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네체른의 서 1(17화)
7. 고이브누(3)
“아, 형!”
“미안하지만 내 고이브누도 이제 한계거든. 슬슬 먹이를 주지 않으면 안 되서 말이야.”
레논의 그 말에 카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쳇! 그럼 대신 좀 남겨 줘야 해.”
“그럼. 그거야 당연한 거지.”
우우우!
고이브누라 불린 괴생물은 그 가느다란 팔을 뻗어 백랑 중 한 명의 팔을 낚아챘다.
“아, 아!”
“이, 이놈이!”
고통스러워 하는 동료의 모습에 다른 이들이 곧장 고이브누의 팔이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소용없어. 고이브누에게 검은 통하지 않아.”
챙!
금속음 소리와 함께 백랑의 검이 튕겨져 나왔다.
“……!”
외관과는 달리 너무 단단한 고이브누의 팔에 검을 휘두른 백랑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 팔을 잡혀 있는 이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흰색과 검은색, 초록색의 천이 벗겨지며 고이브누의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아… 아!”
그것을 본 이는 순간 몸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동자도, 코도 그 무엇도 없는 검은색 구체에 그저 그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단지 그뿐. 그럼에도 그는 온몸을 덮치는 두려움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아, 일단 한 명.”
레논의 그 한마디에 고이브누의 팔이 기묘하게 꺽이더니 팔을 잡힌 백랑이 그대로 붕 떠서는 그 검은색 구체를 향해 날아갔다.
“……!”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검은색 구체와 부딪힌다 싶더니, 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단지, 레논의 말들과 그 검은색 구체의 표면이 마치 물결처럼 파동을 내고 있는 것을 생각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
백랑은 그 이질적인 공포에 자신들도 모르게 고이브누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당장 레논이나 다른 이들을 향해 몸을 날릴 수도 있었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이질적인 괴물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랑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레논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희들, 고이브누라는 이름을 듣고 뭐 생각난 거 없어?”
“……?”
백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고이브누란 건 잊혀진 옛 종교에서 기술의 신이자 대장장이 신의 이름이야. 아아, 괜찮아. 몰라도 돼. 너희 펜릴보다 훨씬 오래된 거고,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까.”
뜬금없어 보이는 말들. 하지만 레논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옛날 한 100년 전에 우리 아프로스에 이상한 미적 취향을 지닌 마도사가 있었지. 무기에 무 자도 모르면서 최강의 무기를 만들겠다면서 이상한 금술에까지 손을 대던 놈인데, 켄토라는 녀석이었어. 이건 바로 그 녀석이 그 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검인데 자기 말로는 이것이야말로 최강의 무기라고 했다더군.”
켄토. 어느날 술집에서 어떤 대장장이와 말싸움을 하다 진 것 때문에 분풀이로 그 대장장이의 꿈인 최강의 무기를 만드는 걸 자신이 먼저 해내 보이기로 마음먹은 그는, 이후 몇 십 년간 각종 금술과 제정신인 인간이라면 손대서는 안 되는 비도덕인 일까지 서슴지 않으며 무기를 만들었다.
차라리 그 대장장이한테 직접 분풀이를 하던가, 하다못해 그 대장장이를 그 자리에서 죽이기라도 했으면 그 이상의 비극은 없었을 것을.
수없이 많은 유아들이 그에게 잡혀가 끔찍한 실험 도구가 되었고, 그에게 잡혀가 억지로 무기 만드는 법을 가르치다, 실력이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며 죽은 대장장이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그 시비가 붙었던 대장장이는 가만히 놔뒀던 그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그 이후 30년 후 자신이 만들어 낸 마지막 무기에, 그 대장장이에게 이겼다는 뜻에서 고대 종교의 대장장이 신 고이브누의 이름을 붙였다.
“다만, 역시나 그는 뼛속 깊이 마법사. 무기에 대해서는 결국 끝까지 제대로 된 이해는 못했나 봐. 아니면 쓸데없는 자의식 과잉 때문이었는지…….”
레논은 자기가 든 검날로 자기 팔을 썰듯 문질렀다. 아무리 무딘 칼이라도 저렇게 하면 작은 상처라도 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의 팔에는 그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검이라면서 막대기보다도 안 들어. 거기다…….”
그가 검날을 잡고 살짝 구부리자 검날은 마치 장난감처럼 휘어졌다.
“너무 부드러워서 몽둥이로 쓸 수도 없지. 이건 그냥 그 고이브누라는 크리쳐를 불러내는 장식품인 거지.”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소환술 도구일 뿐, 결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무기일 수는 없었다.
“결국 켄토는 그간 저지른 유아 납치, 살해 등의 범죄 행위로 체포, 처형되는데, 처형 당일날 그 대장장이를 불러 이 검을 보여 주었다지.”
물론 그 대장장이는 사람 하나 벨 수 없는 검이라며 비웃었는데, 켄토는 화를 내며 포박줄과 봉인진을 풀어 버리고는 직접 이 고이브누를 불러내서 자살했다. 물론 그 대장장이를 향해 한껏 도취된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이다.
“뭐 한마디로 미친놈이지. 자의식이 강하다느니 편집증이 심했다느니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냥 미친 거지 뭐겠어?”
백랑들 중 몇몇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미친 것이지 그 이상도 뭣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 대장장이는 이후 왕국에 허락을 구하고 그 칼을 가져가서 직접 부수려 했는데, 부술 수가 없었어. 이렇게 부드러운데도 이상하게 그 어떤 검이나 마법으로도 부술 수가 없었지. 결국 대장장이는 이 검을 부수는 게 삶의 목표로 변했어. 어찌 됐든, 그도 켄토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술자리에서 한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 간 모든 사람을 위해, 그런 미친놈이 만들어 낸 검에 질 수는 없었다. 그것은 평생을 검과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로서의 자존심이자 동시에 그의 속죄였다.
“레논.”
레논의 말이 길어지자 레이나가 주의를 주었다.
“아아, 알아. 이제 거의 끝나 간다니까.”
하지만 레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 대장장이가 바로 우리 증조할아버지지. 그러나 결국 끝까지 부수지 못한 증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자기 대신 부숴 주기를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셨고, 이후 우리 아버지대까지는 우리 가문의 남자들에게 인생 마지막 목표는 항상 이 검을 부수는 일이었지.”
그러나 레논은 가업인 대장장이 일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그 목표도 이어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에 비해 그 신념이 얕았고 훨씬 효율성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뭐, 아버지한테는 내 일의 특성상 가지고 다니다 보면 부술 수 있을 상황이 올 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굳이 부술 생각은 없어. 사실 만든 놈이 미친놈이라도 꽤 쓸 만하잖아. 안 그래?”
탁.
말을 마친 그가 손가락을 튕겨 검날을 때렸다. 그에 맞춰 고이브누의 낮은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만큼 적정수의 제물을 먹여 줘야 하지만 말이야.”
그것은 켄토의 취향이었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처럼 말이다.
“자아, 그럼 이걸로 소개는 끝났으니 즐겁게 즐겨 보라고.”
“…….”
백랑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고이브누는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백랑은 긴장하고 있었다. 검이 통하지 않는 상대, 단 한 번에 사람 한 명을 그대로 집어삼키는 괴물.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크리쳐는 무시한 채 술사를 상대하면 되는 거였지만…….
“…….”
검은 나무뿌리에 사로 잡혀 있는 다른 두 명의 모습을 보아 섣부른 접근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엘하임 펜릴!”
두려움을 떨치고 기사 한 명이 용감하게 몸을 날렸다.
챙!
맑은 금속음. 역시나 벨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크리쳐라면 분명 그 핵이 있을 터! 빨리 그 핵을 찾아!”
솔선수범하여 다른 기사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 그가 생명을 걸고 앞서 몸을 날린 이유는 단지 그 한 가지 때문이었다. 고결한 희생정신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정신만큼은 기사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군요. 다만…….”
우우우!
고이브누의 손이 부푸는가 싶더니 흐물흐물하고 가느다란 실들로 변해 그 기사의 몸을 휘감았다.
“……!”
“단지 그것뿐이군요.”
고이브누의 손이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자, 이내 사로잡힌 기사는 허공에 붕 뜨더니 처음과 마찬가지로 고이브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용기를 북돋기 위한 희생, 그러나 너무도 허무한 그 결과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기사들은 슬금슬금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몇몇은 닫혀 버린 철문을 돌아보며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기도 했다.
“카인, 네가 나설 자리는 없을 거 같구나.”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레이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에? 왜?!”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읍.”
낮게 깔린 그녀 목소리에 카인은 곧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저 눈들을 보렴. 고이브누의 힘에 완전히 압도되었어. 더 이상 저항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하, 하지만 레논 형은 나한테도 남겨 주겠다고……!”
“그래. 하지만 저들이 항복하면 어쩔 수 없잖아?”
“……!”
카인이 고개를 돌리자 레논이 그를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나, 날 속였어!”
자신이 속은 걸 알아챘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아, 그러면 계속할 건가? 아니면 조용히 협조할 텐가?”
“…….”
백랑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 있었다.
어쩌면 그 기사의 희생이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원래의 의도야 어쨌든 잘하면 그 희생으로 더 이상 무의미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으니 말이다.
“무슨 헛소리지?”
하지만 결국 그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변해 버렸다. 철문이 열리며 화려한 제복으로 치장한 프리드가 걸어 나온 것이다.
“뭘 계속하고, 뭘 협조할 거냐는 거지? 곧 네놈들의 목은 바닥으로 떨어질 텐데.”
어느새 뽑은 그의 검에서는 강렬한 붉은 신성력이 넘쳐 흘러내리 듯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리드의 시선이 다른 백랑들을 향했다.
“……!”
자신들을 덮치는 그 차가운 살기에 순간 그들은 적인 고이브누 쪽으로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대체 이 무슨 추태냐. 내가 올 때까지 상황을 정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저딴 소리나 듣다니. 그러고도 네놈들이 백랑이라 할 수 있는가!”
“흥! 실력 차이가 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거기다 제일 먼저 뛰어나온 것도 아니고, 다 끝날 때쯤 유유자적 걸어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딴 거냐?”
레논이 검을 들어 올리자 고이브누가 그런 프리드를 향해 돌진했다. 이대로 다시 전면 전투를 시작해도 나쁘진 않았지만, 다 넘어왔던 분위기를 갑자기 다시 뺏기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