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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9화)
4. 파장(2)
“저승, 저승 등대…….”
손이 가는 대로 펼쳐 외웠던 주문이었기에 다시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한참을 책장을 넘기던 그는 겨우 그 페이지를 찾아냈다.
“여기 있군. 저승 등대.”
저승 등대.
신화에 보면 저승 가장자리에 거대한 등대가 있다고 한다. 저승에 머무는 자들에게 현세를 비추어 주는 거대한 등대.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려는 저승신의 안배. 이 주문은 네체른이 바로 그 신화에서 착안하여 만든 것이었다.
다만 망자를 달래 주려는 신의 자비 따위가 아니라 망자들을 현혹하는 미련의 불길을 밝히는, 저승의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악귀를 현세로 끌어오는 거짓의 등대를. 그리고 그렇게 불려 온 악귀는…….
“생명을 먹어 치우고, 스스로가 저승의 문이 되어 후엔 더 많은 악귀를 불러온다……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악령의 군대. 과연 마왕 네체른이 생각해 낼 만한 주문이었다.
“모두 이리로 와라.”
철그덕, 철그덕.
그 한마디에 지금껏 요지부동이던 그들이 네른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철그덕거리는 그 쇠사슬 소리는 마치 죄인을 끄는 사형수의 그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단 명령은 듣는 것 같군.”
네른은 그제야 들고 있던 돌멩이를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에, 에취!”
긴장이 풀리자 지금껏 못 느끼던 한기가 그를 덮쳤다.
“그러고 보니 뺏어 입기는커녕, 아예 사람이 없구나.”
그는 손짓으로 그들을 따라오게 하고는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네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헨슨을 따라왔을 뿐이라 해도 길 찾아가는 거야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마을까지의 거리였다. 그는 아까 저쪽에 벗어 놨던 자신의 옷을 다시 바라보았다.
“다시 입을까……?”
하지만 네른은 이내 다시 몸을 돌렸다. 벗어 던질 때는 몰랐지만 하필 거기 진흙탕이라도 있었는지 옷은 물기를 빨아들여 더 더러워지고 축축해져 있었다.
* * *
마법 대국 아프로스.
그것은 그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실상은 대륙의 변방에 붙어 있는 도시 국가였다.
그러나 비록 나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작은 소도시에 불과했지만 이곳에는 대륙의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제국의 황제들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한 가지가 존재했다.
바로 마도왕 하룬.
전설의 대현자 세한, 칠흑의 마녀 카라, 그리고 마왕 네체른과도 비견될 정도로 막대한 마력과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그는 대륙을 움직이는 몇 안 되는 강자들 중 한 명이다.
세간의 풍문을 빌리자면 그의 손짓 하나에 밤하늘 별들이 춤추고 그의 분노에 나라 하나가 날아간다고 하니.
설사 그것이 과장이 더해지는 세간의 풍문이라 해도 그의 존재가 가지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알 수 있으리라.
“음…….”
그리고 바로 그 하룬이 있는 마도궁 현자의 탑, 이곳에는 지금 어젯밤 푸른 달빛 아래 일어났던 일 때문에 무거운 침묵이 깔리고 있었다.
“폐하. 어젯밤 있었던 괴사는 결코 심상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는 분명 푸른 보름달이 뜨는 괴월. 그런데 모두 보셨듯 어제 달은 불길한 푸른빛을 잠시 띠다 곧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분명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역시나 마도 왕국답게 대신들 또한 대부분이 마도사를 상징하는 푸른 로브를 차려입고 있었다.
“과인도 알고 있소.”
하룬. 분명 7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30대와도 같았다.
그것이 마법으로 모습을 변화시킨 건지 초월자가 가지게 되는 기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옆에 앉은 그의 아들이 오히려 그의 아버지 같았다.
“사실 어젯밤, 푸른 달이 그 빛을 잃기 전에 서쪽에서 어떤 마력 변동이 느껴졌었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달빛이 변한 건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야.”
“마력 변동이라니…….”
“그렇다면 어떤 대규모 의식이라도 치러졌다는 것인데, 대체 어떤 의식이 푸른 달의 마력을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푸른 달이 뜨는 날. 펜릴이 토해 낸 저주의 숨결이 달을 가득 채우는 그날은 마법사와 신관들은 되도록이면 마법이나 의식을 피한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로서 그 달의 마력이 어떠한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서를 보면 푸른 달이 뜬 날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 소환 의식을 치르던 정령사 앞에 펜릴의 정신체 중 일부가 나타나 정령사뿐만 아니라 그 마을 하나를 얼려 버린 일도 있었다 하니 웬만큼 시급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법도나 금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베테르조차 푸른 달이 뜨면 두려워했으니 할 말은 다한 것이다.
“내 생각이 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한 사교가 자꾸만 떠오르는구려.”
“설마!”
달에 갇힌 늑대를 숭배하는 사교 펜릴. 시간의 흐름과 권력가들의 의지에 의해 이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믿음이 사라졌지만, 그들은 세월의 틈새에 숨어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었다.
“허나 폐하. 그들이 강대한 힘을 지녔던 것은 이백 년 전, 그것도 잠시에 불과합니다. 이미 몇몇 지역에 축제 형태로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 그 사교가 어찌…….”
“이것을 보시오.”
하룬이 허공에 손을 들어 보이자 그의 손가락 끝에 푸른빛이 감돌더니 어떠한 영상이 펼쳐졌다.
“저건……?!”
허공에 떠오르는 영상은 완전히 불타 폐허가 되어 버린 처참한 마을의 풍경이었다.
“얼마 전 센토르 지방의 한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센토르 지방군 중 반이 동원된 큰일이었지만 어째선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의 손이 허공을 한 번 젓자 영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하들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
“이런!”
영상에 나온 것은 반쯤 타 버린 깃발이었는데,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달을 물고 있는 펜릴의 문장이었다.
“짐이 보낸 조사단이 바닥에 묻힌 사체들 사이에서 찾아낸 것이오. 아마도 이 사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라진 게 아닌지도 모르겠소.”
“크흠!”
신하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작해야 사교 집단이 그다지 큰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백 년 전 이 사교는 온 대륙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던 그들의 활동들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급격히 불어나는 신자들과 축제들 때문에 기존 신전들의 원성을 조금 사기는 했지만, 오히려 달밤의 그 축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활력과 서로 간의 우애를 돋아 주었다.
문제는 일반 신자들과의 축제를 눈속임 삼아 그 뒤에서 움직이던 비밀 조직이었다.
자신들을 그림 늑대라 부르는 그들은 실질적인 이 사교의 지도층으로 그들의 목표는 달에 갇혀 있는 펜릴을 지상에 풀어 놓는 것이었다.
단순히 광신적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실제로 그 목표를 한 번 이룰 뻔했다.
역사에서는 지워져 버렸지만, 다노스 제국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던 달의 목걸이와 불사조의 눈물이라 불리는 붉은 수정을 훔쳐 부활의 의식까지 치렀던 그들은 당시 다노스 제국군 최강의 부대인 푸른 번개의 방해만 없었다면 분명 펜릴을 부활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국 그 일로 다노스 제국군은 펜릴을 강제 해산시켰고 은밀하게 그림 늑대를 찾아 척살했다.
“당시 다노스 제국군이 그림 늑대를 끝까지 추격하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급속도로 늘어난 일반 신자들 뒤에서 움직이던 비밀 조직. 살아남아 어딘가에서 때를 기다렸다한들 이상하진 않겠지.”
“폐하. 그럼 진정 이번 일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폐하.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각국에 연락을……!”
그러나 하룬은 손을 들어 신하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이상 괜한 의심은 혼란만 초래할 것이오. 내 센토르 지방을 포함해 일단 조사단들을 파견해 놨으니 일단은 기다려 봅시다.”
“조사단이라니… 설마?!”
하룬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소. 아울즈(Owls)라오.”
* * *
“에취!”
네른은 마을에 도착해 옷을 몇 개나 껴 입었음에도 한기가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른 아침 쌀쌀한 숲의 공기는 맨몸으로 견디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근데 이제 어쩌지?”
“…….”
네른은 텅 비어 버린 마을과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괴생명체들을 보며 막막함을 느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통째로 없애 버린 이상 일은 심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설사 그것이 네체른에 서에 대한 의심까지는 안 간다 하더라도 네른에게 좋을 것은 없었다.
꼬르륵.
“…….”
네른은 배에서 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혼자뿐이긴 했지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눈치 없게 난 소리와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는 민망하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열세 명의 괴생물들을 돌아보더니 멋쩍은 듯 고개를 긁적였다.
“후우.”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 결국 걸음을 부엌 쪽으로 옮겼다.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크고 좋아 보이는 집으로 들어왔지만, 집안 곳곳은 말이 아니었다.
설거지통에 쌓여 있는 식기들과 손이 잘 가는 몇 곳을 제외하고는 수북이 쌓인 먼지, 그리고 아까 열어 봤던 옷장 속은 억지로 쑤셔 넣은 듯한 빨래들로 가득했다.
헨슨의 집보다 훨씬 심했다. 이곳도 벌써 오래 전부터 관리해 줄 이를 잃고 방치된 것이었다.
“우욱!”
네른은 순간 헨슨이 가져다주던 그 짜기 만하던 고기가 떠올라 헛구역질이 나왔다.
“콜록!”
네른은 갑자기 식욕이 사라지는 것 같아 부엌에서, 아니, 아예 집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런 네른을 괴생명체들을 철그덕거리는 쇠사슬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어쨌든 여기 계속 있는 건 위험해. 하지만 대체 어디로 가지?”
자신이 있는 마을의 대략적 위치만 알 뿐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는 그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될지, 또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 리가 만무했다.
“거기다…….”
네른은 자신 뒤에 서 있는 괴생명체들을 돌아보았다. 저런 것들을 달고 다녔다가는 설사 운이 좋아 다음 마을에 도착한다 치더라도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막막함 속에서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어딘가로 가겠다는 의식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발길은 헨슨의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