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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1(8화)
제4장 아르바이트(2)
한편, 장미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씨익 웃었다.
아빠 회사의 이 부장에게 철호의 뒷조사를 부탁했는데 대부분 철호가 말한 대로였다.
케이대 이과대학 수학과 1학년 휴학 중이고 군대에도 다녀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철호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도 알게 되었다.
선릉 근처의 삼성동 개나리 빌라에서 살고 있으며 어머니는 어려서 돌아기시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었다.
그런데 군대에 가기전의 사진과 너무 달라서 딴 사람인 줄 알았었다. 심하게 뚱뚱해서 지금의 철호와는 연상되지 않았다.
“호호호… 어쨌든 지금의 모습이 중요하지.”
뒷조사 이후 철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문자까지 넣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달이 지난 오늘 불쑥 전화가 걸려 와서 처음에는 당황했다.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는데 철호가 사과를 하니 화가 났었던 것이 사르르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철호가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는 말에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마침 청바지 화보 촬영이 내일 있다는 걸 알고는 철호를 모델로 삼아 버렸다.
메인 모델도 아니고 여러 명의 남자 모델 중에 하나이기에 얼마든지 장미가 결정할 수 있었다.
청담동 커피 전문점 헤라.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철호는 카푸치노를 시켜 마시면서 장미를 기다렸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장미가 선글라스를 끼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철호의 자리에 앉았다.
“언제 왔어?”
“30분 정도 전에 왔어. 뭐 마실래?”
“나도 카푸치노로 할게.”
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장미는 선글라스를 머리띠처럼 꽂더니 물을 마셨다.
철호가 카푸치노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장미는 철호를 살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한 달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이네? 산에 들어가 뭐했어?”
“그냥 운동 좀 했어.”
“혼자서?”
“어, 심신을 좀 수련하려고 하다 보니 혼자가게 되었어. 그런데 청바지 화보 모델은 어떻게?”
“응,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마침 청바지 화보 모델이 필요해서 내가 널 소개시켜 주려는 거야.”
“만약 내가 화보 촬영을 하게 되면 술 한잔 살게.”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야.”
철호와 장미는 카푸치노를 다 마시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장미는 은색 벤츠를 운전하고 왔기에 그걸 타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레이스 최 스튜디오 앞에 벤츠가 멈추자 조수석에서 먼저 철호가 내렸다.
건물의 외부적인 모습만으로도 고급 스튜디오라는 게 느껴졌다.
장미가 벤츠에서 내리더니 철호 곁으로 다가왔다.
“혹시 저 스튜디오야?”
“응, 맞아.”
철호는 장미를 따라 그레이스 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파파팟!
스튜디오에서는 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장미가 유리로 된 사무실로 들어갔기에 철호도 뒤따라 들어갔다.
금발로 염색한 미녀가 앉아 있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장미야, 어서와.”
“언니, 반가워.”
“2년 만인가?”
“응, 그렇게 되었어. 이쪽은 내가 추천하는 청바지 모델.”
“그래?”
그레이스 최는 철호를 아래위로 살펴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키가 크고 당당해 보였기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난 프로 사진작가 그레이스 최라고 해요.”
“전 김철호라고 합니다.”
“잘생긴 외모에 키까지 크니 좋군요. 이쪽 일 해 봤어요?”
“아니,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래요? 일단 합격이에요.”
“예? 정말입니까?”
“그래요. 스탭들과 인사를 시켜 줄 테니 날 따라와요.”
“예, 알겠습니다.”
철호가 그레이스 최를 따라 갔더니 스탭들이 전부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레이스 최는 철호를 스탭들에게 인사시켜 주었고 철호와 스탭들은 서로 악수했다.
뿔테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스탭이 철호에게 다가와 청바지를 내밀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 청바지를 입고 나오세요. 아참, 상반신은 벗어야 됩니다.”
“예? 아…알겠습니다.”
철호가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고 나왔다.
장미와 그레이스 최는 철호의 잘 발달된 근육질의 몸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처에 있던 스탭들까지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레이스 최는 몸에 바르는 오일을 가지고 철호에게 다가갔다.
“사진 잘 나와야 하니까 이 오일을 발라 줄게요.”
“예? 아예.”
철호가 그대로 서 있자 그레이스 최가 직접 철호의 상반신에 오일을 발라 주었다.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보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철호의 모습이 멋졌다.
철호가 상반신에 오일을 발라서인지 더 멋져 보였다.
그레이스 최가 카메라를 들고는 연습으로 몇 방 찍었다.
화면을 확인한 그레이스 최가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멋져!’
장미가 그레이스 최 곁으로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언니, 어때?”
“최고야, 어디서 저런 물건을 구해 왔니?”
요즘 잘나간다는 여자 탤런트와 두 명의 남자 모델이 청바지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런데 두 명의 남자 모델들은 철호와 비교하니 너무 큰 차이를 보였다.
철호에게서는 잘생긴 얼굴과 강인한 남자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두 명의 남자 모델들은 들러리처럼 너무 가볍게 보였다.
여자 탤런트 모델을 가운데 두고 철호와 남자 모델 2명이 자리를 잡고 서자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레이스 최는 여자 탤런트 모델과 철호만 연인처럼 포즈를 잡게 했더니 잘 어울렸다.
‘역시 단독 사진이나 여자 탤런트 모델과 둘이서만 찍는 게 잘 어울려 보여.’
그레이스 최는 철호와 여자 탤런트 모델만 찍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2명의 남자 모델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기에 같이 찍기로 했다. 각자의 독사진부터 찍더니 철호와 여자 탤런트 모델이 다정한 연인들처럼 포즈를 취하며 찍었다. 그리고 철호를 빼고 2명의 남자 모델들이 여자 탤런트 모델과 다정한 모습도 연출하여 찍었다.
3시간 정도 사진 촬영을 하니 작업이 끝이 났다.
장미는 사진 촬영 작업을 할 때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 잠시잠깐 휴식을 할 때 장미가 철호에게 물을 가져다주곤 했다.
말은 안 해도 장미와 철호가 서로 사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철호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유리 사무실로 들어갔다.
장미와 그레이스 최가 앉아 있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처음해 보는 일이라서 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문 모델들처럼 아주 잘했어요. 마음에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최가 봉투와 명함을 내밀었다.
“이건 오늘 모델비이고 이건 내 명함이에요.”
“전 명함이 없는데 어쩌죠?”
“그럼 메모지에 연락처를 남기고 가요. 아참, 내일 수영복 촬영이 있는데 해 볼래요?”
“예, 제가요?”
“수영복 모델해도 잘 어울리겠어요.”
“감사합니다. 내일 이곳으로 오면 됩니까?”
“그래요. 오후 1시경에 스튜디오로 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철호는 그레이스 최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장미와 함께 스튜디오를 나왔다.
“오늘 모델비도 받았는데 뭘 사줄까?”
“음…갈비 사 줘.”
“……!”
인근에 있는 최고 갈비 집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갈비 일 인분에 4만 원이었다.
‘젠장, 오늘 번 거 다 쓰겠군.’
그렇다고 남자의 자존심에 나가자고 할 수도 없었기에 갈비를 시켰다.
지글지글.
불판에서 갈비가 맛있게 익어 갔다.
갈비를 상추에 싸서 장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장미는 기분이 좋은지 씨익 웃으면서 받아 먹었다.
철호도 고기 한 점을 먹어 보았다. 비싸서 그런지 갈비는 부드럽고 정말 맛있었다.
모델비로 30만 원을 받았을 텐데 식사비로 다 나갈 거 같았다. 그래도 이왕 먹는 거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다.
음료수와 된장찌개, 밥을 먹고 후식으로 수정과를 마셨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20만 원이나 나왔다.
봉투를 꺼내어 보니 놀랍게도 모델비가 백만 원이나 들어 있었다.
“어? 이거 너무 많은데?”
“얼마 들어 있는데?”
“백만 원이나 돼.”
“언니가 철호 씨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런 거야?”
“응, 오늘 철호 씨 정말 멋있었어.”
모델비 백만 원이 잘못 넣은 게 아니라는 말에 안도했다.
그런데 식사비를 장미가 카드로 계산했다.
“어? 식사비는 내가 낼 건데?”
“아냐, 다음에 사. 오늘은 내가 낼 거야.”
철호는 장미의 은색 벤츠를 타고 개나리 빌라 앞까지 와서 멈추었다.
원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집 앞까지 오게 되었다.
“오늘 고마웠어.”
“응, 앞으로는 내 전화 잘 받아야 돼?”
“아…알았다.”
철호가 손을 흔들자 장미의 은색 벤츠가 출발해 멀어졌다.
앞집의 보라가 걸어오는 걸 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보라는 한 달 정도 보지 못했던 멋진 남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은색 벤츠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개나리 빌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몇 호에 사는 남자인지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철호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그 남자를 놓쳤어, 너무 아까워.”
보라는 속상해하며 빌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보라를 투시하던 철호는 씨익 웃었다.
“후후후, 몇 호에 사는 남자인지 정말 궁금할 거다.”
짹짹!
개나리 빌라의 화단 소나무에 작은 새 두 마리가 내려앉아 지저귀더니 날아가 버렸다.
거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로렌스 마나심법을 운용 중이던 철호는 심법을 중지하고 눈을 떴다.
벽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전 11시가 넘어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레이스 최의 스튜디오에서 오늘 수영복 촬영이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라면을 끓여 먹고 샤워했다.
입고 갈 옷을 고르려고 옷장을 열었지만 예전 뚱뚱하던 때에 입었던 옷들만 있었기에 입을 만한 게 없었다.
“으음… 몇 벌 구입해야겠군.”
청바지에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빌라를 나섰다.
손목시계를 보니 정오였다.
버스를 타고 가도 10분이면 충분하기에 늦지는 않아 보였다.
버스 정류장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에 앞집의 보라가 보라색 민소매에 흰 반바지를 입고 서 있었다.
각선미가 돋보였다.
핸드백을 메고 책을 안고 있는 여대생의 모습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흰 반팔 티셔츠를 입은 철호가 버스 정류장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보라는 철호가 나타나자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한 철호의 등장이었다.
철호는 보라는 모른 체하며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계속 주시하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버스가 도착하자 철호가 타더니 뒤쪽으로 가서 섰고 보라가 그 옆으로 다가와 섰다.
둘은 서로 말은 없었지만 의식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보라가 먼저 철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개나리 빌라에 사세요?”
“예, 그런데요?”
“몇 호에 사세요?”
“그건 왜 물어봅니까?”
“아…아니, 궁금해서요.”
“대답 안 해도 되죠?”
“……!”
철호가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보라는 걸어가는 철호의 뒷모습을 계속 주시하며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미녀 보라가 말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을 것인데 철호는 냉담할 정도였기에 그게 신선하지만 분했다.
‘두고 봐, 꼭 알아낼 거야.’
그레이스 최의 스튜디오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철호는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레이스 최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철호는 보고는 손짓했다. 유리 사무실로 들어가자 그레이스 최가 말했다.
“철호 씨는 혹시 무슨 운동을 했나요?”
“예? 특별히 한 운동은 없습니다.”
“그래요? 어쨌든 철호 씨는 모델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요. 정식으로 모델로 데뷔해서 나와 같이 일해 볼 생각 있어요?”
“음… 생각지도 못한 제의라서 생각 좀 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좀 더 생각해 보고 말해 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서 어제 그 스탭에게 가면 오늘 수영복 모델에 관한 걸 알려 줄 거예요.”
철호가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