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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7화)
第三章 혈귀도마(血鬼刀魔) 대찰영(大刹影)(1)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린 달빛이 비추는 가운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산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속도가 워낙 빨랐지만 잠깐잠깐 멈춘 사이 달빛에 비친 그의 몸은 나체였다. 구릿빛 피부에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거려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내는 한참이나 발정난 개새끼마냥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이내 어느 한곳에서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토해 내는 그의 어깨는 심하게 들썩였다.
뜨거워진 육체와 쉬지 않고 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진정이 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빌어먹을, 마존(魔尊)!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같으니라고.”
일 년이면 극강의 능력을 가지게 만들어 주겠다고 살살 꼬드기는 소리에 넘어가 무공을 익혔더니 정신적으로 너무나 망가져 버렸다.
마공을 익힌 후유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마인곡에서 어떻게 튀어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밖이었고 벌써 그런 지가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지금처럼 마성이 잦아들면 평소처럼 되돌아오지만 언제 또 자신이 아닌 괴물로 변해 버릴지 몰랐다.
아직도 뇌가 찌릿거린다.
“내 마인곡으로 돌아가면 그놈의 허리부터 아작 내 버릴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사내는 지속적으로 마존이라 칭한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쉬지 않고 내뱉어 냈다.
듣는 이가 있었다면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강한 발음이 섞인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게 없었다면 마존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짙은 복수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에게 마존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마성에 젖어 살생을 쉬지 않고 저지르는 자신의 모습에 당장이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어졌다.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사내는 지친 몸을 질질 끌며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동굴 입구로 사내는 들어갔다.
성인 남자 다섯이 들어오면 꽉 차 버릴 작은 공간이 사내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쪽 구석에서 낡은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마성에 정신이 지배당하고 난 뒤면 항상 나체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정신이 있을 때 산 밑으로 내려가 옷을 훔쳐 미리 동굴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사내는 옷들을 모두 입고는 미련 없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는 마성이 완전하게 멈추는 것을 기다렸다가는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시간이 지나야 할 듯싶었다.
어떻게든 마인곡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그 중간에 다시금 정신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만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거라는 두려움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바다를 이용하여 이동을 할 생각이었지만 재수 없게도 매번 포구 근처만 가면 발작 증상이 일어나서 한동안 이 근처에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이제는 동정호를 넘어갈 작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마인곡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는 것만이 마성을 잦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내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어두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전 사내는 가장 빨리 출발하는 배를 타고는 넓디넓은 동정호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망망대해와도 같은 파란빛 물결을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싶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배를 탔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묘한 긴장감과 조급함이 공존하여 사내를 괴롭혔다.
‘대찰영 인생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사내, 대찰영은 뱃머리에 앉아 거세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빨을 세게 다물었다.
그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되었다.
그리고 대찰영의 인생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였다.
대찰영은 사천성(四川省)에서도 도법으로 알아주는 환도문(幻刀門) 장로인 사자도왕(獅子刀王) 대모수(大暮帥)의 독자로 태어났다.
환도문은 사천성에 뿌리를 내린 지 사십 년 만에 그 일대는 물론 중원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대한 무가로 성장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십오 년 전 갑작스럽게 멸문지화를 당한 이후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 지 오래였다.
무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대찰영은 특이하게도 무공을 배우지 않았었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그의 부친인 대모수의 뜻이었다. 무림인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아들이 관직에 올라 평범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찰영은 무공 대신 이름 있는 서적들을 읽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었다. 대모수는 자신의 가족들은 항상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게 했었다. 그래서 대찰영은 아버지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대모수는 자신으로 인해 부인과 자식이 피해를 입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것이다.
그 덕분에 환도문이 정체를 알기 힘든 자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적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충격으로 대찰영의 모친은 일 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린 그는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대장간에서 먹고 자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책만 읽던 그가 육체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범의 자식이었다. 무인에게는 제 몸과도 같은 병기들을 만지작거리는 작업은 딱 맞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큰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빠르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장간 주인이 가르쳐 준 기술들을 습득해 나갔다.
그 와중에 대찰영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 왔다. 허나 자신에게는 힘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렇게 스물여덟 살 되던 해 ‘그’가 대찰영을 찾아왔다.
“복수를 하고 싶으냐.”
볼일을 보고 싶은 마음에 새벽에 깨어서 밖으로 나온 대찰영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기껏해야 약관을 넘었을 것처럼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런 어린 자가 대뜸 자신에게 한 말이 복수를 하고 싶으냐는 말이었다. 그것도 반말로 그런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헛꿈을 꾸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대찰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환도문. 대모수가 죽은 이유가 궁금하고, 복수를 할 마음이 있다면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화월객잔으로 오면 된다.”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은 사라졌다.
대찰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청년의 어린 음성이 환청처럼 떠나질 않았다. 자신이 환도문 대모수의 자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헌데 저 청년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 환도문을 저리 만든 자들이 자신을 해하기 위한 계책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살려고 악착같이 버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죽기에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대찰영은 다음 날 청년이 오라고 한 장소로 향했다.
물론 대장간 주인에게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의 짐과 그동안 모은 돈을 챙긴 뒤였다.
청년에게는 동행자가 있었다.
살짝 뚱뚱한 몸매인데다 살짝 찢어진 눈매에 눈과 입이 크고, 코는 낮고 뭉툭한 자였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낮의 햇빛을 받은 그의 머리가 반짝거렸다는 거였다.
청년의 뒤에 있던 대머리 사내는 대찰영을 쳐다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굉장히 그 눈빛이 불쾌해 한마디 하려는데 청년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나를 따라 오면 수년, 아니 단 일 년이면 강해진다.”
“…….”
대찰영은 청년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왔다.
무공을 배운 적도 없고, 배우기에도 늦은 자신에게 일 년이면 강해질 수 있다는 저 자신감 있는 눈빛과 말투는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헌데……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냥 얼굴만 봐도 자신보다는 어려 보이는 자에게 당연하게 존대가 흘러나왔다.
“나? 그냥 앞으로 마존(魔尊)이라고 부르면 된다.”
청년은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같은 남자를 보며 표현하기에는 조금 이상하지만 대찰영은 그의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안 물어보냐?”
대머리가 대찰영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 이름은 담천(潭泉)이라고 한다.”
마존이라고 부르라던 청년이 등을 돌렸고 담천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보았다. 담천의 등에 거대한 철궁이 메어져 있는 것을.

“후우.”
그게 벌써 이 년 전 일이었다.
대찰영은 그때 자신이 내린 결정에 극심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혼자서 과거를 회상하던 대찰영은 선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빛의 속도로 뭔가 자신의 면상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분명 놀랐지만 마음을 다잡고 피하려 했다. 확실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지만 그건 대찰영의 착각이었다.
빠악!
정확하게 콧등을 가격당했다. 무슨 물건인지는 알지도 못했다.
정통으로 맞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이 몰려와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 준 인물을 찾았다.
해맑게 처웃으면서 자신의 주변을 알짱거리는 이십 대 초반의 남자, 그리고 그를 노려보며 씩씩대는 십대 중후반의 어린 소녀였다.
대찰영은 소녀의 오른발에 신이 없는 것을 보고는 자신을 맞춘 물건이 그녀의 신발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힘이 쫙 풀리면서 잊고 있었던 고통이 다시금 밀려들어 왔다.
하지만 더 미치겠는 건 자신들의 실수로 고통 받은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저 두 남녀는 말이다.
“이봐, 청년.”
대찰영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젊은 사내를 불렀다. 허나 쳐다도 보지 않는다.
사내의 손에는 여자들이 머리에 꽂는 비녀가 들려 있었다.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인 대찰영이 딱 봐도 굉장히 고가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아마도 남매로 보이는 저 인간들이 장난을 치는 것에 자신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 시작했다.
“이봐, 친구!”
그래도 점잖은 말투로 불렀다. 다만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어이!”
그래도 대답이 없자 대찰영은 약간 거친 말투를 사용했다.
“어이, 거기 꼬맹이!”
젊은 사내가 이죽거리며 다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고 소녀는 그런 남자의 뒤를 쫓았다.
“저 핏덩어리가 진짜!”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던 대찰영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몸을 날렸다.
나무로 만든 배의 바닥을 살짝 찼을 뿐인데 그의 몸이 붕 떠올라 순식간에 젊은 사내의 앞에 나타났다.
“뭐냐.”
“이리 내놔, 사우!”
젊은 사내, 사우가 달리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자 초미는 급히 그의 손아귀에서 비녀를 빼앗았다.
사우는 눈앞에서 갑자기 자신의 길을 막아선 대찰영을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살폈다.
“이 건방진 노무 새끼 같으니라고!”
대찰영의 입에서는 듣기 거북한 쌍욕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자신이 화가 무진장 나 있다는 걸 상대에게 확인을 시켜 줬음에도 눈앞에 젊은 놈은 멀뚱하게 올려다볼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놈의 버릇을 고쳐 주겠노라 다짐했다.
짜악!
허나 오른쪽 볼이 화끈거리는 건 바로 대찰영 본인이었다.
사우는 대찰영이 손을 올린 순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뺨을 먼저 때린 것이다.
고개가 돌아가고 뒷걸음질 쳐진 대찰영은 순간 당황해 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복부에 뭔가 묵직한 것이 꽂힘과 동시에 허리가 꺾여 버렸다.
목구멍 안에서 쓴물이 분비되어 입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동시에 콧속이 시큰해져 왔다.
이렇게 단순한 주먹으로 배를 얻어맞아 본 적이 언제였을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무공을 배운 자신이 새파랗게 어린 청년의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찰영은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몸을 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사라지는 사내의 등을 보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