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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10화)
4. 파장(3)


철그덕, 철그덕.
쇠사슬 소리만이 울리는 조용한 마을 모습은 분명 어제까지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텅 비어 있었던 것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
네른은 헨슨의 집, 자신이 묵었던 방 침대로 가 누웠다.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기가 괴로웠다.
철그덕, 철그덕.
“나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네른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가만히 침대에 누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
그들의 불복종에 네른은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자신을 따라다니긴 했지만, 그의 명령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책에서도 단지 생명을 먹고, 스스로 저승의 문이 된다는 것뿐이지 그것들이 그의 명령을 듣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것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를 따라왔는지도 그로서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마치 당연하듯 명령을 내리는 자신이 갑자기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네른은 다시 몸을 일으켜서는 네체른의 서를 펼쳤다. 그리고는 저승 등대가 적혀 있는 부분을 찾아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분명 그가 보지 못하고 넘긴 뭔가가 있을 것이었다.
“제길.”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곳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생명을 먹고 스스로 저승의 문이 된다는 처음 봤던 그 내용만이 눈앞의 괴생명체들에 대한 설명 전부였다.
“이거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들일지도…….”
그는 재빨리 방에서 나와 부엌칼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위험한 것들을 눈앞에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는 서둘러 불길을 불러내는 주문이 적힌 곳을 펼쳤다.
“……!”
그런데 그가 주문을 발동시키기 위해 칼을 자신의 팔에 꽂으려는 순간, 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
그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누군가 있을 리 없는 마을.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던 네른이었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이 소리는 분명 말발굽 소리였다.
탁.
네른은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 속에서는 두려움이 치솟아 올랐다. 그는 부엌칼을 꼭 쥐고는 창문 옆에 몸을 바짝 붙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가빠 오는 숨소리를 숨기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들이 누구든 그가 있는 곳까지 올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가까워지고 있는 소리에 심장 소리도 함께 커지는 걸 막기 어려웠다.
철그덕, 철그덕.
그런데 그런 네른의 마음 따위는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서 있던 그들이 갑자기 요란한 철그덕 소리를 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어!”
네른은 이 갑작스런 상황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네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갔고 다리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그……!”
몇 번이나 말을 내뱉어 보려 입만 벙긋거리던 네른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문을 나서는 그들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처량하고 허망한 손짓에 불과했다. 지금 네른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심하게도 그들은 밖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네른으로서는 마음 같으면 당장 달려가 그들을 막아서고 싶었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음이 증명된 이상 그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제, 젠장!”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는 그들이 있는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 * *

“마을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검은 망토, 검은 장갑, 검은 가죽 투구 그리고 검은 가면.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린 세 명의 사내는 부복한 채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그런 세 명과는 대조적으로 말을 탄 이십여 명의 사내들은 온몸을 백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백색 장검 손잡이에는 늑대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마을은 아직도 성월이 뜨는 날 축제를 벌이고 펜릴을 찬양하는 우리의 동포다. 제로스 님께서는 꼭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라 하셨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는 부복해 있는 세 명을 향해 손짓을 했다.
“나머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돌아가도록 해라. 저번 이주 때문에 자칫하면 세간의 이목을 끌 수도 있어. 돌아가서 정보 공작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엘하임 펜릴.”
“엘하임 펜릴.”
세 명의 사내들은 그 말을 끝으로 마치 녹아들듯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후, 그들이 떠났음을 확인한 지휘관은 그 얼굴에 피어오르는 경멸 어린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쳇! 밤까마귀 따위가 우리 백랑(白狼)과 함께 공을 나누게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저들의 말대로 마을에 아무도 없다면…….”
“그럴 리가 있나!”
지휘관의 고함에 말을 이으려던 참모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무리 시골 변경이라도 상당수의 인원이 하룻밤 만에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설사 마을을 떠났다 해도 그만한 흔적은 남는 법. 우리가 그 흔적을 찾아내 그들을 데려가면 되는 거다.”
“하지만 죽은 송장에게서도 증언을 듣는다는 밤까마귀의 정보력입니다. 그들이 찾지 못했다면…….”
퍽!
그 순간 참모의 몸이 크게 기울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지휘관의 얼굴에는 조금도 후회나 걱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시끄럽다! 우리 백랑이 그딴 천한 까마귀들보다 못하다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참모는 말에서 떨어질 때 왼팔이 부러진 듯 덜렁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또다시 지휘관을 화나게 할까 서둘러 말에 올랐다.
“가자.”
지휘관이 고삐를 당기자 백마들은 일제히 마을 쪽을 향해 달렸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순백의 질주. 흡사 천상의 군대를 연상케 하는 그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조금 전 지휘관의 도를 넘는 자긍심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후후.”
마을에 거의 도착해 가자 지휘관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일단 먼저 늘 하던 대로 한다!”
“예!”
그와 함께 갑자기 말들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엘하임 펜릴!”
“엘하임 펜릴!”
이제 백색 질주는 조금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속도로 마을 전체를 휘젓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림 늑대 백랑의 특기. 그들은 이 세상에 것이 아닌 듯한 그 백색 질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마음에 경이로움과 경건함을 자아내는 성기사.
목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 속에서도 신자를 불러 모으고 싸우지 않고도 적들을 압도하는 그들은 그림 늑대 중에서 명예를 상징하는 자들이었다.
“…….”
지휘관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백랑의 이 질주가 행해질 때면 언제나 사람들은 넋이 빠진 얼굴로 집에서 나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신, 펜릴의 명예와 신성을 상징하는 자들. 이 백색의 질주야말로 그들의 자랑이며 최상의 기도였다.
“속력을 더 내라!”
지휘관은 다시 한 번 속도를 올리길 명했고 부하들은 그런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보통 기마병이라면 흉내도 내기 힘든 속력으로 벌써 꽤 오래 달렸는데도 그들이나 그들의 백마는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크!”
그러나 단 한 명, 왼팔이 부러진 아까의 그 참모는 이 두 번째 질주만은 따라올 수 없었다.
한 팔뿐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속도를 내 뒤처지지 않던 그였지만 최대 속력으로 달리는 이 두 번째 질주만은 성치 않은 몸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크……!”
그러나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지휘관은 설사 자신이 입힌 부상 때문임에도 부하의 사정 따위 봐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휘관은 벌써 아랑곳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지금까지 열심히 지휘관 옆을 지키던 그였지만, 점점 뒤로 밀리더니 결국 뒤처지게 되었다.
그는 멀어져 가는 지휘관과 대원들을 보며 속도를 한 번 올려 보려 했지만, 그러기엔 응급처치만 겨우 끝낸 왼팔에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
그는 결국 멈춰 서서는 멀어져 가는 이들의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 님. 부관이…….”
부하 중 하나가 그를 염려하듯 지휘관을 향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내버려 둬. 따라오지 못하는 놈은 필요 없다.”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가자!”
지휘관이 다시 한 번 말고삐를 흔들자 그들의 질주는 또 한 번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마치 뻗어 나가는 빛과 같이 그들의 백색 질주로 인기척이라곤 없는 이 마을을 밝혀 갔다.
그런데 그러한 빛 앞을 갑자기 검은 안개가 막아섰다.
철그덕, 철그덕.
“워워!”
지휘관은 저 앞에서 걸어 나오는 수상한 무리의 모습에 고삐를 당겼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순백색의 질주는 멈췄고 지휘관의 얼굴에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스쳤다.
“봐. 아무도 없기는 무슨, 이상한 것들이 저렇게 많이 있잖아?”
애써 허세를 부려 보지만 지휘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머리를 쇠사슬로 동여맨 그 이질적인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분 나쁜 음산함 때문이었다.
철그덕, 철그덕.
그들은 다시 방향을 틀어 백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그리고 소름 끼치는 쇠사슬 소리는 퍼뜨리며.
조금 전 백랑의 질주가 빛이라면 그 행렬은 마치 죽음과도 같았다.
“프, 프리드 님?”
“가만있어.”
점점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그 괴이한 행렬을 보며 백랑 대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차고 있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들의 손은 미약하지만 분명 떨리고 있었다.
“하, 하지만!”
“뭘 두려워하나! 우리는 그림 늑대 중 명예를 상징하는 백랑이다! 두려워할 것 없다!”
지휘관의 고함 소리에 대원들은 자신들을 조여 오는 불안감을 조금은 떨친 듯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 다음 순간 마주하게 된 악의 앞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철컹!
얼굴을 동여맨 쇠사슬들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안에서 드러난 썩어 문드러진 입에서는 저주와 같은 포효성이 터져 나왔다.
구워워어!
그 포효성에 말들은 겁을 먹은 듯 크게 요동쳤고, 이미 검을 뽑아 들어 버린 백랑들은 그런 말들을 진정시키려 곤혹을 치렀다.
“…….”
가장 먼저 안정을 찾은 것은 지휘관이었다. 그는 온몸을 엄습하는 이 악의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느냐, 싸우느냐. 그리고 그는 곧 답을 내렸다.
“망설일 거 뭐있나!”
그의 본능은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는 그림 늑대의 백랑. 그들 신의 위엄과 명예를 상징하는 첫 번째 이빨. 도망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