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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20화)
8. 사고(3)
셰알. 요새 도시라고 불리며 수없이 많은 적국과 도적, 몬스터들의 공격에도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철옹성. 하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의 영광일 뿐, 이제는 그저 깊게 파인 거대한 구덩이일 뿐이었다.
과거의 영광의 잔재도, 베테르에게 통째로 점령당해 말로 표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일들만 반복되던 그 처참한 시간도.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삼발라의 푸른 불꽃에 완전히 산화된 것이다.
요새나 성은 커녕, 도시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거대한 구덩이. 이제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구덩이의 중심에 푸르스름한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는 점점 주변을 덮어 갔고 이내 그림자 속에서 옅은 푸른빛으로 형상하나가 걸어 나왔다.
“…….”
그것은 네른이었다. 삼발라가 덮쳤을 때 도망쳤던 그가 식염의 화염 속에서 어둠에 감싸여 모습을 감췄던 그가, 이제는 다시 셰알에 돌아온 것이다.
“…….”
하지만 그 모습은 평소의 네른과는 달랐다. 그 몸을 둘러싼 음산한 푸른빛도 푸른빛이었지만, 마치 홀린 듯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
그는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에서 뭔가가 나타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프리드였다.
“아아…….”
비록 폭발 가장 중심에 있었긴 했지만, 온 힘을 다해 핏빛 송곳니를 집중한 덕분에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즉사는 피했다지만, 녹아내려 몸에 완전히 붙어 버린 갑옷이나, 검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미약한 숨소리를 들어보아 살기는 그른 것 같았다.
이미 프리드는 고통 때문에 의식조차 잃은 채 사경을 해매고 있었다.
“…….”
네른은 천천히 프리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프리드 바로 앞까지 왔음에도 그는 쓰러져 있는 프리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꽂은 채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벗더니 네체른의 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입이 달그닥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어 갔다.
“……저승왕의 네 번째 아이여.”
네른은 책을 펼치지도 상처를 내 피를 내지도 않았다.
“하늘에 오르려 했으나 사막에 버려졌고…….”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시선은 허공에 둔 채 단 한 번의 끊어짐도 없이 중얼거리듯 주문을 읊어 가는 그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이질적이고 소름이 돋았다.
“저승의 강에 몸을 씻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거부당했다.”
주문을 읊어 갈수록 네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이 그의 손을 따라 네체른의 서로 흘러들어 갔다.
“신들에게 외면받고, 잠깐의 안식처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불쌍한 아이야. 그럼에도 누군가를 원망할 줄 모르던 가여운 아이여.”
그의 몸을 감싼 빛이 덜해질수록 네체른의 서는 더욱 밝게 빛나 갔다.
“너의 한탄으로 시체가 일어섰고, 너의 시선으로 악마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그 빛은 네체른의 서에서 다시 프리드를 향해 뻗어 갔다.
“깊은 얼음 골짜기에서 눈물 흘렸던 것을 고대의 혼령들이 안다. 용암 호수에서의 분노한 것을 용들이 안다. 올림푸스에서 절망한 것을 신들이 안다.”
프리드의 몸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커억!”
프리드의 몸이 들리면서 격한 숨을 내쉬었다.
“저승의 등대. 그 바로 아래에 묻혀 버린 비운의 아이야.”
“커억! 커억!”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문에 프리드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억지로 들어오는 무엇인가를 거부하듯.
“돌아와라. 부모에게 버림받고, 신들에게 외면당한 아이야.”
“아… 아아!”
주변을 덮은 안개가 프리드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돌아와라. 돌아와라. 돌아와라.”
프리드의 갑옷은 녹아내리는 것과는 달랐지만, 점차 형태를 잃고 흘러내리더니 프리드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꾸물꾸물.
또한 바닥의 흙 또한 조금씩 그를 덮어 갔다.
“황천의 안개를 영혼의 길로 삼고, 대지의 흙을 몸으로 삼으며, 이 생명을 피로 삼아 이곳에 다시금 살아나라.”
안개는 더욱 빠르게 그의 입속으로 흘러들어 갔고, 피부 속으로 스며든 갑옷을 대신 흙이 그의 몸을 덮었다.
“나의 충실한 신하. 반신(半神) 기간테스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네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르스름한 빛은 사라졌다. 허공만을 바라보던 눈도 감겼고, 그 몸도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네른이 쓰러진 것과는 상관없이, 안개는 계속해서 프리드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흙 또한 계속해서 그의 몸을 덮어 갔다. 바닥에 떨어진 네체른의 서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고, 프리드의 몸에서도 마찬가지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덮은 안개가 거의 사라지고 얼굴을 제외한 그의 온몸이 흙에 묻혀 갈 때쯤 네체른의 서가 번쩍였다.
“하아.”
프리드는 허공에 떠돌던 안개의 마지막 한 모금을 머금었고, 그런 프리드의 얼굴을 흙이 덮었다. 그리고,
화르르륵!
흙 속에서 푸른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하늘을 향해 타오르던 그 불길을 한참을 타오르더니 이내 천천히 꺼져 갔다. 불길이 꺼지고 네체른의 서도 빛을 잃자, 다시 빛 없는 밤의 어둠이 주변을 덮었다.
투두둑.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뭔가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유리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깨지는 것이 아니라, 부러지는 것 말이다.
툭툭.
이내 누군가 몸에서 흙을 털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다시 이 대지에 서게 될 줄은…….”
여러 감정에 휩싸인 복잡한 목소리. 깊은 느낌의 그 목소리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는 듯 침묵했다.
“삼발라…인가? 하긴, 강렬한 사기를 정화시키려면 삼발라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뭔가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발걸음 소리가 어디론가 향했다.
9. 기간테스(1)
“으음……?”
잠에서 깬 네른은 부드러운 촉감과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눈을 뜬 이곳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침실이었다.
“내가… 죽은 건가?”
마지막 기억이 터져 나온 식염의 불길 속에서 어둠에 감싸여 눈을 감았던 것임이 생각하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추측은 아니었다.
설마 어젯밤 일이 꿈이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란 말인가.
거기다 꺼낸 적도 없는데 손에 꽉 지어져 있는 네체른의 서와 재와 흙이 잔뜩 묻은 옷에 네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긴 어디지?”
네른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 불길과 어둠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을 감쌌던 어둠. 그 이질적인 기운과 그 직전에 들렸던 그 목소리. 그 느낌들이 아직 몸에 아직 남아 있었다.
“……역시 나 죽은 건가?”
이 푹신한 침대와 넓은 방. 그로서는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죽은 뒤의 세계나, 보상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해 낼 수 없었다.
“일어나셨습니까.”
“……!”
네른은 낯선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쪽 시야에 안 드는 구석. 그곳에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장발의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누, 누구……?!”
네른은 본능적으로 네체른의 서를 끌어당겼다.
“잊으셨습니까?”
검은색 탐스러운 장발, 새하얀 피부에 이지적인 이목구비, 거기다 지적인 목소리.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그 모습에 네른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말을 잊었다.
“당신께서 이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 네른의 머릿속에 자신의 기억인지도 헷갈리는 어떤 장면이 스쳤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그 이름.
‘내 충실한 신하. 반신 기간테스여.’
“기간테스?”
그 되물음에 눈앞에 사내는 그대로 몸을 숙였다.
“그렇습니다. 저의 주인이시여.”
네른은 어째서 자신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또 어떻게 그를 부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순간, 그는 저승 등대를 시전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등대가 완성되어 갈 때 어떤 알 수 없는 기운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지식들. 그의 몸과 입이 마치 홀린 듯 멋대로 움직였던 그때.
“어… 그러니까…….”
비록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머릿속을 휘저었던 그 지식들이 너무도 방대한 것이었다. 단지 그러한 지식들이 스쳐 지나갔었다는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만으로 기간테스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신들이 만들어 낸 유사신(類似神). 그러나 신에게 버림받고 저승 깊숙이 봉인되었다는 그 기간테스?”
“예.”
너무도 무덤덤하게 답하는 기간테스의 모습에 네른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어제 일도 그랬지만 갑자기 눈앞에 신급 존재가 서 있는 이 상황은 도저히 쉽게 와 닿지 않았다.
“…….”
“…….”
네른과 기간테스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네른은 자신을 응시하는 그 검은 눈동자에 쉽게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깨는 어떤 소리가 네른의 뱃속에서 울렸다.
꼬르륵.
“아, 이, 이건…….”
네른은 당혹감에 뭔가 말하려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체 어제 크레이돌을 시전한 후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정도까지 먹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허기가 지는지 네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던 기간테스가 몸을 일으켰다.
“시장하신가 보군요. 곧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아, 저, 저…….”
네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기간테스는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
혼자 남게 된 네른은 가만히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마을 사람 전체를 꼭두각시로 만들었고, 도망치려 만들어 낸 크레이돌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고대 유사신을 부활시켰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네체른의 서를 내려다보았다.
“…….”
새삼 그 능력에 감탄도 되었지만 또한 두렵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셰알 요새 때처럼 그 폭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네체른의 서 덕분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의식을 잃었다 일어나 보니 유사신을 부활시켰고, 기억에도 없는 곳에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