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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5화)
2. 친절. 꿈, 희망(4)


“제가… 그때까지 있어도 될까요?”
마음 같아서는 이 친절을 넙죽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 행복이 믿기지 않아 잘못했다가는 마치 꿈에서 깨듯 이 행복이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안 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하니 다들 좋아하면서 다음 축제에 데려오라던 걸. 그러니 그때까지는 우리 집에서 편히 쉬렴.”
“감사합니다!”
남자의 그 말에 시동은 아주 오랜만에 본래 어린아이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행복이 그를 찾아왔고,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었다.
“집안일하느라 힘들었지? 곧 식사 가져다줄 테니 그거 먹고 편히 쉬렴.”
“네!”
그런데 방을 나서던 남자는 잠시 멈추더니 살짝 불안한 듯한 음성으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런데 혹시 내 방 옷장도 청소했니?”
“아뇨.”
그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자기도 의아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이라는 듯 그럴듯한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옷장 정리는 못했는데 해드려요?”
그러나 어쨌든 그 선택은 옳았다. 살짝 불안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편안하게 돌아왔다.
“아니다. 옷장 정리는 안 해도 돼. 좀 부끄럽거든.”
그는 빨래하는 걸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잊지 않고 등에 맸던 네체른의 서를 풀어 다시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가 베개 밑에서 손을 빼는 순간, 갑자기 문이 다시 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말 안했구나. 이제부터 같이 살 건데 이름 정도는 서로 알아야 하겠지?”
“아… 예, 그렇네요.”
그의 가슴은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갑자기 다시 열린 문소리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그가 한 말 때문이었다.
사실 그에겐 이름이 없었다. 노예시장에서는 그가 갇힌 철창 번호인 14번으로 불렸고, 베테르의 시동으로 일할 때도 굳이 이름으로 불릴 일도 없었다.
야, 너 혹은 거리를 떠도는 욕설들이 그의 이름이었다.
“나는 헨슨이야. 너는?”
“저는…….”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자신이 들었던 다른 이의 이름들 중 하나라도 떠올리려 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끄는 것도 우스웠다. 대체 누가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겠는가.
“네, 네른이에요.”
처음으로 가지는 이름을 하필 마왕의 이름에서 따다니. 그 스스로도 후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당황하면 그나마 제일 입에 익은 단어가 나오게 마련이었다.
“아, 네른이었구나. 기억해 둘게.”
그, 아니, 네른에게 그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지금 막 만들어 낸 이름. 저주받은 마왕의 이름에서 딴 그것이 타인에 의해 불려졌다.
처음으로 가진 이름, 그리고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려진 순간. 그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3. 괴식절(怪食節)(1)


“여어 네른! 또 산에 가나?”
“아, 타이커스 아저씨. 안녕하세요?”
시동, 아니, 네른은 이후 몇 달 동안 이 마을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이미 푸른빛에 대한 기억은 옅어져 있었고, 죽음의 공포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샨. 셰알이 있었던 텐쿠스 지역과는 거의 정반대 편에 위치한 테사르 지역 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먹을거리조차 넉넉하지 않은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사람들은 네른에게 친절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타이커스 또한 그를 볼 때마다 늘 조금씩이라도 간식거리를 챙겨 줄 만큼 그를 아껴 주었다.
“네. 약초를 캐야죠.”
네른은 등에 맨 가방을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마을에 머물기로 한 다음 날 헨슨이 그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매일 부지런도 하구나. 헨슨 말을 들으면 청소에 집안일까지 거의 도맡아 한다면서.”
“신세지는 입장에서 놀 수만은 없잖아요.”
“허허. 니가 우리 집에 왔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 집도 마누라가 친정을 가서 엉망이거든. 거기다 약초까지 구분할 줄 알다니. 넌 정말 보배구나.”
“…….”
네른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베테르의 시중을 들다 보면 싫어도 어느 정도의 약초와 독초는 구분할 줄 알아야 했다.
그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했고, 가르쳐준 적도 없으면서 틀리면 가혹한 채찍질을 해 댔다.
하지만 그가 약초를 캐는 것은 단순히 약초를 구분할 줄 알아 그걸로 헨슨에게 뭔가 도움이 되려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근데 벌써 가방이 낡았구나. 하긴 매일 매고 다니니까.”
“아, 네. 그렇죠.”
바로 네체른의 서를 의심 없이 언제나 가지고 다니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배게 밑에 숨겨 놓는다 쳐도 언제까지 침실에만 있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내놓은 채 들고 다닐 수도 없었다.
허나 약초를 캐러 다닌다는 이유라면 늘 가방을 매고 있어도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고, 그 가방 속에 네체른의 서를 숨기면 되는 거였다.
“아, 내일부터 축제인데 너도 올 거지?”
“그럼요! 저도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는 걸요.”
“그래. 기대할 만하지.”
타이커스는 품 안에서 작은 육포 조각을 꺼내 네른에게 건넸다.
“자, 이거 먹으렴.”
“감사합니다.”
타이커스와 헤어진 네른은 육포를 입으로 가져갔다.
“으! 짜다!”
첫날 먹었던 고기와 마찬가지로 육포는 이상할 정도로 짰다.
“이 마을은 원래 다 이렇게 고기를 짜게 먹는 건가?”
네른은 그 짠맛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몇 번 씹지 않은 채 육포 조각을 그냥 넘겨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뱉어 버리고 싶었지만, 고기가 귀한 이 마을에서 육포를 나눠 준 타이커스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아, 그럼 가 볼까?”
네른은 천천히 산을 올랐다. 산이라고는 해도 처음 그가 내려왔던 산에 비한다면 작은 언덕이었지만 말이다.

“왔니?”
“네. 다녀왔어요.”
해가 서쪽으로 다 져 갈 때쯤이 되서 네른은 집으로 돌아왔다.
“좀 늦었구나. 힘들진 않았니?”
그렇게 묻는 헨슨을 향해 네른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짠!”
그가 앞으로 내민 두 손에는 약초가 가득 쥐어져 있었다.
“대단하구나! 지금까지 중 제일 많잖아.”
“헤헤.”
사실 그가 캐 오는 약초가 희귀하거나 고가에 판매되는 그런 건 아니었다. 특별히 엄청난 효능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꼭 희귀하고 비싼 약초가 잘 팔리는 것은 아니다. 상품의 가치는 결국 수요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
설사 지상 최고의 약초나 지상 최강의 검, 최고가의 보석이라 해도 사용할 자가 없다면 쓰레기와 다름없는 법이었다.
네른이 캐 오는 약초는 각종 상처나 소화불량에 흔히 처방되는, 생활에 꼭 필요한 약초들이다.
이러한 시골 마을에서 어쩌면 비싸고 희귀한 약초들 보다 훨씬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네른, 네가 온 덕분에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구나.”
“아뇨. 별거 아닌데요 뭐. 신세지는 입장에서 당연히…….”
“아니, 단지 약초나 집안일을 해 줘서가 아니야.”
헨슨은 네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올려놓았다.
“아내랑 아들이 간 뒤로 나도 많이 외로웠거든. 좁은 집인데도 그 빈자리가 왜 그렇게 큰지.”
“…….”
네른은 자기 어깨를 감싸는 그 온기에 가슴까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가족의 온기였다.
“아주머니와 아들은 언제쯤 오실까요?”
“글쎄.”
헨슨의 얼굴에 쓸쓸함이 스쳤다. 그 표정. 지난 몇 달간 그 표정 때문에 네른은 몇 번이나 의문을 물렀었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무르고 싶지 않았다.
“…….”
그런 그의 마음을 헨슨도 눈치챈 것일까. 잠시 침묵하던 헨슨이 입을 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너도 봤듯이 지금 우리 마을에 노인이나, 여자, 어린아이는 아무도 없단다.”
맞는 말이었다. 헨슨뿐만이 아니라 마을 모든 집에 아내와 자식, 그리고 노부모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났다고 했다.
지금 이 마을에 남아 있는 이들은 모두 서른 중후반쯤 되는 남자들 뿐이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지면 여자들은 아이와 노인들을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간단다. 산을 두 개를 넘고 몇 개나 되는 초원과 평원을 넘지. 그래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어.”
“…….”
네른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몇몇 마을에서는 흉년이 들면 노인을 버리기도 하고, 땅을 지킬 남자들을 놔두고 여성과 아이들은 살기 위해 떠나기도 한다고.
“자아, 우중충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배고프지? 식사나 하자.”
네른은 그제야 가족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헨슨의 얼굴에 그런 쓸쓸함이 감돌았는지 알 수 있었다.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함. 바로 그것들 때문이었다.
“자아, 먹자.”
헨슨이 내놓은 것은 묽은 콘스프였다.
“이것밖에 못 줘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하죠.”
벌써 2주가 넘게 콘스프나 말라비틀어져 가는 빵만 먹고 있었지만 네른은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음식의 종류나 양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된 식사. 그것만으로도 네른은 지난 한 달 동안 먹은 초라한 식사들이, 베테르 밑에서 시동을 들며 가끔 얻어먹을 수 있었던 산해진미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아, 내일 축제 날인 거 알지?”
“그럼요.”
“내일은 약초를 캐러 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렴.”
스프뿐이다 보니 식사는 아주 빨리 끝났다.
하지만 네른은 허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지난 삶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해져 있었고 행복했다.
그런데 식사를 끝낸 헨슨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외투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응. 너는 들어가서 쉬렴. 난 이제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금부터 내일 축제 준비를 해야겠구나.”
“지금부터요?”
이미 해가 지고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응. 원래 우리 마을에서 축제 준비는 밤에 하거든.”
“그럼 저도…….”
네른은 헨슨을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헨슨은 그를 말렸다.
“아니다. 넌 쉬도록 해.”
“하지만…….”
“원래 축제 준비는 아이가 하는 게 아니야.”
헨슨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네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늦을 테니 먼저 자렴.”
헨슨이 나가고, 네른은 접시 두 개밖에 없는 식탁을 정리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축제라…….”
네른은 가방을 끌러 놓고 침대에 누웠다. 축제 준비에 고생할 다른 사람들과 헨슨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이제 달이 지고 새로운 해가 뜨고, 다시 그 해가 진다면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축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