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네체른의 서 1(13화)
5. 백랑(3)
“아이는 잘 데려다 줬나?”
“예.”
지휘관은 돌아온 참모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말과는 반대로 네른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참모가 감고 있는 새하얀 붕대와 부목 덕분에 자신 때문에 입은 그의 부상이 뻔히 보이고 있었지만 조금도 미안한 기색은 없었다.
“약속의 땅에 대해서는 설명해 줬나?”
“아니요.”
“어째서?”
지휘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 아이를 위해서라고 여겨서? 아니면 단순히 입이 안 떨어지던가?”
조롱하듯 말을 잇는 지휘관의 태도에 잠시였지만 참모의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가 일었다.
그 때문에 말에서 떨어지고, 팔이 부러졌음에도 원망이나 화난 기색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던 그였기에, 잠시긴 했지만 고작 몇 마디 말에 분노를 표한 이러한 그의 태도는 지금 이 몇 마디의 말이 고작 말 몇 마디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그 말씀은, 약속의 땅에 대한 프리드 님의 생각이 반영된 거라 보아도 되겠습니까?”
“…….”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참모의 태도에 잠깐이지만 지휘관의 어깨가 움찔했다.
“약속의 땅은 우리 그림 늑대, 아니, 우리 교의 이상에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와 같은 참모들은 지휘관님들과 별도로 제로스 님께 직접 정규 보고를 올려야 되지요. 만일 프리드 님께서 약속의 땅에 대해 불경한 생각을 지니고 계신다면 저는 제로스 님께 보고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놈!”
누가 들어도 그것은 협박. 지휘관은 분노를 숨기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참모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밤이 깊었군요. 더 이상 하실 말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참모는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몸을 돌렸다. 그것은 우위를 잡았다는 자신감이자 지휘관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아니, 할 말은 남아 있다.”
지휘관은 그를 불러 세웠다.
“셰니르에서 밤까마귀가 요청을 해 왔다. 아무래도 대외적으로 나서야 될 일이 생긴 것 같더군. 부상도 있고 원활한 작전 수행은 힘들 듯하니 자네가 가도록 해.”
셰니르는 지금 있는 곳에서 말을 달린다 해도 3일은 걸릴 거리. 거기다 정확한 이유가 따라오지 않은 요청이라면 강제성도 없고 중요한 일도 아니다.
지휘관의 판단으로 거절할 수 있는 요청. 보복성이 강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참모는 뭐라 하지 못했다. 요청이 들어왔다는 명분이 있는 이상, 그에게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그럼 내일 아침…….”
“지금 출발하도록 해. 빨리 가야 빨리 돌아와서 다시 업무를 볼 수 있잖아?”
이미 해는 졌고 조금만 지나면 말을 달리기에도 어려운 깊은 어둠이 깔린다. 지금 출발하라는 것은 단지 밖에 나가 자라는 소리밖에 안 되는 거였다.
“……알겠습니다.”
참모는 화를 참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방을 나서는 참모의 뒷모습을 보며 지휘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 인간을 정말……!”
그에 반해 문을 닫은 참모의 입에서는 절로 욕설이 터져 나올 뻔했다.
“뭐, 좋아.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 주지.”
참모는 여벌 붕대와 약, 그리고 식량을 챙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온전한 몸으로 최대 속도로 달린다면 아무리 3일 거리라도 이틀 만에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상태라면 최소 4일은 걸릴 터였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라. 핏빛 송곳니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림 늑대에 많다. 언제까지나 네놈이 백랑의 지휘관으로 있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는 말이지.”
그의 손끝에는 옅지만 분명 붉은 빛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 검술 실력과 거만한 태도가 어느 정도 백랑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참고 있었을 뿐이니까.”
6. 아울즈(1)
별빛조차 가려진 어두운 밤. 푸른 보름달이 진 다음 날이면 늘상 이러한 어둠이 밤하늘을 덮친다.
그것은 운타스 신이 신들의 궁전에서 돌아왔을 때, 그 부재 동안 깨어나 버린 펜릴을 다시 잠재우기 위해 꿈의 여신 아라디아에게 빌려 온 잠의 장막.
스스스.
그 장막이 내려앉은 어느 어두운 숲 속, 바람도 없이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마치 여러 무리가 어딘가로 향하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어두운 밤, 저 정도 소리를 내며 나무 위를 뛰어다닐 동물은 적어도 이 숲에는 없었다.
“하하하!”
상황과 맞지 않는 쾌활한 웃음 소리. 하지만 그래서 더 섬뜩한 웃음이 숲 속에 울렸다.
“저, 저 미친놈.”
“또 시작이군. 하긴 오랜만에 출동이니 카인이 흥분하는 것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차분한 남성과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
“하하하! 형이랑 누나도 신나지? 거의 2년 만에 출동이잖아!”
제일 앞서 나가던 소년이 뒤따르는 이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귀찮을 뿐이라고.”
“후후, 어머 레논도 참. 거짓말 하지 마. 안 그런 척해도 신나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말이야.”
“레이나, 내가 언제……!”
그런데 그들의 가장 뒤쪽,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허공에서 붉은 눈동자가 하나가 번쩍였다.
“모두 시끄럽다.”
마치 심연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살짝 들떠 있던 분위기가 다시 검은 장막에 가려지고 순간적인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아울즈. 검은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이자, 바람조차 찾지 못할 그림자이다. 수다스러움은 삼가라.”
“알겠습니다.”
“누구명인데 거역하겠습니까.”
앞서 달리던 소년은 이내 속도를 늦춰 뒤를 따르던 다른 두 명과 속도를 맞췄고, 빛나던 붉은 눈동자는 어둠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슈펜트 오라버니도 참. 언제나 진지하다니까.”
곤란하다는 듯한 그녀의 그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그들이 어둠을 넘어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까진 말이다.
“여기다. 샨 마을.”
다시 붉은 눈동자가 빛나며 슈펜트라 불린 이가 입을 열었다.
“불빛 하나 없군.”
“유령 마을 아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낮까지는 아니었어.”
슈펜트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잃었고, 그는 대신 오른손을 올렸다.
“라이트.”
그의 손에서 빛의 구가 떠오르며 밤의 장막을 거뒀다. 사물을 판별하는데 훨씬 쉬워졌지만, 슈펜트의 갑작스런 이런 행동에 다른 이들은 살짝 놀라고 있었다.
“의외군요. 오라버니께서 빛을 밝히시다니.”
“그러게. 슈펜트 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겐 어둠 속에 몸을 감추라 하셨잖습니까.”
그러나 놀라는 그들과는 달리 정작 슈펜트 자신은 무덤덤할 뿐이었다.
“사냥감이 없을 때는 상관없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이 아름답지만 차가운 인상의 사내는 은색으로 빛나는 앞머리로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자, 잠깐 아까는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도 조용히 하라고 그랬잖아요.”
수긍하는 레논이라 불린 짧은 머리의 청년과는 달리, 숲에서 앞서 달리던 카인이란 소년은 그런 그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그러자 슈펜트는 무감정하게 답했다.
“조용히 밤 산책을 즐기고 싶었거든.”
순간 모두에게로 침묵이 찾아왔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그가 지난 2년 동안 한 가장 재밌는 농담이자 장난인 것을 알 것이었다.
“후훗.”
침묵을 깬 것은 레이나의 짧은 웃음 소리였다.
“역시 슈펜트 오라버니도 오랜만에 작전이 즐거웠나 보군요.”
“가자.”
슈펜트는 먼저 몸을 날렸고,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밝게 빛나는 구체가 그들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들은 마치 어두운 밤, 바람 위에서 나는 올빼미와 같았다.
그들은 빠르게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백랑이 했듯 화려한 질주는 아니었지만 그 움직임만은 기마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었다.
“잠깐.”
그리고 그들이 아침 백랑과 망자들 간의 전투가 있었던 곳에 다다랐을 때쯤, 슈펜트가 손을 올리며 멈춰 섰다.
“여기에 뭔가 흔적이 있군.”
밤까마귀의 작품인지, 거기에는 전투의 흔적도, 시신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질감이 들 정도로 필요이상으로 깨끗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 어떤 이상함도 알아챌 수 없을 자연스러움이었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에서 슈펜트는 뭔가를 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슈펜트 대장의 눈을 속일 수 없지.”
슈펜트가 머리칼을 넘기자 왼쪽 눈이 드러나며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투가 있었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자들과 신관? 성기사?”
그는 뭔가 보이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림 늑대 백랑이군.”
슈펜트의 그 말에 다른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대장이군. 벌써 녀석들의 꼬리를 잡았잖아?”
그런데 슈펜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이건 뭐지? 공포? 허기? 차가움? 욕망? 절망?”
그의 붉은 눈동자는 더욱 번뜩였다. 그리고 그 빛이 최절정에 달했을 때, 갑자기 슈펜트는 고통스럽다는 듯 자신의 왼쪽 눈을 부여잡았다.
“대장!”
“오라버니?”
처음 보는 슈펜트의 그런 행동에 다른 이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슈펜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모르겠군. 보이지가 않아. 이런 일은 처음이야. 그저 어둠이 보일 뿐이야. 마치 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듯 가까이 가려하면 갑자기 어두워져서 보이지가 않아.”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사라졌고, 그는 넘겼던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다들 여기서 남동쪽으로 가라. 여기서 여덟 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작은 오두막이 있는데 거기 지하에 그림 늑대의 비밀 기지가 있다. 레이나 네 아이들을 통하면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다.”
“오라버니는 어쩌려고요?”
“난 확인해 봐야 하는 게 있다.”
슈펜트는 그 말만 하고는 곧 다른 이들을 남긴 채 몸을 날렸다. 그는 이제 불길한 푸른 달빛 아래 괴이한 축제를 열었던 숲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지? 대장치고는 상당히 흥분한 것 같던데…….”
“모르겠군. 하지만 대장이 저렇게 나온 이상 우리가 할 일은 그냥 따르는 것. 그뿐이지.”
그리곤 그들은 슈펜트가 말한 남동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