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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12화)
第四章 은원(3)
“안 됩니다, 북쪽은.”
“미쳤어, 하욱?”
“제…… 제 뜻이 아닙니다.”
대찰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하욱을 노려본다. 하욱은 그런 그녀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사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북쪽은 안 됩니다.”
사우가 제안한 북으로 방향을 잡자는 의견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쪽은 수왕의 본채가 있는 방향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가야 할 방향은 동쪽이었다.
살고자 한다면 그래야만 했다.
‘후우.’
하욱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도저히 이 사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자 같았다.
둘 중 하나였다.
백치던가 아니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몽상가이던가.
혼자서도 수왕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고 북쪽으로 가고자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미친 의견을 내놓고 짓는 표정은 왜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이 새끼. 자꾸 얘 네랑 엮이려고 그러는데 적당히 해라.”
“…….”
대찰영은 사우의 전음을 듣자마자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며칠 전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왕채를 만나기 전 자신이 기절했다가 깨어난 다음 날이었다.
“너…… 마인곡에서 왔냐.”
“……!”
대찰영은 소름이 끼쳤다.
마인곡은 전설상에나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장소 금단의 영역이었다.
절대 자신이 그곳에서 나왔다는 걸 아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게 세상에 퍼진다면 자신은 살아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럼 복수도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 사내의 음성은 세상 그 어떤 이의 것보다 음산하고 두려웠다.
이 사내가 왜 마인곡이라는 장소에 관심을 두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숨겨야만 했다. 그나마 실내에는 자신과 사우라는 사내뿐이라서 다행이었다.
배 위에서 마성에 젖은 자신을 기절시킨 존재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믿기 힘든 일이었다.
‘네놈이 마성에 젖으면 막을 자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담천의 말이었다.
그래서 대찰영은 수틀리면 사우라는 사내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기절시킨 것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기 싫었다.
퍼억!
허리 쪽에 묵직한 통증이 울렸다.
몸이 휘청거렸다.
“사람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인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마인곡이 대체 어딘지 내가 어찌 아느냔 말이오.”
“쯔쯧, 연기가 어설퍼.”
사우는 다리를 꼰 채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대찰영을 올려다봤다.
능글맞은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대찰영은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제안 하나 할까.”
여전히 웃고 있는 사우의 말이었다.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지는 그 마성을 억제시켜 줄 방법을 알고 있는데.”
“하하! 지금 날 바보 천치로 아는 것이오? 겨우 그따위 말로 나를 설득시키려 하다니.”
“마인곡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사우는 귀를 후비며 말했다.
“……!”
대찰영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난 마인곡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다.”
“난 마인곡이 어디 있는지 모르오.”
“그래?”
“그렇소.”
사우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알 때까지 처맞는 수밖에.”
그때 사우의 모습은 대찰영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얼굴로 남게 되었다.
아직도 그날 얻어맞은 걸 떠올리면 대찰영은 몸서리를 친다. 어찌 그렇게 표 안 나게 구석구석 아프게 때리는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는 이 사내와 눈을 마주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냥 한없이 작아지고 주눅이 들었다.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인곡으로 직접 안내해 줘야만 했다.
나름 위안을 해 보자면 목숨(?)도 구하고 마성을 억제시키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이 사내가 그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인곡은 어차피 자신이 아니면 혼자서 찾아갈 수가 없으니 약속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초미라는 여인과 그의 수족으로 보이는 사내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모친의 유품을 자신이 잃어버렸다.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녀가 슬픔에 젖었다면 그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안전해질 때까지 보호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사우라는 사내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마인곡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왜 그 좋지도 않은 곳을 찾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자.”
하욱이 사우에게 물었다.
이제 이 사내와 대찰영이 곁을 떠난다면 많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두 사내가 없었다면 벌써 이틀 전 자신은 물론 초미의 안전에 이상이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욱은 절대로 이 두 사내를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실 사우로서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수왕 원상의 사부가 누구인지를 알았거나 몰랐거나 상관은 없었다.
자신감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북쪽으로 가고 싶지만 방향을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초미와 하욱을 떨어트려 놓으려면 녹림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물론 자신이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잔뜩 쫄아 있는 빌어먹을 대찰영 때문이었다.
초미는 불안감으로 인해 하루 종일 끼니를 걸렀다.
그녀로서는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혼이 날 때 느꼈던 그런 느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용수채의 채주 유우량의 수하들을 만난 직후부터 느낀 마음의 불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모습들을 직면하니 그 이후부터는 평소처럼 행동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깊은 좌절감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하욱이 죽을 뻔한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을 지키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켜 주지 못하는 본인의 무기력함은 우울증으로까지 번져 갔다.
비록 겉으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본 하욱은 그녀가 얼마만큼 괴로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한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혼자 이겨야만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초미는 혼자만의 외로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낯선 여행도 좋지만 자신으로 인해 하욱이 부상을 당하자 언제까지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여행을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을상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어이, 꼬마.”
고개를 돌려 볼 것도 없이 바로 사우라는 인간의 음성인지를 알았다. 묵직하니 기품 있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가진 그였지만 하는 말마다 가볍고 거칠어서 별로 좋게 생각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요.”
그래도 명색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그녀라도 함부로 반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기 저 녀석 팔이 왜 저렇게 된 것 같으냐.”
“…….”
너무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초미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선두에서 대찰영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그의 등으로 초미의 시선이 머물렀다.
뭐랄까. 뜬금없지만 갑자기 하욱의 등을 바라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오빠처럼, 삼촌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지내 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 때문에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주 그래 왔던 것 같았다.
자신이 벌인 사고를 그가 항상 수습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쌀쌀맞게 대하고 한 번도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너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놈이야.”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갑자기 이 사내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녀석이 곁에 있다는 건 네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라고 해 두지.”
사우의 손이 초미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평상시 같으면 앙칼지게 소리치며 뭐라고 쏘아붙였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혹여나 지금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사우는 잠시나마 과거를 떠올렸다.
분명 자신에게도 지금 초미라는 아이가 느꼈던 좌절감이나 자괴감을 뼈저리게 느꼈던 나날이 존재했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초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것뿐이다. 누구보다 그 감정을 잘 알기에 말이다.
사우에게도 어린 시절 초미에게 하욱처럼 그런 존재가 따랐다.
그는 사우가 태어난 직후부터 함께했었다. 사우에게 그라는 존재는 아버지 이상이었다. 늘 친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사우는 항상 외로웠다.
형에게 무공 수련을 가르친 노고수들은 사우에게 입버릇처럼 말해 오던 게 있었다.
‘형님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더 수련을 가하십시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십니다. 공자께서는 더욱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언제나처럼 비교 대상이었다. 형이란 존재는.
태어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율적인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해서 무공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남들을 해치고 싶은 생각도, 그런 걸 배워서 최고가 되어야 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형과 그들은 강해져야 한다는 말만을 되풀이하기 바빴다.
어린 사우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감정에 목말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남을 죽이는 법을 공부했고,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곧 무서운 체벌이 가해졌다.
그렇게 온통 강해지라는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반항도 쉼 없이 해 왔었다. 그럴 때마다 사우의 옆에 수족처럼 존재하는 그가 피해를 봤다.
수련을 게을리할 때마다 또는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타나지 않는 횟수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그라는 존재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우는 그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몰랐다.
단 한 번도 그러한 일들을 자신에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 년 정도가 흐르자 사우는 태어나 한 번도 나가 보지 않았던 바깥세상을 탐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음먹은 이상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성격이었기에 사우는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나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도 함께했다.
설레고 흥분된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형의 수하들이 사우를 잡으러 왔고 그를 무참히 도륙했다.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도 있구나, 라는 걸 그제야 사우는 배우게 된 것이다.
늘 함께 있어서 몰랐던 그의 죽음은 성품을 바뀌게 했다. 행동을 바뀌게 했다. 그를 그토록 죽였어야만 했는지 형에게 따지지도 못했다.
형이 무서웠다.
인간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가 무서워 숨어들었다. 소중한 이의 생명을 앗아 간 그에게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어린 시절 사우는 그랬다.
그리고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형이라는 산을 넘겠노라고.
그만한 강함을 얻겠노라고.
그래서 그의 죽음을 형에게 따지겠노라고.
힘이 없으면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족쇄가 채워진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괜한 과거가 떠올랐다고 투덜거린 사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영원히 잊지는 못하겠지만 연연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한 상념에 민망한지 사우는 바닥의 돌을 하나 걷어찼다. 누군가를 맞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퍼억!
그런데 누군가의 머리에 맞았다.
“어떤 자식이야!”
바로 대찰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