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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14화)
6. 아울즈(2)


“후우.”
네른은 침대에 엎드려 조심스럽게 네체른의 서를 펼쳤다. 혹시 누군가 들어오더라도 이 각도라면 책을 볼 수 없을 거였다.
“얄궂군.”
그는 지금 이 저주받은 마도서에서 쓸 만한 주문을 찾고 있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려면 새벽 명성 집회나 저승 등대 같은 것들보다 훨씬 은밀하고 작은 주문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어느새 이딴 책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잖아.”
그는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수없이 많은 주문들이 눈앞을 지나쳤지만 지금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었다.
“적을 개구리로 만드는 저주, 눈을 멀게 하는 저주, 머리카락을 뱀으로 변하게 하는 주문… 무슨?! 이런 주문들도 있어?!”
어젯밤. 꽤 많은 주문을 확인하고, 또한 시전했음에도 아직도 책에 적힌 주문은 끝을 알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베테르의 시동을 들면서도 그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주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최강 최악의 마도서. 사라진 옛 주술과 저주가 가득했다.
“근데 정작…….”
그러나 정작 지금 네른에게 도움이 될 주문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네체른의 서라고 해도 필요할 때 딱 필요한 주문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물며 그것도 적을 없애거나 조종하는 것도 아니고 도망치는 주문이라니.
“빠져나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물론 적을 잠들게 하거나, 몸을 투명하게 하는 등 도주에 도움이 되는 주문은 많았다. 하지만 단순히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렇게 단순히 빠져나가거나 도망치는 것만이라면 그냥 죄다 죽여 버려도 되는 거였다.
“하암.”
네른은 슬슬 졸음이 오는 듯 하품을 해 댔다. 마음 같아서는 책을 덮고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약속의 땅이니 뭐니로 가 버리면 더 골치 아파질 테니까.”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분위기를 보아 여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삼엄한 경비가 있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오, 이거 괜찮네.”
드디어 네른의 눈을 사로잡을 주문이 나왔다.
“크레이돌(Clay Doll).”
그 주문은 자신과 거의 똑같은 모습인 분신을 만들어 내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는군.”
본래 이 주문은 단순한 눈속임을 위한 분신이 아니라, 일종의 주술적 방패 같은 거였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술사가 목숨을 잃을 만큼 치명적인 부상이나 저주를 받으면 이 분신이 그 일정량을 대신 받아 데미지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네체른은 자신의 비밀 방에 이 인형을 몇 개씩 쌓아 놨고 그 덕분에 몇 번이나 되는 용사들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건져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일단 이건 기억해 두고.”
네른은 크레이돌의 페이지를 기억해 두며 다시 책장을 넘겼다.
“제일 좋은 건 내가 죽은 걸로 하면 되는데…….”
대충 시나리오는 정해 놓은 네른이었다. 어차피 마을을 없앤 것은 악독한 흑마법사. 알고 보니 네른 자신도 저주에 걸려 있어 그 효과로 죽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럴싸한 시나리오였다. 다만 문제는 시신이었다.
“시신이 남아 버리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시신이 없으면 그가 죽었다는 걸 증명해 주지 못한다.
“아, 그렇지!”
시신을 남길 수 없다면 시신이 남지 않아도 되게 만들면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갖지 못하게 확실한 죽음이라면 시신은 필요 없었다.
“그래. 일단 다른 사람들 눈앞에서 확실하게 죽어 버리면 시신이 없어도 의심하지 않겠지.”
책장을 뒤로 넘기던 네른은 다시 앞쪽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런 거라면 좋은 주문이 이미 나왔었다.
“여기 있군. 식염(食炎).”
그 주문은 말 그대로 상대에게 불의 힘을 먹여 살아 있는 폭탄으로 만드는 저주였다. 그것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적진 깊숙이 있는 목표물까지 운반자도 모르게 폭탄을 보내는 일종의 암살법이었다.
“크레이돌에 식염을 걸어서 폭발시키면 되겠군.”
네른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챙겨 놓았던 식칼을 꺼냈다. 과연 폭발력을 조절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디 보자… 일단 진흙이 필요한가.”
네른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진흙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군.”
웬만하면 시선을 끌 만한 행동은 삼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물론 말을 안 했다고 해서 허락되어 있는 것은 아니란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나중에 혹시나 걸려 문제가 되었을 때 변명거리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네른은 네체른의 서와 칼을 다시 가방에 넣고는 문으로 향했다.
“…….”
네른은 혹시나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와 마주칠 때를 대비해 가방을 문 옆 벽에 숨겨 두었다.
야심한 밤에 가방까지 매고 밖으로 나가려는 걸 들킨다면 어떻게 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이런 비밀 요새에서 말이다. 그때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 거였다.
끼이익.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네른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
“하긴, 화장실도 없는데 문 앞을 지킬 리는 없겠지.”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다른 곳의 경비가 삼엄하다는 뜻이었다. 들어올 때 보았던 입구를 떠올리면 비밀 문뿐만이 아니라 경비가 서 있는 문을 3개나 지나야 했다.
“일단 밖으로 몰래 나가는 건 무리 같고 이 안에서 어떻게 해결을 볼 수 없나…….”
하지만 여기가 아무리 지하라고는 해도, 공사 중인 것도 아니고 제대로 완공이 된 요새에서 진흙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
네른은 일단 걸음을 옮겼다. 제일 좋은 건 요새 밖으로 나가는 거지만 그건 힘들 테니 진흙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는데 네른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붉은 불빛을 발견했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문 또한 다른 문들과는 달랐다. 그저 나무에 철을 댔을 뿐인 다른 문들과는 달리, 커다란 송곳니 같은 문양이 중심에 세공되어 있었다.
네른은 또다시 가방을 옆에 놓고는 그 문을 살짝 열었다.
“……!”
네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수많은 늑대 형상을 한 석상들이었다. 방 모서리를 디귿 자 형태의 커다란 신단 위를 가득 채운 족히 백은 넘을 크고 작은 늑대 석상들,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수많은 초에서 빛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붉은 불길.
그것은 마치 그 늑대 석상들이 피에 젖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다.
“……!”
그 광경은 네른에겐 강렬한 위압감이었고 또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러 일어나는 공포였다.
굶주린 늑대 무리의 동상? 아니, 이것은 굶주림 따위는 모르는 늑대들의 동상이었다.
식욕이나 자기 방어와 같은 본능이 아니라, 단지 파괴만을 위한 파괴. 광기만을 위한 광기. 석상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이게 펜릴인가?”
단순한 석상에 불과했지만 네른은 오싹함을 느꼈다. 거기다 그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세차게 흔들리는 붉은 촛불들이 그런 그의 마음을 더하고 있었다.
“…….”
그런데 한참 그렇게 숨을 죽이고 멈춰 서 있던 네른의 눈에 신단 앞 작은 탁자 위에 제물을 대신하는 진흙 인형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사슴, 토끼, 소, 돼지 같은 동물 모형이었는데 족히 수 백 마리는 돼 보였다.
“그, 그래 이걸 쓰면 되겠군.”
네른은 가방을 끌고 온 뒤 문을 잠갔다.
“큭!”
그리고는 칼을 꺼내 손가락 끝에 살짝 상처를 냈다.
“이 정도로 되겠나?”
물론 마을 사람들의 피로 실험했던 때를 생각한다면 턱도 없을 양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타인의 피와 네른 자신의 피는 뭔가 다르다는 걸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만약 다른 이들과 같았다면 이미 새벽 명성 집회를 시전한 그 순간 이미 그의 몸은 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말라비틀어졌을 테니까.
“어디 보자, 크레이돌은…….”
그는 피가 멎지 않도록 상처를 벌리며 아까 기억해 놓았던 크레이돌의 페이지를 펼쳤다.
“카발라즘, 산양을 위한 제물을 바쳐라. 무리를 박차고 나온 그 어리석은 자에게 닿을 욕망을 담아라. 진흙으로 빚어 생명을 모방하여 보여 주어라. 그의 어리석음과 불완전함을.”
주문을 읊어감에 따라 손가락 끝에 맺혔던 핏방울이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역시 피가 더 필요하긴 한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다.
“에메스, 여호, 그가 주지 못한 부족함을 채우라. 마음속에서 불어닥치는 냉기는 네 잘못이 아니라 그의 잘못이리라.”
피는 계속 흘러나왔고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나 여기 위대한 대지와 대자연의 축복 속에서 그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네른은 끊임없이 주문을 읊어 갔다. 네른으로서는 단순한 눈속임 재료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지만, 본래 이 주문은 새벽 명성 집회나 저승 등대보다도 고위 주문.
네체른조차도 단 몇 개만을 만드는데 성공할 정도로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나마 그가 네체른처럼 예비 목숨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보니 영혼을 나누고 마력을 채우는 고위 조정 과정은 생략해 시도라도 하고 있는 거지 원래라면 아무리 네체른의 서의 힘을 빌린다 해도 네른에게는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진흙을 빚어라. 진흙을 빚어라. 진흙을 빚어라.”
신단 앞에 쌓여 있던 진흙 인형들은 천천히 녹아 한 덩어리로 변하더니 다시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내 그림자에서 배여 있는 습관을 먹어라. 내 숨에 깃든 태초의 시작을 느껴라.”
진흙은 점점 솟아올랐고, 투박하지만 사람 모습으로 변해 갔다.
“생명을 낳은 대지여. 그 축복을 내게도 허락하소서. 내 모습을 본떠 새로운 나를 만들 수 있게 허락하소서.”
그 투박한 진흙 인형의 뭉툭한 손에는 손가락이 생겨났고, 그 겉 형태는 옷으로 변해 갔다.
“어리석은 자와 그를 위한 자들에게 증명하리라. 어리석은 자의 교만을!”
머리카락이 돋아나고 발은 그가 신은 신발로 변해 갔다.
“내 숨결은 네 숨결이 될 것이요, 내 그림자는 네 그림자가 될 것이다.”
차가운 흙은 온기를 담은 살로 변했고, 색 없는 옷에도 색이 입혀졌다.
“크레이돌.”
그리고 마지막 그 시동어와 함께 눈동자에 빛이 깃들며 그와 똑같이 생긴 네른이 하나 더 나타났다.
“……하아, 하아.”
네른은 주문을 끝내고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손도 비록 상처는 아물어 있었지만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자, 자 이제 됐지……?”
네른은 인형에 식염을 걸기 위해 다시 책장을 넘기려 했다. 하지만,
툭.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까지 떨려 왔다.
“뭐, 뭐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네른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좀 있다가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