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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21화)
9. 기간테스(2)
“역시 이건 없어져야 하는 물건이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테르가 셰알 요새를 점령할 때도 대단하고 무섭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베테르야 원래부터 이상하고 잔인해서 표가 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베테르도 네체른의 서에 조종당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면 어쩌면 어느 날, 자신도 세계 정복이니 마왕 부활이니 하며 전 세계를 적으로 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갑자기 거대한 불안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베테르는 그 자신의 마력으로 책을 뒤흔들어 힘을 쥐어짜냈을 뿐이었다. 뛰어난 흑마법사이자 평생 동안 네체른의 서를 연구했던 그조차 피를 통해 그 힘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실제로 몇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마법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피를 이용해 네체른의 서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걸까.
“어떻게 된 거지?”
거기다 그 푸른 불빛이 도시를 덮쳤을 때 네체른의 서가 베테르가 아닌 자신을 선택했을까? 그는 그러한 의문들에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식사하시지요.”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나갔던 기간테스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고급스런 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혼자 먹기에는 좀 많아 보이는 빵들이 쌓여 있었다.
“…….”
네른은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헨슨이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기간테스는 쟁반을 침대에 놓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 아냐. 괜찮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한 거야. 그러니 어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시장하실 텐데 드시지요.”
기간테스의 정중한 요청에 네른은 빵을 하나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만든 지 오래된 듯 차갑게 식고 딱딱해져 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 신이야?”
“…….”
네른의 물음에 기간테스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네른은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아차 싶었지만, 기간테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신은 아닙니다. 그 이름을 받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제게는 너무 과분한 칭호였지요.”
왠지 슬퍼 보이는 그 모습에 네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계속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도 드시지요.”
“아, 고마워.”
네른은 기간테스가 내민 찻잔을 받아들었다. 신, 아니, 신이 될 뻔한 자가 건네는 찻잔이다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또 한편으로는 차갑게 식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네른이 차를 즐기거나 차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게 차갑게 마시는 차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
하지만 그가 뭘 어쩌겠는가. 비록 상대가 하인을 자처하고는 있었지만, 네른은 신에 가까운 자에게 불평을 할 정도로 담력이 좋지는 않았다. 거기다 기간테스는 그의 바로 앞에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렇게 한참을 딱딱하게 굳은 빵과 다 식어 버린 차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는 슬슬 이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주인께선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 아냐. 근데 기간테스는 안 먹어?”
“저는 괜찮습니다.”
“아, 그래…….”
네른은 곧 다시 빵과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미 배는 불렀지만,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쌓여 있던 모든 빵과 주전자 가득 차 있던 차가 다 없어지고 나서야 그는 식사를 멈출 수 있었다.
“다 드셨습니까?”
“아, 아 그래. 고마워 잘 먹었어.”
배가 불러 숨쉬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어쨌든 그렇게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듯했지만, 결국 그것도 잠시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럼 주인께서는 이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꽤 오랜 침묵 이후 기간테스가 먼저 그 입을 뗐다.
“음? 뭘…할 거냐니?”
“네. 저를 부르신 데에는 뭔가 원하시는 게 있었기 때문이 아니십니까?”
사실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네른으로서는 뭘 어쩌겠다는 생각으로 한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을 떠 보니 일어나 있던 일이었다.
“그, 글쎄?”
네른은 급히 기간테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 됐든 기간테스를 깨워 데려온 건 자신이었다. 그것도 하인으로.
“특별히 하시고 싶은 일은 없으십니까?”
기간테스는 아무렇지 않게 묻고 있었지만 네른은 괜히 가슴 한편이 찔렸다.
“아 저,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시선을 피하던 그의 눈이 네체른의 서에 닿았다.
“네, 네체른의 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
급조한 답이었지만, 네른은 나름 대답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왕 네체른이 만들었다는 것과 그 불길한 힘 때문에 필멸해야 되는 금서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으로 죽음의 저주를 피하고 있고, 자칫 전체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입장에선 단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곧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준비라니… 무슨 준비를?”
갑자기 밖으로 나가려는 기간테스를 네른은 급히 불러 세웠다.
“네체른의 서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거 아니십니까?”
“그, 그렇지. 근데?”
“그럼 네체른의 무덤으로 가실 생각이 아니십니까?”
마왕 네체른의 무덤. 원래라면 네체른의 서가 숨겨져 있던 그곳에 분명 책에 대한 다른 정보도 있을 터였지만, 네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긴 갈 필요 없어.”
“어째서……?”
“쓸 만한 물건이나 기록들은 그 늙은이가 벌써 다 챙겼었거든.”
마왕의 무덤을 찾은 베테르는 네체른의 서뿐만 아니라 거기 있던 온갖 마도구와 유물들을 챙겼다.
네른 자신도 그때 그 물건들을 실어 날랐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장식품 한 조각까지도 얼마나 닦달을 하면서 챙겼었는지 그는 아직도 지긋지긋했다.
“거기 남은 거라곤 텅 빈 관뿐이야. 아무 장치도 없고 무겁기만 하다고 버려 뒀거든.”
대신 몇 수레나 될 보물들을 가지고 말이다.
“그거 잘됐군요.”
“……?”
“진짜 중요한 건 그 관에 있거든요.”
“……!”
무덤덤한 기간테스의 그 말에 네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물론 어제처럼 정신을 잃고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그는 어제보다 더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저, 정말이야? 하지만 그 늙은이는…….”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그 관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챌 수는 없었을 겁니다.”
기간테스는 자신 있게 말하더니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그 마지막 물음에 기간테스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야 그 무덤은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 * *
“서둘러라.”
기간테스의 명에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큰 수레에 물과 음식들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간테스와 사람들 뒤에서 네른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기간테스에 의하면 이곳은 다노스 제국 하브 지역. 요새 도시 셰알이 위치한 텐쿠스 지역의 경계 바로 옆에 위치한 곳으로, 무덤이 있는 스네카 지역과는 꽤 거리가 되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산골의 한 작은 도적촌인데, 어젯밤 기간테스가 새벽 명성 집회를 걸어 점령한 것이다.
“…….”
네른은 가만히 기간테스와 네체른의 서를 번갈아 보았다. 그 행동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다만 다시는 사용하고 싶지 않던 새벽 명성 집회가 시전되었다는 그 사실이 기분 나쁠 뿐이었다.
물론 새벽 명성 집회라는 주문을 쓰기 위해서는 꼭 네체른의 서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다른 반응을 보였겠지만 지금은 단지 유사신의 권능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음…….”
그런데 수레에 실리는 음식들을 보며 기간테스는 뭔가 마음이 안 드는 듯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리고 있는 것은 밀가루와 조미료, 야채 그리고 약간의 빵들뿐이었다. 거기다 그조차도 양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사실 과거 펜릴을 믿는 사교가 번성한 이유는 있었다. 특히 테사르 지역과 이 다노스 지역은 그 토양이 거칠고 독초가 많아 식량 생산이 부족했다.
거기다 마물들이 많아 사냥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음식을 나눠 먹는 축제에 혹했던 것이다. 비록 지금에 와서 식인을 하는 괴식절로 변하기는 했지만, 과거에는 배고픈 이들이 사냥감들을 나눠 하룻밤 배불리 먹는 즐거운 축제였다.
어쩌면 펜릴을 신으로 모시게 된 것도 늑대인 펜릴의 힘을 빌어 사냥에 성공하고, 그 배고픔을 달래려는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마을이 살기 위해 도적촌이 된 것도, 샨 마을이 괴식절 같은 기괴한 축제를 벌리게 된 것도 모두 그러한 식량 부족에 따른 여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수레는 반 이상 비었지만 더 이상 채워 넣을 음식이 없었다. 안 그래도 식량이 부족한데 몇 달 전 있었던 셰알 요새 공격 때 바로 근처까지 온 대규모 군대 때문에 한동안 도적질을 커녕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느라 식량을 구해 놓지 못한 거였다.
기간테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꼭두각시가 되었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물과 음식은 먹여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이걸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제 야영 도구와 무기를 챙겨라. 아무래도 식량은 현지 조달을 해야 될 것 같으니.”
기간테스의 그 말에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야영 도구라고 해 봤자 고작해야 부싯돌들과 천, 땔감 정도였고 무기란 것도 조잡한 수준이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출발하실 수 있습니다.”
얼추 준비가 끝나자 기간테스는 네른에게로 다가왔다.
“그래.”
하지만 네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급히 출발해야 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아니, 먼저 말을 꺼낸 입장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괜히 움직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기 보단 이 마을에서 가만히 있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어제만 생각해도 괜히 백랑을 따라갔다가 사건에 휘말렸던 것 아닌가.
“뭔가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거기다 그로서는 이 기간테스의 존재도 부담이었다. 이 이지적인 사내가 취하는 깍듯한 태도에 그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니, 괜찮아.”
“예.”
물론 계속 반복되는 이 침묵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대화가 이어지지를 않으니 네른으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
“…….”
하지만 그렇다고 네른으로서는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사람들이 수레에 짐을 다 실을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