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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19화)
8. 사고(2)


“……?!”
바닥에 쓰러지고서도 네른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누나! 형! 여기에 뭐 있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어린아이. 그것은 카인이었다.
자기 몫의 기사들과 나중에 뛰어나온 경비병들까지 처리한 그는 허공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기척에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아… 아… 아아!”
네른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함께 따라온 고통에 신음을 토해 냈다. 그 신음과 함께 주문 또한 깨졌고, 투명했던 그의 몸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린애네?”
자기가 더 어리면서도 카인은 네른을 보고 그렇게 칭했다.
“넌 누군데 여기에 있는 거야? 너도 펜릴이야?”
네른은 반사적으로 그 물음에 고개를 돌릴 뻔했다. 하지만,
“하아앗!”
프리드의 검이 날아들고 카인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대체 왜 나온 거냐!”
“아, 아니 저…….”
다그침에 네른이 우물거리자 프리드는,
“그만! 일단 내 뒤에 숨어 있어!”
프리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프리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미 대원 대부분이 죽거나, 쓰러진 채 이상한 나무뿌리에 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레논 형! 이거 내가 처리해도 되는 거야?”
나무 위에 앉은 카인은 레논을 향해 물었다.
“아니!”
그 말과 동시에 밤까마귀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거, 이거. 웨폰 마스터라는 칭호가 울겠어. 고작 이런 녀석 하나 더 상대한다고 조종에 틈을 보였다니 말이야.”
우우우!
쓰러진 고이브누의 몸이 다시 일어섰다.
“젠장!”
그 모습에 프리드의 입에서는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잠시 자신의 검을 내려다 보더니 이내 체념한 눈으로 네른을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지. 너는 도망쳐라. 이대로 북쪽으로 계속 가면 작은 마을이 있다. 거기 실피르라는 주점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 사람이 찾아올 거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 그의 검에 다시 핏빛 송곳니가 깃들었다.
“호오? 아직도 더 해 보려고?”
“빨리 끝내 형. 아니면 내가 도와줘?”
“그만하시고 항복하시는 게 나으실 텐데요.”
카인, 레이나, 레논은 이내 각자 있던 곳에서 몸을 날려 프리드와 대치했다. 언뜻 보면 도망갈 틈이 넓어진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새 주변은 레이나가 불러낸 수많은 나무뿌리로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시끄럽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그림 늑대 백랑! 우리는 신의 명예와 위엄을 상징하는 자들이다!”
프리드는 결연한 태도로 몸을 날렸다. 그의 검에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렬한 핏빛 송곳니가 깃들어 있었다.
“이거, 조금 맛을 보여 줘야 하나?”
우우웅!
레논의 손에 들린 검 고이브누가 공명음을 내며 크게 요동쳤다.
“고이브누는 대장장이 신이지만, 그가 빚는 신주(神酒) 또한 뛰어났다고 하지. 거기다 그가 빚은 신주를 마시면 늙지 않는다 하여 모두가 얻기를 바랐다지.”
레논의 말을 따라, 고이브누의 동그란 머리가 마치 물방울이 떨어진 수면처럼 조금씩 흔들리더니 갑자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액체는 검은색에서 점차 은색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그 미친놈이 재현한 이 고이브누가 주는 신주는 불로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가는 독주지.”
흘러내린 은빛 액체는 마치 살아 있듯 바닥을 타고 프리드를 향해 빠르게 뻗어 왔다. 은빛 액체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불에 그을리듯 검게 변했으며, 풀들은 말라비틀어졌다.
“……!”
순간 네른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닿는 모든 것에 생명을 앗아 가는 은빛 액체나 프리드 때문이 아니었다. 은빛 액체와 프리드 중간에 아까 떨어뜨렸던 크레이돌이 엎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네른과는 달리 여전히 주문이 걸려 있는 터라 프리드에게도, 아울즈에게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 젠장!”
네른은 그 즉시 몸을 일으켜 온 힘을 다해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둘 중 어느 쪽이든 크레이돌에 부딪힐 것이었고 크레이돌이 부서지면 그 안 식염의 기운으로 폭발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네른으로서도 크레이돌에 걸려 있는 식염의 폭발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몇 발짝 뒤로 떼기도 전에 은빛 액체가 크레이돌을 덮쳤고, 크레이돌의 진흙 피부가 벗겨지며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
“……?!”
“어?”
모두가 갑작스런 붉은빛에 의아해하는 순간, 소리보다도 빠르게 시뻘건 화염이 터져 나와 사방을 덮쳐 갔다. 불길은 순식간에 사방을 덮었고 고이브누와 프리드를 집어삼키더니 이내 나무뿌리와 그에 잡힌 다른 기사들을 휩쓸었다.
“……!”
네른은 자신을 덮쳐 오는 불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네른은 이번이야말로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조용히 도망치는 건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네른은 알지 못했지만, 사실 식염이 가지는 파괴력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식염이란 주문은 어디에서 누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상대의 진형에 혼란을 준다거나, 갑작스런 폭발로 의도치 않은 피해를 입히거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걸어 두었다가 일시에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것이지 이렇게 한번에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건 아니다. 원래 식염을 걸 때는 이토록 강렬한 힘은 불어넣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문에 걸린 이가 주문을 견디지 못해 목표지에 도달하기 전에, 아니, 최악에 상황으로는 주문이 걸린 즉시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힘 조절을 할 줄 모르는 네른의 미숙함과 주문이 걸린 게 사람이 아니라 본래 담겨야 할 주문마저 생략되어, 텅 비어 있던 그릇인 크레이돌이라는 두 가지 상황이 맞물려 생긴 사고일 뿐이었다.
―멍청하기는.
그런데 순간, 차갑고 기분 나쁜 목소리가 네른의 귓가를 스쳤다. 네른이 그 섬뜩함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을 때, 그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자신을 덮쳐 오는 불길의 일렁임 하나까지도 다 보였다. 그리고 그 불길이 그를 덮치려 하는 순간, 그의 뒤쪽에서 터져 나온 불길에 도망쳤던 어둠이 되돌아와 그를 감싸 안았다.
“…….”
칠흑의 어둠 속에서 네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감싼 어둠이 죽음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아득해져 가는 의식을 그냥 놓았다.
불길 속에서 어둠은 이내 천천히 줄어들더니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물론, 어둠이 사라진 그곳에서도 네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을 덮쳐 가던 강렬한 화염이 지나가고 그 붉은 흔적들만이 남아 미처 다 태우지 못한 잔해를 게걸스럽게 핥고 있을 때, 아울즈가 서 있던 곳에 생겨난 커다란 검은 잿더미가 크게 요동쳤다.
투두두둑.
검거나 회색 재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속에 겹겹이 쳐져 있는 붉은색 나무뿌리 고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붉은 고치가 다시 크게 요동치더니, 나무뿌리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사라져 갔다.
“재빠른 대처였어. 레이나.”
고치 속에는 아울즈 3명이 그을음 하나 없는 모습으로 멀쩡하게 서 있었다.
“솔직히, 난 좀 늦었거든.”
레논의 손에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붉은색 커다란 망토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곧 그것을 다시 품속으로 넣었는데, 제대로 접지도 않았음에도 커다란 망토는 순식간에 품 안으로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 누나!”
“…….”
그러나 레이나는 그러한 레논과 카인의 말에 대답할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창백해져 있었다.
“……용암을 마신다는 사룡 히드라의 사체에서만 자라는 염목(炎木) 드라사이트의 뿌리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끌어 오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내가 한턱 크게 쏠 테니까 용서해 주라. 응?”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손에 들린 고이브누를 흔들자,
우우!
재에 파묻혔던 고이브누가 그 몸을 일으켰다.
그 몸을 감싸고 있던 각양 각색의 천들은 다 타 버렸지만 은백색의 몸체와 어느새 돌아온 검은색 둥근 머리는 그대로였다.
“아쉽군. 솔직히 이 정도 폭발을 맞은 건 처음이었는데 멀쩡한 건가? 아버지랑 형이 실망하겠군.”
탕!
레논이 손가락으로 검날을 때리자 일어선 고이브누의 모습이 투명해지는 듯하더니 사라졌다. 낮게 울리던 검의 울림이 멎자, 레논은 곧 고이브누를 그대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근데 대체 어디서 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난 거지? 달려들던 거 보면 그 지휘관 녀석도 몰랐던 눈치던데.”
“그 어린애가 한 거 아닐까?”
“그 애가?”
“응. 처음 봤을 때 그 애 투명했단 말이야.”
“호오, 너랑 달리 훨씬 뛰어나나 보네?”
“형!”
“둘 다 그만해. 일단 누가 어떻게 했든 지금 여기 우리 말고는 살아 있는 사람은 없는 거 같으니까.”
잡아 놓았던 백랑은 모두 재가 되어 버린 상태. 그들은 열려 있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들어가 보자고.”
“아아, 잠깐 레이나.”
레논은 걸음을 떼려는 그녀를 막아섰다. 그러고는,
“카인. 이번엔 너한테 전부 맡길게. 잡아 올 놈은 잡아 오고 처리할 놈은 처리해.”
“와아! 고마워, 형!”
그 말에 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카인! 레논 대체 왜……?!”
뭐라고 하려는 레이나를 레논은 그대로 뒤로 밀어 버렸다.
“……?!”
그녀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주저앉은 곳은 잿더미나 딱딱한 바닥이 아니었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푹신한 의자가 그녀를 받아 주었다.
“가만히 있어. 무리했으면 그만큼 쉬어야지.”
“하, 하지만…….”
“내 말 들으라니까. 고작해야 남은 몇 명 처리하거나 항복 권고하는 거야. 카인 혼자서 충분하다고.”
“그래도…….”
레논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얼굴을 그녀에게 바짝 갖다 붙였다. 그리고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조용히 물었다.
“정 걱정되면 나도 갈까?”
“…….”
그녀는 뺨에 홍조를 띄더니 곧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논은 더욱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되물었다.
“응? 나도 가?”
“……아니.”
“응? 뭐라고 했어?”
짓궂게도 계속 묻는 레논에 레이나 곧 고개를 들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가지 말라고!”
그녀의 그 외침에 레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또 다른 의자를 꺼내 들었다. 대체 그 작은 품 안에서 끊임없이 뭔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레논은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이번 일 끝내면 휴가라도 내고 우리끼리 여행이라도 갈래?”
“여행?”
“그래. 얼마 전에 루마스 폭포 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기, 기억했던 거야?”
쿵!
그들 사이에 때 아닌 핑크빛 무드가 조성되려 할 때, 갑자기 문 안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정말 카인에게만 맡겨 놔도 되는 걸까?”
“그, 그럼.”
그러나 레논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