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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11화)
4. 파장(4)
“전 대원! 저 괴물들을 쓸어 버려라! 우리 신의 이름으로!”
명령이 떨어지자 백랑의 분위기는 변했다.
말들의 요동에 당황하고, 자신들을 덮치는 악의에 압도되었던 대원들이었지만 그 명령 하나에 그들의 흔들리던 눈빛이 잡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백색 검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엘하임 펜릴!”
말고삐가 움직이고 백마의 힘찬 발굽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요란한 발굽 소리는 그들을 덮치던 악의를 쫓아 버렸고, 순백의 질주는 다시 한 번 시작되었다.
“늑대의 송곳니가 피를 취한다!”
그렇게 외치는 지휘관의 백색 검날에 지금까지는 없던 붉은빛이 깃들었다.
그것은 숙련된 검사들이 사용한다는 검기도, 마검사들이 사용하는 마력검도 아니었다.
그것은 펜릴의 성기사들만이 가진 특수한 신성력으로 흔히 핏빛 송곳니라 불리는 것이었다.
검기나 마력검에 비해 그 예리함이나 파괴력은 반도 채 되지 않겠지만, 신성력 특유의 자신과 다른 기운을 파하는 힘만은 다른 신들의 신성력들에 비해서도 거의 배나 뛰어났다.
구워워!
그러나 자신들을 향해 오는 순백의 질주에도, 그 검에 깃드는 파괴적인 신성력에도 괴생물체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히려 더 큰소리로 외치며 순백의 질주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어딜 감히!”
가장 먼저 그들 사이를 파고든 지휘관의 검이 움직이고, 두 개의 흉측한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머리를 잃은 몸과 몸에서 떨어진 머리는 검은 연기로 변해더니 대지로 스며들었다.
마치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듯.
쿠어!
그러나 지휘관은 그런 작은 승리에 도취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말을 달려 조여 오는 괴물들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지휘관이 뚫어 놓은 길을 다른 대원들이 따랐고, 괴물들은 말발굽에 짓밟히고 검에 잘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으, 으악!”
그러나 승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발굽에 짓밟히고 팔이 잘려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괴물들은 그 흉측한 입을 벌려 말들의 다리를 물어뜯었고, 말과 함께 넘어진 대원의 목을 물어뜯었다.
“으아아!”
“크아!”
말이 넘어지는 소리와 대원들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가 하나둘 늘어 갔다.
크오오!
적들의 검이 움직이고 바로 옆에 동료가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지만 괴물들은 그저 눈 앞의 식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크악!”
그것은 저승 등대로 인해 이 땅에 다시금 불려진 망자들의 본능. 영혼에 새겨진 생명에 대한 막연한 갈망과 그리움. 거짓된 육체가 느끼는 채워지지 않을 허기. 그것들은 망자들에게 눈앞에 있는 생명을 모조리 집어삼키도록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것들!”
앞서 치고 나갔던 지휘관은 대원들의 희생보다는 자신을 따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제대로 못하면 백랑에서 제명될 줄 알아라!”
말에서 내린 지휘관은 괴물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붉은 신성력이 깃든 그 검이 움직일 때마다 괴물들은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얼굴을 찢으면서도 입을 벌리던 괴물들이었지만 점차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엘하임 펜릴!”
다른 백랑들도 말에서 내려 지휘관을 따라 괴물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본래 저승 등대로 불러낸 망자들은 저승과 통하는 문을 만들 일종의 재료. 이미 전세는 백랑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5. 백랑(1)
“이거 오히려 잘된 건가…….”
백랑과의 전투가 시작되자 네른은 조용히 뒷문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쇠사슬이 드러난 그들의 얼굴에 적잖은 충격도 받았고, 그 순백의 기사들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그 둘 모두에게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두 쪽 다 동귀어진해 줬으면 좋겠는데.”
네른은 발길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중에도 잊지 않고 챙겨 들었던 빵 한 조각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식욕이 돋았다.
“근데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마을 밖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저 백색의 기사들이 이긴다면 괜히 길을 따라가다간 그들과 다음 목적지가 겹쳐져 중간에 따라잡힐 수도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에는 숲이 보였고 반대쪽에는 그가 내려온 산이 보였다.
“산으론 못 가.”
그는 몇 달 전 산을 헤매던 때를 회상하며 방향을 틀어 숲 쪽으로 달려갔다.
뒷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음 마을이 어디에 있든 저 숲이 어떤 숲이든 지금은 저 백색기사단에게서 조금 더 멀리 도망치는 것만이 중요했다.
저들이 누구든 만일 그의 흔적을 찾는다면 텅 빈 마을이나 저 괴물들과 그를 연관 짓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그런데 한참 달리던 네른이 갑자기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음, 넌 누구니?”
그것은 조금 전, 다른 백랑들에서 뒤쳐졌던 참모였다.
말에서 내려 팔을 치료하던 그는 이제야 겨우 다시 말에 올라 앞서간 이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마침 모퉁이에서 달려 나온 네른과 마주친 거였다.
“……?!”
네른은 순간 망설였다.
말을 탄 상대에게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했고, 또 설사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쳐도 상대가 자신의 모습을 본 이상 그 다음이 문제였다.
설사 지금은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저 괴물이나 텅 빈 마을을 그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 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가방에서 챙겨 넣어 둔 칼과 네체른의 서를 꺼내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상대는 숙련된 기사. 아마 자신이 칼을 꺼내는 걸, 아니, 가방을 여는 것만 보고서도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아, 아, 저기, 저, 저기 괴물들이… 싸우고 있어요!”
네른은 그 즉시 최대한 겁을 먹고 당황한 듯한 목소리와 표정을 지으며 기사들과 망자들이 싸우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 생존자 흉내를 내는 게 최선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뭐?! 얘야, 자세히 말해 보거라.”
당황해서 급히 다가오는 참모의 모습에 네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이, 이상한 괴물들이… 나는 숨어 있었는데…….”
네른은 일부러 횡설수설 말을 흐렸다.
이런 경우 너무 정확한 설명이나 침착한 태도는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아, 알았다. 어서 타라. 나를 거기로 데려가다오.”
네른은 참모가 내민 손을 얼른 잡았고,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붕 뜨는 듯하더니 그는 어느새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어디니?”
“저, 저기로 쭉 가면…….”
“꽉 잡으렴!”
네른을 태운 참모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고, 네른은 그 속력에 자기도 모르게 참모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과연 백랑, 팔을 다쳐 전속력을 내지 못함에도 엄청난 속도였다.
“여기쯤이니?”
“예, 예. 저, 저기 모퉁이를 돌면 바로…….”
“이럇!”
네른과 참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는 거의 끝나 있었다. 망자들 대부분은 이미 연기로 변해 사라져 있었고, 남아 있는 망자들 또한 검에 목과 입이 꿰뚫린 채 제압당해 있었다.
“아, 왔나?”
지휘관은 무덤덤하게 자기 앞에 쓰러진 망자의 숨을 끊으며 달려온 참모와 네른을 맞이했다.
“응? 근데 그 아이는 누구지?”
“예. 조금 전에 만났는데 이 마을 아이인거 같습니다.”
“그래? 그럼 대답해 주겠니? 이것들은 뭐고 다른 마을 사람들은 어디 있지?”
그렇게 말하던 지휘관이 뒤쪽으로 검을 던졌다.
“컥!”
검은 정확히 마지막 남아 있던 망자의 머리에 꽂혔고, 망자는 검은 연기로 변해 땅속으로 사라졌다.
딱.
지휘관이 손가락을 튕기자 대원 한 명이 재빨리 그의 검을 주워 지휘관의 손에 올려놓았다.
검을 가져온 대원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검을 받아 든 지휘관은 부드럽게 검집에 집어넣었다.
“…….”
“걱정하지 말고 말해 보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네른의 모습에 겁을 먹은 것이라 착각한 참모는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다독였다.
네른은 그런 참모를 한 번 바라보고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을 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요.”
“죽었다고? 이 녀석들한테?”
그 즉시 돌아온 반문.
네른은 지휘관의 목소리와 눈빛에 담긴 의심을 읽어 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 자신을 향하던 베테르의 눈빛, 목소리와 꼭 닮아 있었다.
“…….”
그러나 그는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진실성을 더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며, 의심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적정한 시간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프리드 님.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마을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건 확실한 거 같으니,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시지요.”
거기다 배려심 깊은 참모 또한 지금 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흥!”
참모의 조언에 지휘관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도 몸을 돌려 곧 자신의 말에 올랐다.
아마도 의심은 해도 어린아이 한 명 따위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는 듯했다.
“뭐 그러도록 하지. 어찌 되었든 사람이 없는 건 사실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지휘관이 자신을 한 번 노려본 것을 네른은 알고 있었지만, 결코 그는 그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여전히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어린아이 흉내를 계속할 뿐이었다.
“프리드 님 대원들의 시신은……?”
땅에는 여기저기 흉하게 뜯겨 버린 세 구의 시신과 말 두 마리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흥, 까마귀들이 알아서 하겠지. 연락이나 해 놓고 따라와라. 우리는 돌아간다.”
그렇게 말한 지휘관은 혼자 먼저 출발했다. 대원에 대한 한마디 애도나 부상자들에 대한 배려도 없이.
“…….”
대원들은 그런 지휘관의 모습에 굳은 얼굴로 말에 올랐고, 곧 벌써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지휘관을 쫓아갔다.
참모와 네른만이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아…….”
모든 대원이 떠나자 참모는 참았던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미안하구나 얘야. 원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해서 그렇단다.”
그는 품속에서 검은색 구슬 하나를 꺼내더니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캬아아아악!
구슬이 부서지며 귀를 찢을 듯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무덤가에서 울려 퍼진다는 구슬픈 밴시의 울음소리.
까마귀를 부르고 밤을 끌어모으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