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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22화)
9. 기간테스(3)


“준비가 다 끝났나 보군요.”
“응.”
네른은 너무 긴장해서인지 기간테스의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주인이시여?”
“음?”
“마차에 오르시지 않으실 것인지……?”
“아, 아! 가야지. 그래.”
그제야 네른은 걸음을 떼 수레 옆쪽에 있는 작은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저 나무를 이어 붙이기만 한 수레와는 달리 마차에는 사자의 머리와 고급스런 장미 문양들이 곳곳에 조각되어 있었다.
조금 낡기는 했지만 어떻게 이런 작은 마을에 이런 귀족이나 탈 만한 마차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물론 지나가는 귀족의 마차를 강탈한 게 분명했지만 말이다.
“와!”
네른은 처음 보는 마차 내부에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붉은색으로 꾸며져 있는 내부는 마치 방이라도 되듯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기간테스는 어느새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손에는 마땅히 쥐어져 있어야 할 고삐는 보이지 않았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으, 응, 가자고.”
“출발하자.”
기간테스의 그 외침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마차와 수레를 밀고, 끌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젊은 남성 백여 명이 힘을 합쳤다고는 해도 식량 부족 때문에 식사도 잘하지 못하던 이들이었다.
지금이야 제대로 움직이겠지만 그들에게 마차나 수레를 오랜 시간 동안 끌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거기다 언덕이나 내리막길 같은 경우는 더 큰일이었다. 만일 놓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
그런데 기간테스의 손끝에 황색 기운이 모였다.
“가장 깊은 골짜기 게헨나. 그 아래에 깃든 힘을 해방하라.”
황색 기운은 흩어져 사람들에게로 뻗어 갔다. 그리고 기운은 사람들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사람들 이마에는 하나둘 백색 역삼각형 문양이 떠올랐다.
“그럼 빨리 가자.”
그 말에 마차와 수레를 끌던 이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마 언덕이나 내리막, 장거리 여행 등은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욱! 우욱! 자, 잠깐… 욱!”
정작 네른이 문제였다.
한번도 마차를 타지 않은 그에게 이 정도의 속도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네른은 지금 안 그래도 과하게 먹은 아침 식사였는데 그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천천히 가라!”
기간테스의 그 말에 마차의 속도는 급속도로 느려졌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을…….”
기간테스는 서둘러 네른을 챙겼다.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니, 괜찮아.”
말은 괜찮다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속도를 다시 늦췄다고 해도 한 번 시작된 게 가라앉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여전히 그는 속에서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느라 죽을 것 같았다.
“좀 누우시면 덜하실 겁니다.”
네른은 기간테스의 말대로 의자에 몸을 눕혔다. 특별히 나아지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일어나기에는 기간테스의 눈치가 보이는 네른이었다.
“욱!”
그렇게 네른은 한참을 더 시달린 뒤 속이 조금 안정되자 필사적으로 눈을 붙이려 노력했다. 이미 처음의 감탄은 사라지고 메스꺼움과 지긋지긋함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겨우 졸음이 그의 의식을 가렸다 걷히는 시간이 되고, 잠시 그가 눈을 감았다 뜨자 해가 서쪽으로 져 가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마을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원래라면 더 멀리 와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네른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한 결과였다.
“으, 음…….”
네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실질적으로는 오래도록 자기는 했지만, 덜컹이는 마차 속에서 푹 자지도 못하고 선잠만 계속 잔 터라 그로서는 잔 것 같지도 않고 피곤하기만 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네른이 일어난 것을 보고는 기간테스는 곧 마차를 멈췄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잠을 청하긴 했지만 속이 여전히 거북한 네른으로서는 아직 식사할 마음이 없었다.
“그럼 다시 출발할까요?”
“아, 아니!”
출발 명령을 내리려는 기간테스를 보며 네른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잠시 좀 쉬어 가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주변을 정리해 놓을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기간테스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마차의 균형을 유지시킬 몇 사람만 남기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음.”
그는 접시를 꺼내 아침 때와 마찬가지로 빵들을 쌓았다. 애초부터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기간테스가 워낙 많이 담다 보니 수레에 남은 양은 눈에 띄도록 줄어 갔다.
처음보다 반 조금 넘게 남은 빵들을 바라보며 기간테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선 모두 빵을 하나씩 집어 들고 먹어라. 목이 메면 물도 마시고. 못 먹은 이는 나중에 따로 먹도록 해라.”
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가와 빵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고작해야 스무 개 정도밖에 안 되었기에 빵을 집은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역시 불평 소리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명령에 충실할 뿐인 살아 있는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그들은 그저 명령 충실하게 빵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간간이 목이 멘 듯 물을 찾아 마셨지만 그 동작에 조급함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무기를 들어라.”
간단한 식사가 끝나길 기다린 기간테스는 곧 그들에게 무기를 들려서는 주변을 둘러싸게 했다. 산속 오솔길이라 마물의 공격도 걱정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사람들에 눈에 띄는 것도 문제였다.
“너희는 식사 준비를 하고 불을 피워라. 나머지들은 주변을 잘 지키고 누가 오는지 잘 살펴라.”
기간테스는 들고 있던 접시를 수레에 다시 내려놓았다.
“…….”
그는 한참이나 접시와 남은 빵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식욕이 없다는 주인을 위해 그나마 최고로 상태가 좋은 빵들을 남겨 두었지만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그는 네른이 있는 마차로 돌아왔다.
“주인님. 잠시 곁을 떠나 주변을 돌아보고 와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할게.”
네른의 허락에 기간테스는 보이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몸을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마부석 위에 접어두고는 천천히 숲 속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마차 안에 있는 네른은 이제 대체 뭘 어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되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도망쳐지는 대로. 그렇게 하고는 있었지만 뭘 하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어쩌면 누군가는 이러한 상황에 쾌재를 부를지도 모른다. 최강의 마법서 네체른의 서. 신이 되지 못했지만 그에 가까운 자 기간테스. 누군가는 그 힘으로 베테르처럼 세계를 가지려 할지도 모르고, 또는 다른 어떤 식으로든 그 욕망을 이루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른에게 그런 건 없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그 살아온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특별히 좋은 옷을 입고 싶지도 않고, 특별히 좋은 집에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힘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힘을 가진 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아…….”
그는 마차 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게 너무 힘들었다. 좋든 싫든 그는 샨 마을 사람들을 전부 꼭두각시로 만들었고, 백랑과 그들을 공격해 온 이들을 폭발에 말려들게 했고, 기간테스를 부활시켜 하인으로 삼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셰알 요새의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마왕 네체른의 부활을 노리던 베테르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 늙은이가 하던 짓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거기다 사실 기간테스에게 눈치가 보여 일단 마왕의 무덤으로 가기로 하긴 했지만 그다지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그때 셰얄 요새에서 보았던 푸른빛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그는 밖에서 자신을 대신해 고생할 기간테스를 생각하며 미안했다.
“근데 대체 왜 날 주인으로 모시는 거지?”
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는 신에 가까운 존재. 스스로 하인을 자처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주문의 효과일까? 아니면 기간테스는 그만큼 뭔가 따로 원하는 게 있는 걸까?
“거기다 그 무덤을 만든 게 자신이라니, 그건 또 무슨 의미인 거지?”
물론 마왕의 무덤을 만든 이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무덤이 존재한다는 기록도 없었고, 단지 시중 잡설처럼 막연한 전설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무덤이 발견된 지금조차, 베테르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대로 죽어 버렸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저 전설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어쨌든 만약 정말 기간테스가 그 무덤을 만들었다면 대체 그는 네체른과 어떤 관계였기에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마왕에게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덤을 만들었다면 대체 언제, 어떻게 봉인되어 명계로 갔다는 말인가.
“…….”
그는 기간테스가 돌아오면 용기를 내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라도 그 어색한 침묵은 더 이상 정말…….”
사실 그가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잠을 청한 이유는 물론 멀미 때문이었지만 그 어색한 침묵을 피하기 위한 것도 어느 정도 있었다.
꼬르륵.
속이 좀 안정되자 네른은 갑자기 허기가 도는 걸 느꼈다.
그는 고민했다. 기간테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스스로 나가 먹을 걸 찾을까.
“참아야 하나?”
평소 때라면 자기 혼자 대충 찾아 먹겠지만, 분위기를 보아 자신을 생각해 준비하고 있는 듯한데 그 성의를 무시하기가 좀 그랬다.
“에휴.”
그는 그냥 참기로 하고는 네체른의 서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그가 넘기는 책장 수 만큼 주문들이 그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다급한 순간을 대비해 외울 수 있는 짧은 주문들을 찾고 있는 거였지만 쉽게 찾아지진 않았다.
“저번에는 대체 어떻게 외웠던 거지?”
그 광기의 축제 중 기둥에 묶여선 가장 긴 주문들 중 하나인, 그것도 단 한 번 읽어 봤을 뿐인 새벽 명성 집회를 외웠던 그였지만 마치 거짓말처럼 지금은 그 첫줄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 이건 좀 짧군.”
그가 펼친 페이지에 적혀 있는 것은 몸 잇기라는 주문이었다.
“어디 보자.”
죽어 가는 이가 생애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 그 몸과 마계에 있는 존재를 뒤바꾸어 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주문이었다.
“…….”
당장이라도 외울 수 있을 만큼 짧은 주문이었지만, 네른은 책장을 넘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