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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12화)
5. 백랑(2)
“자아, 그럼 우리도 가자꾸나. 너무 늦어 버리면 또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
참모는 말고삐를 당겨 다른 이들이 간 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아, 근데 네 이름은?”
“네, 네른이요.”
엉겁결에 답한 네른은 아차 싶었다. 지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그 이름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다른 이들처럼 부모에게 물려받은 실제 이름도 아니었다.
그런데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위험한 이름을 그대로 쓸 필요는 없었음에도 그는 그 이름을 말해 버렸다.
“네른? 그렇구나. 그럼 네른, 꽉 잡으렴. 아까보다는 천천히 달릴 거지만 조금 흔들릴지도 모르겠으니.”
“예, 예.”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백랑과 그대로 엮이게 된 이 상황이 네른으로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래 뭐, 어차피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는데 잘된 건지도…….’
그렇게 네른은 자신이 만난 이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일단 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 * *
“자아, 그럼… 이제 말해 볼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족의 저택을 떠올릴 만큼 호화로운 방 안. 하얀 책상에 턱을 괴고 앉은 지휘관은 맞은편에 앉은 네른을 향해 차갑게 물었다.
한참을 말을 달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떤 한적한 숲 속에 작은 오두막이었다.
다만 단순한 오두막은 아닌지 오두막 지하에는 오두막과는 전혀 다른, 흡사 요새와 같은 거대한 시설이 숨겨져 있었다.
이곳은 바로 그 지하 기지 가장 깊은 곳, 지휘관의 방이었다.
“…….”
네른은 말을 아꼈다. 지하 비밀 기지의 규모는 비록 그가 얼마 전까지 있던 셰알 요새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마을에서부터 본 그들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네른은 이들이 보통 기사단이나 집단이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프리드 님…….”
마치 죄인을 심문하듯 하는 지휘관의 태도에 참모가 뭐라 하려 했지만 지휘관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끄럽다. 아까 마을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만큼 시간을 줬으면 되는 거 아니야? 거기다 내가 뭐 못 물어볼 거 물어보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차갑고 고압적인 지휘관의 태도였지만, 참모 또한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 아이는 샨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그리고 샨 마을은 우리와 같은 신을 모시는 동포. 제로스 님께서는 동포들을 안전하고 정중히 약속의 땅으로 모셔 오라 했습니다. 거기다 지금 이 아이는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죄인 다루듯…….”
꽝!
지휘관은 앉아 있던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감히 네놈이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저는 다만 제로스 님의 명령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
제로스의 명령이란 말에 지휘관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좋아. 맞는 말이야.”
지휘관은 마지못해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참모를 노려보고 있는 그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 녀석이 그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야…….”
참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황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거기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실제로 네른은 그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가 아니라 그 마을을 그렇게 만들고 괴물들을 불러낸 장본인이지 않은가.
그렇게 참모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지휘관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바로 그래서 그걸 알아보려는 거야. 죄인을 심문하는 게 아니라 몇 가지 확인 작업을 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이 아이가 정말 우리 동포란 게 확인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를 정중히 약속의 땅으로 데려갈 것이다. 어때 아직도 불만이나 의문이 있나?”
“아닙니다.”
참모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참모의 모습에 지휘관은 만족하듯 미소를 지으며 네른에게 다시 물었다.
“자아, 그럼 대답해 보지?”
물론 그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네른에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럴 듯한 이야기 한 편이 완성되어져 있었다. 진실과 거짓이 섞인 이야기 한 편이 말이다.
“……사실 우리 마을은 예전부터 축제 날 아주 특별한 제물을 바쳐 왔어요.”
“특별한 제물? 사냥감 말인가?”
“…….”
네른은 일부로 뜸을 들였다. 마치 입에 담기 두렵고 망설여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람이에요.”
“사람?!”
“말도 안 돼는……!”
네른의 말에 지휘관과 참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인신 공양이라니… 우리 교에 그런 의식도 있었나?”
“아니요. 아마 지난 세월 동안 자체적으로 생겨난 듯합니다. 거의 2세기 동안이나 본교와의 연락이 끊어졌었으니까요.”
네른은 그들에게서 충격이 가시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노인 분들 스스로 제물로 나섰지요. 신에 대한 마지막 신앙의 표현으로 일종의 영광으로 알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조금씩 변질되었지요.”
네른은 그럴듯하게 자신이 헨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지휘관과 참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갈수록 그를 향하는 의심은 옅어져갔다.
“저는 마을의 마지막 아이로, 어제 제물로 바쳐질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그런데?”
어느새 그들은 네른의 말에 빠져 있었다.
“어제 아침, 한 노인이 마을에 찾아왔어요. 그냥 지나가는 여행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네른이 하려는 이야기에는 과거 베테르의 만행도 기초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음 축제를 대비해 저 대신 그 노인을 제물로 삼으려고 했어요.”
과거 자신과 베테르가 들렀던 한 마을은 평범한 마을이 아닌 도적촌이었다. 그들은 베테르가 방을 빌릴 때 꺼내 들었던 금화를 노리고 깊은 밤 습격해 왔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 그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순한 축제라고 속여서 의식에 노인을 데려왔어요. 그런데 제단에 끌려온 노인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어요.”
그 이후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아까 그 괴물들은 그 노인이 남기고 간 것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가거나 자신처럼 어딘가 숨어 있다가 괴물에게 당했다고 말이다.
“……흐음. 아무래도 그 노인은 흑마법사였나 보군요.”
참모와 지휘관은 네른의 말을 완전히 믿은 것 같았다. 베테르도 했듯 사실 몬스터나 흑마법사가 이렇듯 작은 마을 하나를 없앤 일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흥, 자업자득이다. 희생이란 자기 스스로 하기에 가치 있는 법. 자기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약자의 피를 신에게 바치다니, 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뭐, 처음 제물을 자처했던 분들은 그야말로 진정한 순교자이지만 말이지.”
지휘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이걸로 대충 의심, 아니, 정확히는 흥미가 떨어진 듯했다.
“이 아이에게 방과 음식을 내주도록 해. 그리고 내일 우리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다.”
“예, 알겠습니다.”
네른은 자신을 이끄는 참모를 따라 방을 나섰다.
처음 들어왔었던 꽤 긴 복도를 지나 반대편으로 가자 큰 방에 수많은 침대들이 가득하게 놓여 있었다.
“원래는 이 방에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예정이었지만 오늘 밤은 너 혼자 쓰면 되겠구나. 배고프지? 곧 음식을 가져다주마.”
네른은 순간 참모의 얼굴과 헨슨의 얼굴이 겹쳐졌다.
“…….”
“응? 왜 그러지?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니에요. 조금 출출해서 그래요.”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리거라. 진수성찬은 못되도 먹을 만은 한 걸 가져다주마.”
부관이 방을 나가자 네른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어떻게든 된 거 같긴 같은데…….”
네른은 가장 가까운 침대에 걸터앉고는 매고 있던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사실 원래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흐르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나쁜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 하루 잘 숙소와 음식은 얻었지 않은가. 특별히 의심을 사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집단은 위험했다. 비밀 기지도 그렇고 약속의 땅이니 뭐니 하는 것도 수상했다.
“때를 봐서 도망쳐야지.”
네른은 참모가 오기 전 칼과 네체른의 서를 꺼내 배게 밑으로 숨겼다. 지금 당장 새벽 명성 기도를 다시 외운다면, 아니, 네체른의 서에 있는 그 어떤 주문이라도 외우기만 한다면 이 기지를 점령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운 산골 마을 같은 게 아니었다.
어떤 단체에 의해 유지되는 지하 비밀 요새. 몬스터나 도적, 흑마법사에 의한 피해로 궤멸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고, 모르긴 몰라도 이곳과의 연락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그 단체에서 뭔가 조치를 취할 게 분명했다.
“자아, 식사 가져왔다.”
때마침 참모가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프에 갓 구은 듯 윤기 나는 빵, 그리고 푸짐한 샐러드와 통통한 통닭 한 마리.
혼자 먹기에는 꽤 호화로운 저녁일 뿐만 아니라, 한손으로 들고 온 것이 신기한 저녁이었다.
“…….”
네른은 잠시 그 먹음직스런 식사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네른의 모습에 참모는 잠시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말했다.
“많이 먹으렴. 모자라면 말하고. 음식은 꽤 넉넉하게 남아 있으니까.”
“네, 네. 감사합니다.”
네른은 곧바로 빵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말라 딱딱해져 가던 아침의 빵과는 전혀 달리 입에서 살살 녹듯 부드러웠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편히 쉬도록 해.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저…….”
방을 나서려는 참모를 네른은 불러 세웠다.
“응?”
“그 약속의 땅이란 건 뭐죠?”
절대 음식에 혹해서 관심이 생긴 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묻는 네른이었다.
“아, 그건 말이다.”
참모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곧 입을 다물었다.
“가 보면 알게 될 거란다. 하지만 걱정 마. 그곳에 가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그곳은 바로 그런 곳이니까.”
참모는 모호한 말만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라…….”
네른은 바로 그 꿈같은 소리를 아주 오랫동안 들었다. 그의 옛 주인 베테르가 네체른의 서를 찾으며 늘 입에 달고 살던 소리였다.
“훗, 난 그딴 거 안 믿어. 단적으로 그 늙은이도 그딴 소리 지껄이다가 결국 그렇게 된 거잖아.”
네른은 닭다리를 찢어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이나마 그 마음에 생겼던 흥미가 싹 가셔 버렸다.
“근데, 어떻게 도망가야 하려나.”
네른은 아직 잘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에게 몰래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백랑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호송. 그것도 마을 단위의 호송이었다. 그런데 그 호송할 인원이 한 명으로 줄어든 거였다.
단 한 명이라도 호송할 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결코 실패는 아니다.
하지만 호송할 인원이 한 명도 없다면 그것은 이유가 어떻든 윗선에서는 실패라 여길 것이었다.
지금 백랑에게 네른이란 단순히 데려가야 할 같은 교의 신자 정도가 아니었다. 인원이 줄어든 이유와 타당성을 설명해 줄 유일한 증인이자, 임무의 실패와 성공을 가르는 중요한 존재였다.
물론 마을이 비었음을 확인했던 밤까마귀도 있었고, 아예 네른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고 윗선에 보고한다면 또 상관없겠지만, 자존심 강한 백랑의 지휘관이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그는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지, 또한 어떻게 하면 그들이 사라진 자신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근데 이거 왜 이리 맛있냐?”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기 눈앞 식사에 집중하는 네른이었다.
“좀 더 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