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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14화)
第四章 은원(5)
그의 두 손에는 푸른 빛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청섬멸절(靑閃滅絶)!
피어오르던 푸른 빛이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떠한 비명도 어떠한 소음도 나오지 않았다.
빛이 사라졌을 때 주변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땅바닥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이라고는 사우와 대찰영, 그리고 먼 곳에서 두려운 눈빛으로 떨고 있는 하제량뿐이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또한 대찰영도 마찬가지.
‘대, 대체 이게 어찌 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지금 저 사우라는 사내가 강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직접 몸으로 느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태어나 이런 무공은 본 적도 없거니와 이야기로도 들어 보지 못했었다. 스물다섯 명의 무인들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조리 명줄을 끊어 놓다니.
그것도 대찰영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트린 강자들이었다.
절대로 인간의 경지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하제량도 매한가지였다. 대찰영보다 그의 충격이 더 컸다.
누구보다 흑혈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조부인 하조천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조직이었다. 천기원의 원주가 직접 관리 감독하는 게 흑혈대였다.
그 시간과 들인 황금은 엄청났다.
“하……하하하하!”
기가 막혀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도저히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저 사우라는 사내는 말이다.
미치도록 화가 났다.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가 치밀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등신 같은 놈. 네 조부가 왜 너 같은 놈을 차기 천기원주의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뭐 그런 논리인가?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라고 네놈을 과대평가하고 뭐 그런 거야?”
사우의 독설이 하제량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혀 들어왔다. 꽂힌 정도가 아니라 살점들을 후벼 파는 뭐 그런 고통들이 밀려 들어왔다.
‘천기원이라!’
대찰영은 천기원이라는 단어에 신경이 쏠렸다.
피바람 부는 중원 무림에서 오랜 시간 존재하는 무림 단체. 그리고 천하 곳곳에 눈과 귀가 달려 모르는 것이 없다는 신비문파.
지금 눈앞에 있는 젊은 사내가 천기원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우라는 사내와 연관이 있다는 건 대찰영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조천이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건 알고 있냐.”
“…….”
모르지 않았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진료를 맡던 의원을 협박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조부를 그리 만든 자가 그럼 당신이 아니라는 겁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네놈은 믿을 것이냐?”
“…….”
입을 닫아 버린 하제량을 지켜보며 사우는 혀를 찼다.
‘멍청한 노인네. 저런 놈을 손자라고 천기원주의 자리에 앉히다니.’
이미 죽어 버린 하조천의 경솔한 선택에 사우의 불만이 컸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손쉽게 죽어 버렸지만 딱 봐도 검은 그림자들이 뿜던 기운들은 엄청났다.
스물다섯 명이었지만 그 기세는 상당했다.
사실 그들을 상대할 때 청섬멸절을 쓸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만 일일이 상대했더라도 모두 저리되었을 것이다.
청섬멸절은 가히 절대적인 살인술이었다.
비록 흑혈대를 상대할 때는 가진바 오 할밖에 쓰지 않았지만 그 위력은 천하 그 누구도 이겨 내지 못한다 할 정도였다.
이것은 사우 본인과 그의 형 흑천만이 다룰 수 있는 직계 혈통만이 익히는 무공법이었다.
청섬멸절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행적을 뒤쫓는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고. 스스로가 흑천의 혈육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청섬멸절을 펼쳐 보인 것이다.
하제량은 자신이 하조천을 죽였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이리라. 하제량은 명색이 하조천의 손자, 사우가 독설을 뱉었지만 혈육을 잃은 상태였기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것이다.
“하조천이 정확히 언제 죽었지?”
“당신이 할아버지를 만났던 그 시각.”
굳이 물어보지 않았어도 예측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뭐, 그렇다면 천기원 원주 하제량으로서는 사우를 범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하조천의 관계가 어떻지?”
사우는 마치 심문을 하듯 하제량에게 질문을 건넸다.
하제량은 대답이 없었다.
조부와 저 사내가 어떤 관계인지는 몰랐다.
“하조천은 마령호에게 물려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마령호!”
하제량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정작 어떤 독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령호를 누가 키우는지는 알겠지.”
“녹림총련!”
하제량은 두 주먹이 으스러져라 쥐었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어 핏물이 흐를 정도였다.
“설마 그놈들이 하조천을 그리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흐음, 생각보다 꼴통은 아니구나.”
하제량은 단언할 수 있었다. 조부인 하조천이 어찌 마령호에게 물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녹림의 정보력으로는 천기원주가 있는 장소를 포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도대체…… 도대체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묘하게도 하제량은 더 이상 사우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직접적인 부정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제량은 자연스럽게 그의 무위를 본 순간부터 그가 거짓말을 할 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한 강함을 가진 채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건 네가 찾아내야 할 일이겠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에 사우는 하제량의 말을 가볍게 맞받아쳤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을 텐데.”
하제량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할아버지가 마령호에 물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몰랐을까, 안 이상은 녹림총련을 가만둬서는 안 되었다.
복수를 해야만 한다.
그들이 왜 조부를 건드렸는지, 왜 천기원의 심기를 어지럽혔는지 단죄를 내려야만 한다. 그로 인해 그들이 얻어야 할 이익에 대해서 파헤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누구입니까. 그대는.”
“누가 하조천의 핏줄이 아니랄까 봐 똑같은 질문을 해 대는군.”
사우는 씩 웃었다.
“네놈에게 말해 줄 의무 또한 없거니와 네 조부인 하조천과의 인연을 생각해 오늘은 멀쩡하게 보내 주마. 허나 혹 다음번에도 이런 식으로 싸가지 없이 덤볐다가는 네놈…… 황천길 구경시켜 주는 것만은 내가 약속하지.”
눈빛만으로 이토록 기가 질려 본 적이 있던가?
조부인 하조천에게서도 이런 지독한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한 수 배워 갑니다.”
하제량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다.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그는 오늘 깨달았다. 그동안 천기원에 갇혀 있으면서 너무나 좁은 시야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비록 심혈을 기울인 흑천대가 전멸했지만 천기원의 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녹림의 우두머리가 남창으로 올 것이다. 볼일이 있다면 잘 찾아보도록.”
하제량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조부인 하조천도, 그의 위 선조들조차도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천기원은 사우의 형 흑천이 다스리는 ‘그곳’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하제량이 녹림의 세력과 맞붙는다 하더라도 사우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초미와 하욱은 거치적거리던 존재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녹림지존이 오면 그들과는 헤어지게 될 터이니 속은 시원했다. 다만 전음으로 말한 이유는 대찰영이 들으면 귀찮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쯤 지 아비가 도착해 초미와 하욱을 데리고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 가자.”
하제량이 사라진 뒤 사우가 대찰영이 있는 곳을 돌아봤다.
그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사우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제량과는 달리 대찰영은 청섬멸절의 기운을 가장 가까운 데서 느꼈었다.
이미 다리의 힘이 풀린 상태였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이 왜 마인곡으로 가려 하는 것일까. 그 안에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일까?
마존 그 자식도 저 인간을 이기지 못하면 어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마성을 멎게 해 줄 약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저 인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대찰영은 심장이 차가워짐을 느껴야만 했다. 사우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땅바닥을 미친 듯이 밟기 시작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타인이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아! 마인곡에 대해서 물어보는 걸 잊어버렸다.”
“……?”
하욱과 초미와 식사를 했던 객잔으로 왔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점소이가 그들이 남기고 갔다는 서찰 한 장을 건네줬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갑자기 사라져 작별의 인사를 못한 것이 아쉬웠다는 형식적인 말만이 적혀 있었다.
“제대로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도 못했는데.”
대찰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꽤나 상심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런 대찰영의 심사와는 다르게 사우는 연신 거친 말을 내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실수를 한 자신이 원망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기원의 힘을 빌린다면 마인곡의 위치는 알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다시금 하제량과 연락을 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전무했다.
허나 사우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현재 천기원의 힘으로도 마인곡의 위치를 아는 것이 힘이 드는 게 현실이었다.
“그만 갑시다.”
“어딜 말이냐.”
“어디긴 어딥니까. 마인곡이지.”
“아직 약을 주지도 않았는데?”
거래 조건이 성사되지도 않았는데 가자는 대찰영의 말에 사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마인곡을 도대체 왜 그토록 가려고 하는 거요?”
“…….”
사우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누구 좀 만나려고.”
“그러니까 그게 누굽니까.”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라 사우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살짝 긴장했다.
“벗……. 꽤나 오래된 벗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