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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24화)
9. 기간테스(5)
두 팔을 감싸 안은 황색 기운이 더욱 거세져 이제 기간테스의 온몸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모래뱀.”
그 황금빛은 안개처럼 흐물거리는가 하더니 그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똬리를 트는 뱀처럼 그를 휘감았다.
“크아아!”
그러나 고블린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용감히 돌진했다. 그리고 그 황금빛들은 그들을 막아설 어떤 물리적인 힘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모래뱀은 말이지, 신의 사자지.”
“컥!”
그 황금빛에 조금이라도 몸이 스친 고블린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곤 급속도로 말라서는 이내 먼지로 변해 바스라졌다. 먼지 더미 사이에는 붉은색 보석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신실한 자를 물어, 그 생명을 공물로 대지의 신에게 바치게 돕지. 뭐, 그 공물을 가져갈 이는 너희의 신 가모스가 아니라 나지만 말이야.”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황금빛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고블린들을 덮쳐 갔다. 그 빛에 스친 고블린들은 저마다 먼지로 변했고 갖가지 색의 보석을 남겼다.
“죽어! 죽어! 주거……!”
그러나 그럼에도 고블린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뻔히 눈앞의 동료가 먼지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그 황금빛을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
침묵이 찾아오기까진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를 덮쳐 오던 도검들이나 시끄러운 포효들도 이제는 없었다. 그저 먼지에 뒤덮인 보석들이 넘쳐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
기간테스는 찢어져 걸레짝처럼 변해 버린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가 보여 준 괴력과는 달리 그의 몸은 마치 여성의 그것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그리곤 기간테스는 손짓으로 아까 자신이 마부석에 벗어 놓았던 겉옷을 가져오게 했다.
“보석들을 주워서 한 군데에 모아 둬라.”
윗옷을 가져온 이에게 그렇게 말한 기간테스는 옷매무새를 고친 후 네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에게서는 조금 전 전투의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하여 주인을 위험에 처하게 했습니다.”
기간테스는 그대로 네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해 왔다.
“아, 아냐. 괜찮아. 괜찮으니 일어나.”
네른은 당황해서는 급히 달려나와 손수 그를 일으켰다.
사실 조금 전 기간테스가 보인 신기는 보석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서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그리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비록 기간테스로서도 온 힘을 다한 게 아니겠지만, 베테르가 간간히 보여 줬던 그 끔찍한 마법들에 비한다면 다소 심심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오히려 네른은 용서를 구하는 그의 모습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또한 몇 번이나 베테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서 알고 있었다.
그 몸짓에 두려움이나 속임수 같은 것은 없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기간테스의 그 모습은 네른으로서는 그 어떤 모습보다도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자신을 일으키는 네른의 손에 기간테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기간테스는 현격하게 줄어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많이 줄었군요.”
기간테스의 그 말에 네른은 뜨끔했다.
“어, 어. 그렇네.”
“뭐 어차피 주문을 사용하기 위한 여분에 불과하다지만, 주인을 모시는데 불편함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됩니다.”
“아, 난 괜찮아.”
네른은 자신이 벌써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그가 지금까지 기간테스에게 한 말은 괜찮다는 말뿐이었다.
“하긴, 앞으로 제가 저런 인형들 따위보다 더 열심히 주인을 모시면 되는 법이지요.”
기간테스는 아까 내려놓았던 멧돼지를 다시 짊어 매고는 수레 쪽으로 가져갔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사를 대령하겠습니다.”
10. 꼬리 밟기(1)
“…….”
슈펜트는 다시금 드리워지는 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별들과 제 색을 찾은 달이 빛나기 시작했지만 그가 원하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아무리 그라 해도 뭔가를 알아내기에는 주어진 게 너무 없었다.
“…….”
그는 자신의 왼쪽 눈을 어루만졌다.
“다시 이 눈을 쓴다 해도 볼 수 있는 건 없다. 허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던 곳의 흔적에서 어린아이의 발자국은 찾아냈다. 발자국을 따라가며 계속 이 눈을 쓴다면 분명…….”
시간이 지나 왼쪽 눈은 회복되었다. 다시 써도 보이는 것은 단순히 어둠뿐이겠지만, 오히려 그 어둠을 따라간다면 찾고 있던 것에 가까워질 수는 있었다.
“아니, 아니지.”
그러나 슈펜트는 곧 마지막 미련을 떨쳐 버리듯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지. 설사 이 눈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해도 임무를 놔두고 찾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야.”
그렇게 말한 슈펜트는 곧 대원들이 향한 남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이 여전히 신경 쓰였지만 벌써 한나절이나 늦어 버린 이상 더 이상은 지체할 수는 없었다.
눈으로 보았던 곳은 단순한 거점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곳을 공격한 것만으로는 그림 늑대의 꼬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레논들이 몇 명이라도 제대로 생포해 놨다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슈펜트는 곧 눈을 감아 버렸다.
“기대하기는 힘들겠지.”
그의 손이 몇 가지의 문장을 그리는 듯하더니 땅에 드리운 그림자들이 그를 감쌌다.
“그림자 뛰어넘기.”
그림자를 휘감은 그의 몸이 밤의 어둠 속으로 점점 녹아내렸다. 그리고 이후 그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처음 그 모습이 사라진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림자 뛰어넘기.”
그리고 그것을 몇 번 반복했을 때, 그는 어느새 그림 늑대의 오두막이 있었던 숲의 초입에 도착해 있었다.
“대충 이쯤일 텐데. 녀석들한테 맡겼으니 분명 이쯤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코에 심한 탄내와 잿가루가 스쳤다.
“읍!”
그는 급히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러나 당혹감 대신 그 눈에는 ‘역시’라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저쪽이군.”
그는 곧 다시 몸을 날렸다, 잿가루와 탄내가 심해지는 근원지로. 바로 그곳에 레논들이 있을 거라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지나자 검게 탄 채 서 있는 나무들이 보였고, 조금 더 가니 잿가루만 내려앉아 있는 공터가 나타났다.
“…….”
공터에 도착한 그는 한쪽으로 걸어가더니 땅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쌓여 있던 재들이 날리며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가볍게 철문을 들어 올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괴상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시끄러운 초인종이군.”
탁!
슈펜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경보음이 한 번에 멎었다. 그리고 곧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오는군.”
그리고 그 앞에 곧 다른 아울즈 세 명이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늦었네요, 오라버니. 일은 다 끝내셨나요?”
“너무 늦었어요.”
“…….”
세 명의 환영 인사에 침묵으로 답한 슈펜트는 잠시 그들과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그건 그렇고. 이번엔 평소보다 더 대단하게 한 것 같더군.”
슈펜트는 그렇게 말하며 복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명 없을 거라 예상은 하면서도 분명 있기는 있을 포로와 기지 안에 있을 각종 기록들을 확인하려는 거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다른 세 명이 뒤따랐다.
“아, 저기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밖을 저렇게 만든 건 사실 저희가 아닙니다.”
“호오. 꽤나 저항이 심했나 보지?”
“네. 웬 어린애가…….”
멈칫.
카인의 어린애라는 그 말에 슈펜트의 걸음이 멈췄다.
“어린애?”
“네. 투명해지는 어린애가…….”
“아니, 확실한 건 아닙니다.”
레논은 답하려는 카인을 막으며 말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지휘관과의 전투 중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는데 누가 어떻게 한 일인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하지만 형! 그 어린애가 나타난 뒤에 폭발이 일어났잖아! 거기다 그 어린애 시체도 안 나왔고!”
“카인. 그건 아무 증거도 되지 못해. 시체는 그 지휘관의 것도 안 나왔잖아. 아니, 아예 나온 시체 자체가 없지. 미리 잡아 두었던 사람들도 그렇고 바닥에 있었던 다른 시체들도 그 폭발 속에서 다 타 버려서 재가 됐잖아.”
“칫! 누나까지. 하지만 그 녀석은 분명 투명해져 있었단 말이야!”
“다른 누가 투명 마법을 걸어 줬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마법을 걸어 준 녀석이 그 폭발을 일으켰을 수도 있고.”
“아니라니까 정말!”
카인은 억울하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했지만, 단순히 직감일 뿐 논리적인 근거라곤 없는 그 말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설사 그게 정답이라도 말이다.
“…….”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처음 어린애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슈펜트는 멈춰 서서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린애라…….”
“슈펜트 님?”
“오라버니?”
슈펜트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는 다른 세 명을 지나쳐 다시 밖으로 나갔고, 가려져 있던 왼쪽 눈을 드러냈다.
“…….”
“…….”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다른 3명은 그저 가만히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 그랬단 말이지.”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붉은 화염 속을 바라본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샨 마을에서와 같은 어둠이었다.
“뭔가, 보셨습니까?”
레논의 물음에 슈펜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카인에게 다가가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때려 맞춘 거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정답인 것 같구나.”
“……!”
슈펜트의 그 말에 카인의 얼굴에 득의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헤헤! 봤지? 봤지? 누나랑 형 봤지? 내 말이 맞다니까!”
“정말이십니까 슈펜트 님?”
“정말, 그 어린애가 그런 건가요, 오라버니?”
“뭐 확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말한 슈펜트는 천천히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직 먼 것 같구나.”
“네?”
“……?”
“무슨……?”
순간 슈펜트의 왼쪽 눈이 한층 더 빛났다.
“아무리 조금 떨어진 거리라지만 아울즈가 어둠 속에서 머리 위를 내주다니 말이다.”
사방으로 퍼진 붉은빛에 주변이 환해졌을 때, 저쪽 나무 위 그림자들 속에서 검은 인영들이 드러났다. 한눈에 보아도 이삼십 명은 될 것 같은 그들은 온몸을 검은 옷과 도구들로 감싼 채 어둠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서, 설마… 대체 언제부터!”
“전혀 눈치를……!”
“와아! 적이다, 적!”
슈펜트는 손을 들어 당황하는 레논들을 진정시켰다.
“밤까마귀군. 이 정도 수라면 상황을 살피러 온 것 같지는 않고. 뒷정리를 할 생각인가?”
착!
대답은 없었다. 대신 작은 소리였지만 검이 뽑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재밌군. 까마귀들 따위가 우리 아울즈에게 덤비겠다는 건가? 잠시 잠깐 잔재주로 눈을 속였다고는 해도 네놈들의 부리가 우리의 발톱을 이길 수 있을까?”
슈펜트는 품 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그는 조용히 품 안에서 필요한 인을 맺고 있었던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