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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11화)
第四章 은원(2)
동료였던 자들의 배신이라는 신도천의 말은 바로 그것을 뜻했다. 권력을 누리던 자리를 박탈당한 패천문은 서서히 그 힘을 잃어 갔고, 심지어 남북천맹에 소속되어 있는 문파들로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일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천하와 싸움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사천성에서 가장 강한 네 개의 문파가 연합 체제를 구축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마련이었다.
비록 그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천기원이 생겨난 이래 단 한 차례도 어떤 집단에게 힘을 실어 준 적이 없습니다.”
“사마련은 천하를 상대할 작정입니다.”
“글쎄요. 상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죠. 허나, 천하를 아우르는 남북천맹을 이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천기원 수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절대적인 진리였다. 신도천은 이를 악물었다.
“한심하군요. 겨우 천기원주라는 자가 이토록 담이 적은 자였다니.”
신도천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하제량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어떻게 보면 싸늘하기까지 한 그의 눈빛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개소리! 당신은 지금 겁에 질려 빌빌거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신도천은 냉정을 잃어버렸다. 하제량의 변하지 않는 모습,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그의 화를 돋우기 충분했다.
하제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아니면 처해진 현실에서 도망치고픈…… 뭐 지금의 전 그런 셈이죠.”
순순히 인정했다.
현재 하제량은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조부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숨은 원흉을 잡지 못한 채 흐른 며칠 동안은 마음의 부담이 더해졌다.
원주의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어 자신이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에게나 주고 떠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조부와 부친을 죽게 한 원흉을 잡아야만 한다.
허나 천기원주의 자리는 너무나 벅차고 무겁기만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그 자리는 하제량을 하루하루 지치게 만들었다.
원주의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자만이었고 아집이었다.
매 순간마다 고집이 흔들렸고 신념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무후를 직접 만나 보도록 하죠.”
“직접 말입니까?”
“천기원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리면 안 되겠죠.”
말투에서는 아직도 사마련을 믿지 못하겠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자신의 일은 어느 정도 끝을 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무후가 만나 줄지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천기원주가 직접 나선다는 말은 어느 정도 희망이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하제량은 신도천을 물리고 은조를 불렀다.
“직접 중원으로 향할 것이다.”
“무후를 만나시려는 건가요.”
“사마련의 힘을 느껴 보고 결정을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흑혈대(黑血隊)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전원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
은조는 의외의 발언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이름이 사우라 했던가.”
***
“…….”
사우는 한참이나 어느 한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푹.
다친 상처를 압박하고 있는 붕대를 아무 생각 없이 눌렀다.
“아프냐.”
“끄어억!”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던 하욱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욱이 조금만 이성적이지 못했다면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허약하기는.”
하마터면 팔 하나가 제 기능을 못할 뻔한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사우는 매정하게도 말 한마디로 하욱을 약골로 만들어 버렸다.
“이봐.”
“말씀하십시오.”
방 안에는 사우와 하욱 둘뿐이었다.
용수채 전원이 몰살한 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너와 네가 데리고 다니는 계집 말이야.”
“초미 아가씨입니다. 계집이 아니라.”
“뭐, 그건 내가 알아서 부를 일이고.”
역시나 답이 없는 사내였다.
“이틀 전 그 녀석들이 달고 있던 깃발 용수채 맞나?”
“알고…… 계셨습니까?”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사우라는 사내가 말하니 불길했다.
“수왕이 왜 너희를 죽이려 한 거지? 무슨 원한 관계라도 지었나.”
“…….”
하욱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언제까지 숨길 건지 궁금한데? 네놈이 속해 있는 단체가 녹림총련이라는 사실 말이야.”
“……!”
하욱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뭘 그래 놀래. 그리고 녹림이 뭐 그리 대단한 뒷배경이라고 숨기고 지랄이야.”
“어, 어찌 아셨습니까.”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거든. 나란 놈은 말이야. 네놈하고 그 계집 주변을 주구장창 따라다니는 놈 중 하나를 골라 가지고 좀 놀았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 모습이 순진무구하기까지 했다.
녹림총련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그의 말투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녹림총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내인지 의심이 갈 만한 말이었다.
녹림총련에 속해 있는 이들만 모두 모이면 일만이나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인원수만큼은 놀라운 수치였다.
유명한 무가나 중소방파에서 녹림을 상대하지 않으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머릿수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 사내는 개념이라는 게 박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녹림지존과 수왕의 대결이라…….”
사우의 중얼거림에 하욱의 안색이 나빠졌다.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왕이 직접 초미 아가씨를 납치하려 한 사실이 전 아직도 믿기 힘들 뿐입니다.”
“네놈 주인에게도 이 사실이 전해졌을까.”
“그럴 것입니다.”
“피바람이 불겠군.”
“막을 수만 있다면 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미 한참이나 늦었지. 용수채가 그리됐으니 말이야.”
그랬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 버렸다.
현재로서는 몸을 추스르고 녹림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었다. 함부로 밖을 나갔다가는 언제 어디서 적이 보낸 살수에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응?”
“그때 사우 공자와 대찰영 대협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물론 초미 아가씨마저 큰일 났을 겁니다.”
“대협은 무슨. 그 새끼 별호가 혈귀도마야. 정신 차리라고. 그런 놈에게 무슨 대협이야.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놈 때문에 아주 골치 아파졌어. 벌써 주변에는 품속에 칼을 들고 있는 놈들 천지인데 말이야.”
하욱이 놀란 나머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왕의 수하들이 벌써 들이닥쳤습니까?”
“아, 아.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단지 동태를 살피기 위한 애들인 것 같으니까. 그것보다 혈귀도마 그 자식을 쫓는 무리가 많아.”
“현상금이 크게 걸려 있으니까 당연하겠지요.”
“얼만데.”
“황금 백 냥으로 들었습니다.”
“멍청한 놈. 겨우 그 정도 몸값밖에 되지 않네.”
사우는 혀를 찼다. 혈귀도마는 딱 봐도 그 다섯 배가 넘는 액수가 걸려도 잡지 못할 자였다. 익힌 마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진바 능력이 가공할 만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참이냐.”
시큰둥한 얼굴로 건네기에는 그 질문의 무게가 무거웠다.
앞으로 어찌한다.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문제는 있는데 답이 없는 꼴이었다.
“수왕이 직접 나설 수도 있습니다.”
친형제보다 소중히 여기던 친우가, 그리고 그의 수하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했다. 가만히 있을 수왕 원상이 아니었다.
“수왕이 무섭나?”
“물 위가 아니더라도 무섭고 두려운 자가 바로 원상이라는 자입니다. 수년 전 본 적이 있죠. 그가 직접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
“실로 대단했습니다. 일대일 비무를 한다면 제 주군이신 녹림지존께서도 상대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호오.”
의외의 말에 살짝 호기심이 동했다. 사우의 눈에 이채로운 빛이 번뜩였다.
명색이 녹림의 지존이었고 방금 그런 말을 한 하욱은 그의 수하였다. 그것도 측근이었다. 그런 그가 수왕 원상을 칭찬할 정도면 상당한 강자임은 확실했다.
그래 봤자 애들 칼 놀이 하는 정도겠지만 말이다.
“중원에서 순수한 실력만으로도 스무 명 안으로 들어가실 겁니다.”
진지한 그의 말에 사우가 킥킥거리며 적나라하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한낱 수적들의 왕인 자가 중원 무림에서 스무 명 안에 드는 강자라는 하욱의 말은 시답잖은 농담에도 섞이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수왕 원상에게 무공을 가르친 자의 이름이 여곤(呂滾)입니다.”
“여곤?”
“여곤이라는 자 이름 앞에는 항시 야수마황(野獸魔皇)이라는 별호가 붙지요.”
“야수마황…… 야수마황이라.”
사우는 어디선가 들어 본 그 명칭을 되뇌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검무제 율천세의 스승, 야수마황 여곤.”
“맞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이지요. 현 남북천맹의 수장 율천세와 원상은 사제지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동문수학을 한 것은 아닌 듯 보이고 여곤이 율천세를 가르친 다음 여기저기를 떠돌다 원상을 제자로 삼은 듯싶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하욱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야수마황 여곤은 그 신분이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지만 수십 년 전 중원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의 원상을 제자로 삼았고 천검무제라 불리는 율천세와 사제지간이라는 건 정말이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사우에게는 그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감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 남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간이 바로 사우였다.
‘마인곡 한 번 찾아가기 더럽게 힘이 드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천기원주 하조천이 약속만 지켰어도 이런 일에는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한 혈귀도마 대찰영을 찾아야 했던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수왕이 어쩌고 녹림지존이 어쩌고 하는 일에는 휘말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지금이라도 확 혼자서 떠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오래 끌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찰영과 함께 마인곡으로 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자.”
“예?”
뜬금없는 사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하욱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가자고.”
“어, 어딜 말입니까?”
“북쪽.”
“……!”
사우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창가를 가리켰다. 실제로 그 방향이 북쪽인지는 잘 몰랐다.
그저 불길한 눈길로 사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