(舞)였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유심은 머릿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 그렇게 날아다녔다. 비록 그 무대는 좁디좁은 바위 위였지만 유심에게 그곳은 거대한 창공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한 시진이 흘렀다.
사방은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오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의 움직임은 완벽히 그려놓았다. 이제 직접 부딪쳐서 해결할 일만 남았다.
“어르신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좋지.”
쌔액!
다시 한 번 돌멩이와 나뭇가지가 바람을 갈랐다.
일에서 이, 이에서 삼, 삼에서 사…….
거칠 것이 없었다.
신나는 춤사위.
모든 것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한 발로 찍고 몸을 뽑아 올리고 양발로 바위를 디딘 채 몸을 돌려 다음 숫자에 까치발로 크게 원을 그리고 이내 다음번 숫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 유심은 벌써 삼십사라 적혀 있는 곳을 밟고 삼십오라 적힌 곳을 향하고 있었다.
몸을 트는 순간, 그의 측면으로 돌멩이가 날아왔다. 손을 그대로 뻗어 돌멩이를 박살낸 후 삼십오를 밟았다. 그리고 지체 없이 삼십육을 향했다.
나뭇가지 하나가 그의 정강이를 향했다.
그대로 몸을 띄워 올려 나뭇가지를 발 아래로 흘려보냈다.
슈슈슈슉!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돌멩이와 나뭇가지 십여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휘익!
단도를 휘둘러 그것들을 쳐냈다.
“……!”
유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느새 돌멩이 하나가 코앞에 이른 것이다.
급히 허리를 숙였다. 단도를 미처 회수하지 못한 유심이 취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머리카락을 스치며 돌멩이가 지나갔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허리를 숙이는 일은 그의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다음 숫자를 밟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일으켜야 했다.
급히 상체를 세우는 순간 나뭇가지가 그의 배를 찔렀다.
실패였지만 불만은 없었다.
유심은 미소까지 지으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조금 전 모습을 떠올렸다.
정강이를 향해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 위해 뛰어오른 것이 잘못이었다. 한 발만 살짝 들어 올려 피해야 했다. 그렇게 조금 전 모습을 생각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나갔다.
“허허, 오늘은 이만 끝내야 할 것 같네그려.”
가평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 * *

헉헉헉!
공동파 제자, 청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전면을 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가만히 서 있는데도 연신 흔들리는 몸뚱이. 오늘도 한잔 걸친 듯싶은 노인 한 명이 오만상을 쓰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인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사백조가 되는 공동파 태상장로 무허자였다.
“대가리가 불량이면 독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냐. 공동파 앞날이 훤하다. 훤해!”
무허자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녁.
모든 제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간 기식정에서 마지막 정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금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하나 남은 그릇을 깨끗이 닦고 찬장에 올려놓는 순간, 젓가락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악몽은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젓가락을 피하기 위해 미친듯 몸을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실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수는커녕 오늘은 그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젓가락을 날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죽이세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평소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명문대파 공동파에서 사백조가 되는 문파의 어른에게 고함을 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청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식정에서 들어와 젓가락을 날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오냐, 죽여주마!”
슈슉!
젓가락 두 개가 다시 날아들었다.
“헉!”
외마디를 토하며 황급히 몸을 틀어 젓가락을 피하고는 급히 문을 향해 달렸다. 젓가락 공격은 기식정 내로 한정된다. 그것은 무허자와 청수 사이의 묵계였다.
쌔액!
등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청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있는 대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청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아든 젓가락은 그의 명문혈을 정확히 찔렀다. 화끈한 열기가 순식간에 등 전체로 번졌다. 문과 남은 거리는 불과 이 장.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도 서너 걸음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거리. 청수 실력이면 한 발만 살짝 내디디면 되는 거리에 불과했다.
이를 악물며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양손을 힘껏 앞으로 내뻗었다.
‘쾅’하는 굉음과 박살난 문밖으로 청수가 뒹굴었다.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냈다.
“이이, 이런 젠장.”
무허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대로 청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여전히 등 전체를 뒤덮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무허자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지 십여 년. 그동안 자신의 발로 문 밖으로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백조님. 오늘은 제가 이겼습니다. 그럼 이만!”
청수가 무허자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청수를 지켜보던 무허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조금 전 기식정에서 보였던 청수의 모습은 그동안 보아 왔던 모습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정작 당사자인 청수는 모르고 있었지만 어느새 청수는 무허육합신공의 오의를 조금씩 깨닫고 있는 듯 보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명문혈에 젓가락이 꽂히는 순간,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운석에게나 한 번 가볼까.”
이제 청수를 자신의 기명제자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청수를 제자로 받겠다고 하면 가장 반길 사람은 공동파다. 당장 청수를 데려가도 문제를 제기할 공동파 제자는 없다. 그러나 제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 장문인 운석 진인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