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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23화)
9. 기간테스(4)
마왕 네체른이 과거 마계의 마족이나 병사를 이 세상으로 불러올 때 자주 사용했던 주문이었지만, 그에게는 필요 없는 주문이었다.
“그만두자.”
그렇게 좀 더 책장을 넘기던 네른은 결국 책을 접기로 했다. 하나같이 긴 주문이 아니면 괴물을 만들거나 부르는 주문이라 그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응?”
그런데 왠지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진 듯했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네른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
네른은 그대로 다시 마차 문을 닫아 버렸다. 바깥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고블린들이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자,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말과는 달리 네른은 재빨리 책을 폈다.
“그럴 리가 없지.”
다행히 좀 전에 한번 훑어본 터라 그는 쉽게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후우.”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마차 문을 박찼다. 혹시나 고블린이 가까이 있나 싶어 그렇게 연 것이었지만, 마차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네른은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는데, 마차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고블린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막혀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뭐?! 이거 뭐?!”
사실 고블린들은 상처를 입고도 계속해서 덤벼드는 사람들의 모습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작은 키에 뾰족한 코, 울퉁불퉁한 초록빛 피부를 지닌 이 고블린이라는 족속들은 그리 머리가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투 능력이 뛰어난 종족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하는 전법이란 것은 만만한 상대를 골라 급습해 당황시킨 다음 물건을 훔쳐 가는, 기껏해야 좀도둑 수준인 것이다.
본래라면 이 정도 규모의 집단은 건드리지도 않지만, 고블린들이 보기엔 규모에 비해 사람들의 행색이 초라하고,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도 조악했기에 쉬울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화살과 함께 사방에서 나타나는 자신들을 보면 당황하여 우왕좌왕할 것이고, 그 틈을 타 식량과 물건들을 쓸어 갈 계획으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새벽 명성 집회로 꼭두각시가 된 마을 사람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인간적인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기간테스가 내린 명에 따라 충실하게 고블린들을 막아섰다. 무기가 조악하고 마차와 수레를 오랜 시간 끌어왔고 이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고통도 두려움도 없는 꼭두각시, 거기다 기간테스의 주문으로 완력과 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이상 고블린 정도 상대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어쩌지? 어쩌지?”
“음! 음?! 음!”
고블린들은 상대의 뜻밖의 강력함과 그 기괴한 움직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제일 똑똑하다는 대장 고블린이 재빨리 대기 명령을 내려서 망정이지, 계속 멋모르고 공격했다면 전멸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첫 기습 때 고블린 병력의 삼분지 일이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물론 이렇게 대치 상황이 가능한 것도 순전히 기간테스가 내린 명령이 단지 주변을 지켜라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명령이 반격이나 공격에 관한 것이었다면, 대기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상황은 끝났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대장! 대장!”
고블린들은 대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물었다. 하지만 대장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봤자 고블린. 대장이라고 해도 아주 약간 더 머리가 좋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이 정도의 무력 차이를 목격했다면 아무리 자기들이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라도 대기 명령 따위가 아니라 후퇴 명령을 내렸어야 하는 거였다.
“어! 어!”
대장 고블린은 당황해서는 고개를 이리저리로 돌렸다. 자기 능력 이상의 기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그 작은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거기다 그 뾰족하고 큰 코만큼 예민한 후각 때문에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 피 냄새도 그에게는 문제였다.
“……?”
그런데 순간 대장 고블린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
마을 사람들 뒤쪽, 필사적으로 그들이 지키던 마차 가까이에 서 있는 어린아이. 바로 마차에서 내린 네른이었다.
“우…….”
대장 고블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행해 왔던 여러 번의 약탈들로 어떤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인간들은 때론 귀중한 물건보다 오히려 어떤 특정한 사람 한 명을 더 중요시 여긴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특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대체로 여자나 어린아이라는 것을 말이다.
“애! 어린애! 잡아! 잡아!”
“우우!”
“우우!”
대장 고블린의 그 말에 고블린들은 일제히 네른을 향해 돌진했다. 대장 고블린과 마찬가지로 다른 고블린들도 피 냄새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우오오!”
꼭두각시들이 막아서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기간테스는 주변을 지키라고만 했지 네른을 지키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 사이를 몇몇 고블린들이 파고들었고, 고블린들은 그대로 네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 나를 지켜!”
네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보고는 다급히 사람들을 불렀다.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케케케!”
그 부름에 고블린들을 막아서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등을 돌려 네른을 향했다. 그리고 고블린들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고블린들은 그들의 등에 칼을 꽂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억!”
비록 처음 네른을 향해 달려들었던 고블린들은 달려온 이들의 손에 처리되었고 그 또한 무사했지만, 이제 그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서른 명도 채 되지 못했다.
“…….”
네른은 펼쳐 놓았던 페이지를 넘겨 다른 주문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네른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람들 중 제일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이를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러즈, 쿨구레드, 카라드 하트세어…….”
주문이 이어지자 남자의 피가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투영된 허상에 담긴 조롱을 깨달아라. 어리석음에 취해 있는 자들아. 너의 오만은 누더기로 만들어 낸 옷이고 네 목소리는 당나귀의 그것과 같구나.”
네른의 목소리를 따라 대지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하늘에 다가가면 떨어짐이 두렵고, 높이 쳐든 고개는…….”
그림자들에서 검은 어떤 것들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마치 수많은 실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바람에 흔들거렸다.
“우우!”
“우우!”
조금 전 전과에 한껏 흥분했던 고블린들이었지만 그 기괴한 풍경 앞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합당한 대가를…….”
그런데 주문이 채 끝나기 전, 갑자기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져 고블린들을 덮쳤다.
“……!”
고블린 몇 명이 바위에 깔려 사라졌고, 남은 고블린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몇 고블린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
주문을 읊어 가던 네른도 그 모습에 놀라 주문을 멈춰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검은 그림자들도 사라졌다.
털썩.
주문이 끊어지자 네른이 손을 대고 있던 남자도 힘없이 쓰러졌다. 안 그래도 심한 상처를 입었었고 너무 많은 피를 뺏기다 보니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이 없게 된 것이다.
“…….”
네른은 바위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찾으려 했다. 그리고 다음 주문에 쓸 사람을 찾아 옆으로 데려왔다. 산사태 같은 것이라면 고블린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였다.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 기간테스?”
어느새 그의 옆에는 한 손에 멧돼지 한 마리를 든 기간테스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워…….”
“아, 아냐. 괜찮아. 근데 저 바위는……?”
“좀 전에 제가 던진 겁니다.”
꿀꺽!
네른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럼…….”
기간테스는 들고 있던 멧돼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버러지들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지요.”
기간테스가 걸음을 떼자 네른을 감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즉시 몸을 비켜 길을 텄다.
“구우! 구우!”
“구우! 구우!”
그런데 기간테스의 등장에 지금까지 위축되어 있던 고블린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뭔가에 이끌리듯 그들은 기간테스를 향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고블린이 지능이 떨어진다 해도 본능과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니, 오히려 지능이 떨어지기에 본능은 더욱 강하다.
강자를 알아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 정도의 압도적인 차이를 보고도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더한 적개심을 드러내다니. 이것은 평소의 고블린들과는 달랐다.
“호오.”
그리고 그런 고블린들의 모습에 기간테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놈들도 태초의 전투를 그 피에 기억하고 있다는 거냐?”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기간테스의 두 손에 황색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웠다.
“구우우!”
점점 다가오는 기간테스의 모습에 고블린들의 숨소리도 더욱 거칠어졌다.
“그래. 기억나는구나, 네놈들의 첫 번째 왕이. 구드락. 멍청한 주제에 욕심이 많은 놈이었지.”
“구우!”
고블린들은 무기를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이제 기간테스와 고블린들 간에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어디 덤벼 봐라. 그 피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태초의 기억을 재현해 주마.”
“죽여!”
“죽여!”
고블린들은 일제히 기간테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수적 차이이긴 했지만 기간테스의 얼굴에는 긴장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네른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네른의 얼굴에는 긴장이나 걱정보다 오히려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기간테스, 그가 누구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 중 가장 신에 가까운 자 아닌가. 그 힘을 비록 일부겠지만 눈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기대가 되는 건 당연했다.
“크아!”
처음으로 달려든 몇 명의 고블린이 그의 몸에 칼을 찔러 넣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챙!
금속음과 함께 그의 몸을 찔렀던 칼이 그대로 멈췄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그중 몇 개는 아예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작 이 정도인가?”
“죽어라!”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검이 그의 몸을 때렸지만 고블린들의 무기로는 기간테스의 몸에 작은 상처도 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고블린들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을 살짝 찢고는 기간테스의 가벼운 손짓에 저 멀리 날아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뿐이었다.
“죽어!”
그런데 그를 향해 달려드는 고블린들의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차이였다. 아무리 고블린이 지능이 낮다고 해도 눈앞에 뻔히 보이는 상대와의 역량 차이를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무의미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에 씌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잊지 그랬느냐. 그 어리석은 비극의 날을. 그 하찮고도 하찮은 마지막 미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