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네체른의 서 1(7화)
3. 괴식절(怪食節)(3)


“우, 우욱!”
이미 소화가 된 지 오래였지만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베테르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끔찍한 장면을 다 본 그였지만 사람 고기를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헨슨과 타이커스는 그런 네른이 재밌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제 의식을 치를 시간이 되었는지 누군가 검은색 로브로 몸을 가린 한 명이 단도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 맞다.”
그런데 헨슨은 갑자기 네른 돌아보며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걸 깜박했네. 고마워. 니가 왔던 저번 달 그날. 그날이 바로 마을 마지막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날이었거든. 우리도 이번 달 제물로 쓸 사람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네가 와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
네른은 헛구역질을 멈추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 번도 타인을 믿어 본 적이 없었기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는 물론이고,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우리 모두 신을 찬양합시다. 엘하임 펜릴.”
“엘하임 펜릴! 엘하임 펜릴!”
제사관의 선창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펜릴의 이름을 제창했다.
배덕이란 마수에게 홀린 듯 그들의 눈동자는 광기와 일그러진 식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노시스, 이데소피아.”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 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을 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네른의 입에서도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림자에 갇혀진 생명아.”
그것은 처음 그가 오우거에게 사용했던 주문이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의 입과 몸은 습관적으로 살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 욕망을 해방하라.”
그러나 역시 기적은 한 번뿐이었을까. 아니면 책을 펼쳐야 했던 걸까. 오우거 때와는 달리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럼 제물을 바칩시다!”
“와아아!”
제사관은 단도를 높이 쳐들고는 네른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곤 곧바로 그 단도를 네른에 어깨에 꽂아 넣었다.
“아악!”
네른의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네른은 순간 제사관과 눈이 마주쳤다. 그 또한 네른을 잘 챙겨 주었던 과일 가게의 빈스였다.
“제물의 비명은 그분의 부활을 비는 기도가 될 것이고, 그 피와 살은 그분의 양식이 될 것이다.”
제사장은 다시 단도를 빼서는 이번엔 네른의 다리에 꽂았다. 한번에 죽일 마음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사관 또한 몇 번이나 되는 의식 속에서 살을 찢고 생명을 거두는 검은 쾌락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봐, 빈스! 배고프다고!”
“그래 장난은 그만 치고 끝내 버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제사관을 재촉했고 그 잔인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아… 아……!”
네른은 극심한 고통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피를 너무 흘려서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멀어져 가는 의식과 옅어지는 현실감 속에서 그는 이것이 꿈이길 바랐다.
“……!”
그런데 제사관의 단도가 다시 그의 반대편 다리를 찔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네른은 그 강렬한 고통에 뿌옇던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악몽이라니… 그래 말도 안 되지…….”
노예시장, 베테르의 실험실, 셰알 요새. 그가 있었던 곳은 어느 곳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지옥이었다.
갓난아이 때 노예 상인에게 팔려서 흑마법사의 시동이 되고, 이제는 저주 때문에 금서 네체른의 서에 묶여선 전 세계의 공적이 되어 버렸다.
그에겐 악몽이 바로 현실이요, 지옥이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곳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행복들이 꿈이었고 바로 지금 자신은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루키페르. 아바돈, 지제르 지제르…….”
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주문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주문. 절대 읽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것이었다.
“키로마락!”
네른이 가만히 뭔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며 제사관이 다시 칼을 꽂아 넣었다.
비명을 듣고 싶은 듯 꽂은 채 그 손잡이를 살짝 비틀기까지 했다.
“하늘에 떠오른 검은 별을 보아라.”
하지만 네른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눈앞에 주문이 펼쳐져 있듯, 단 한 번 읽었을 뿐인 그 주문을 그대로 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묻어 버린 본능을 깨우쳐라. 생명이 끝내 다다를 곳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 죽음이 아니던가.”
“이, 이놈 뭘 하는 거야?”
미동도 하지 않고 뭔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네른의 모습에 제사관은 자기도 모르게 단도를 놓고 뒤로 물러서 버렸다.
그리고 그가 물러섬과 동시에 네른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두려움에 눈을 피했던 그 실체를 마주 보라! 더 이상 외면할 필요 없다! 내 너희를 구원해 주마!”
“……!”
제사관은 자신을 바라보는 네른의 눈에 그 자리에 얼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네른의 두 눈은 마치 구멍이 뚫린 듯한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빈스! 지금 뭐하는 거야!”
멍하니 있는 제사관의 모습에 타이커스가 뛰어나왔다.
“……!”
하지만 그 또한 검게 변해 버린 네른의 눈을 보고는 그 자리에 얼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도망칠 필요 없다. 외면할 필요도 없다. 내 너희를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마. 너희가 따라야 할 것은 신도 악마도 아니다.”
어느새 피는 멎었고 상처도 사라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렸던 피는 다시 기둥을 타고 올라와 그가 매고 있는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산에서 오우거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새벽 명성(冥星)의 가르침을 들으라. 저승을 밝히는 그 단 하나의 진리를!”
순간 별들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어둠이 밤하늘을 덮쳤다.
푸른 늑대가 갇혔다는 푸른 달조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당황하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마치 발이 땅에 붙어 버린듯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었다.
“모든 것은 죽음을 향한다!”
그 말과 동시에 이곳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몸이 마치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
네른의 눈동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제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한 번의 눈짓에 사제관의 몸이 마치 누가 끌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어떤 사전 동작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뽑아라.”
네른의 말에 사제관은 네른의 어깨에 박혀 있는 단도를 뽑았다.
단도를 뽑자 거기에는 피는커녕 긁힌 상처조차 나 있지 않았다.
“풀어라.”
사제관은 단도를 이용해 그를 묶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 풀려난 네른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다시 별과 달이 돌아와 있었다.
“……축제구나. 그래 피의 축제야.”
그는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그 속에서 네체른의 서를 꺼내 펼쳤다.
“아, 그래.”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던 그는 어느 부분에서 손을 멈췄다. 그리곤 눈앞에 있는 제사관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재키루 샤키루 타오르는 불길아 한 송이 꽃을 피워라.”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네른의 눈짓에 제사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를 자신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피가 튀며 제사관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네른은 개의치 않고 그런 제사관에게로 다가가 가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를 손에 묻혔다.
“재키루 샤키루 타오르는 불길아 한 송이 꽃을 피워라.”
손에 묻은 피가 사라지면서 허공에 거대한 한 송이 불꽃이 피어났다.
“호오! 이런 거란 말이지?”
네른은 불꽃을 저 끝으로 던져 버리고는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좋아.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라면 그 지옥에 맞게 살아남아 주마.”
그의 손짓에 또다시 한 명이 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 이번에는 뭘 해 볼까?”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지만 네른은 여전히 또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주변엔 그을음과 얼음 조각, 삐죽삐죽 솟아난 바위 같은 것들이 부자연스럽게 널려 있었다.
“음? 말라 버렸나?”
네른이 손을 가져다 댄 시체에서는 이미 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네른은 넘어져 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을 향해 다시 손짓을 했다. 이미 그 앞에는 몇 구나 되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죽어라.”
무감정한 그 한마디에 불려 나온 남자는 자신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럼 이번엔 이렇게 해 볼까?”
네른은 아직 피가 나오고 있는 시체에 손을 가져다댔다.
“타나토스, 뉵스, 로키, 아누비스, 이그, 로이고르, 엔주, 세트…….”
주문을 시작하자, 네른의 눈이 다시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흘러나왔던 피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갔고, 목에 난 상처를 통해 마치 펌프질을 한 듯 피들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에 닿을 리 없는 목소리. 교차한 검. 보랏빛에 물든 밤하늘. 허무가 나를 안을 때 네 눈이 바라본 곳은 어디였던가.”
주문을 이어 갈수록 시체가 급속도로 말라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너와 세상을 나눈다. 나무 위에 까마귀가 울면 네 그림자에서 찾아올 것이다. 차가운 손을 가진 백색 사신이!”
주문이 끝나고 땅에서 백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과연. 위력에 따라 더 많은 피가 필요한가 보군.”
그러나 네른은 그 백색 안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눈앞에 시체를 살필 뿐이었다. 시체는 마치 미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근데 난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백색 사신은 자신이 조금 전 쓴 새벽 명성 집회에 비한다면 두어 단계 낮은 주문이었지만, 성인 남성 한 명의 피 전부를 사용하고 나서야 발동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일까. 거기다 그는 피를 뺏기기는커녕 오히려 상처가 나았고 몸 상태도 더 좋아졌다.
“……뭐 좋아. 이걸로 발동 방법을 알아냈으니 그걸로 충분해.”
네른은 손을 뻗어 백색 안개를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안개는 수풀 사이를 헤집었고, 안개가 걷혔을 때는 무성했던 수풀 대신 황무지만이 남아 있었다.
“어이, 헨슨!”
네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헨슨을 불렀다.
“…….”
자기가 부르기는 했지만 갑자기 다가온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네른은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친절, 처음으로 느꼈던 행복, 짧지만 깊었던 그 추억들이 눈앞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