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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16화)
第五章 마인곡(2)
그 시각, 천성각 내실에는 율천세와 젊은 사내들이 여러 명 모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가겠느냐.”
사부 여곤과 있을 적과는 사뭇 다른 기운을 흘리며 그가 물었음에도 선뜻 대답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의 앞에는 친혈육인 율무천과 세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율천세가 바라보는 시점에서 가장 오른쪽에는 율무천이, 그 왼쪽으로는 서열의 순서대로 있는 상황이었다.
율무천의 옆에 있는 애꾸눈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수왕 원상에게 본 맹의 힘을 실어 주시려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부님.”
천봉장(天鳳掌) 화진천(華震天)이 애꾸눈의 이름이었다. 남북천맹의 맹주 율천세의 애제자 세 명 중 첫째였다.
그는 율천세의 무공 중 홍염장(紅炎掌)을 극성까지 이끌어 올린 기재였다.
“미안하구나, 그 이유는 지금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제자, 소립(蘇粒)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화진천의 옆에 있던 청색 무복의 사내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본맹의 위엄을 한껏 멀리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니라. 난 그 기회를 앞으로 본맹을 이끌어 갈 너희들에게 주는 것이고 말이다.”
청안검객(靑眼劍客) 소립의 무례한 언사에도 율천세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눈앞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자식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하나같이 어린 시절부터 애지중지해 오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량(子亮), 네 뜻은 어떠하냐.”
가장 왼쪽에 있는 청년의 나이는 가장 어려 보였다. 아직 약관도 채 넘지 않아 보였다.
율천세의 제자 중 막내인 검괴(劍怪) 은자량(殷子亮)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인 후에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사부님의 의중이 궁금할 뿐입니다.”
율천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식과 제자들이 왜 이토록 나서기를 꺼려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장강수로십팔채는 수적들의 집단이었다. 개중에는 무공을 익힌 자들도 있겠지만 순수한 무림의 세력이라고는 하기 힘들었다.
녹림도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예전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분은 산적들이었다.
그런 자들의 전쟁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맹주의 뜻도 이해하기 힘들거니와 그 도움을 자신들에게 맡기려는 사부의 뜻은 받들기가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율무천이 나섰다.
그는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천이 네가 말이냐?”
율천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아직까지 자신의 아들은 무림에 출두한 적이 없었다. 경험이 전무했다. 언젠가는 홀로 무림행을 떠나야 하겠지만 스스로가 말한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무슨 연유가 있으시겠지요. 아들이 그 뜻을 이행하겠습니다.”
“조금은 이르지 않더냐? 아니면 이 아비 몰래 벌써 그 경지에 이른 것이야?”
“아닙니다. 단지 막힌 부분이 있어 바깥바람을 쐬고자 함입니다.”
율무천의 말에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다.
아들 율무천은 직계 혈육에게만 전해지는 검법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면 무림행을 언제까지라도 미루고자 했었다. 일취월장하던 그의 실력이 어느 순간 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그걸 허무는 방법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실전이다. 많은 상대와 비무를 해 보고 경험을 쌓음으로써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겠다는 말인 것이다.
같은 무인으로서 앞서 성장했던 율천세로서는 당연히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제자 중 가장 연배가 높은 화진천이 나섰다.
율천세는 흡족하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화진천을 바라봄에 있어서는 그 눈빛이 조금은 남달랐다.
그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산검문(天山劍門) 문주의 장남이기도 한 그는 다혈질에 남들과 검을 마주하는 걸 즐기는 취향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 검을 뽑아 들면 상대의 피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기도 했다.
그런 그가 무림행을 나서면, 그것도 두 세력 간의 전쟁 틈에 끼어들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희생당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자신의 제자였고, 공평하게 진행되는 후계자 싸움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자신이 내린 명령에 참여를 하겠다는 그를 막아설 수는 없는 법이다.
율천세는 바로 허락을 하였고 당장 내일 남쪽으로 떠날 것을 명령했다.
“너희 둘에게 천무대(天武隊)를 제외한 전투 기관에 속해 있는 힘을 하나씩 고를 기회를 주겠다. 그들을 데리고 장강으로 내려가 수왕을 도와라.”
“잘 부탁드립니다, 공자.”
화진천이 두 사제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율무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였다고 하기보다는 살짝 목만 까딱거렸다.
그가 맹주이자 사부의 혈육이라 할지라도 그 이상의 굽힘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알다시피 난 경험이 부족하니 말일세.”
나름 겸손의 자세를 취했지만 화진천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걸 율무천은 모르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암묵적으로 시작된 후계자 경쟁에서 화진천은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직계가 아닌 자도 맹주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순간부터였다.
“소립. 혈도대(血刀隊)를 준비시켜라.”
“알겠습니다, 대사형.”
혈도대는 천산검문에서 키운 소수 정예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어떤 문파의 수장들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 조직이기도 했다.
***
활시위가 새끼 사슴의 머리를 향했다.
피잉!
시위가 당겨짐과 동시에 바로 화살이 튕겨져 나가 목표지점을 향해 쾌속으로 전진한다.
팍!
하지만 화살이 빗나갔다.
“이런, 요새 실력이 많이 죽었네.”
삼십 대 중반으로 넓적한 얼굴과 비례하게 몸 전체가 살집으로 뒤덮인 사내는 눈을 가렸던 천을 풀었다.
새하얀 천을 풀자 양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가 드러났다.
사내는 빡빡 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군악(査君惡) 그놈이 만들어 준 음식 때문인가. 살이 점점 쪄 가고 있어. 자식은 사내놈이 어찌 그리 음식을 잘 만드는 거야. 짜증나게.”
담천(潭泉)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시선은 멀리 도망치는 어린 사슴의 엉덩이에서 떠나지 못했다.
사슴을 잡아먹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분명 눈을 가리고도 작은 새들조차 화살로 맞추던 실력이 있었다. 최근 다른 것에 한눈을 팔아서 주무기인 궁술에는 통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리라.
“쩝.”
담천은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살 때문인지 뒤뚱거리는 게 영 볼품없어 보였다. 요 근래 날씨가 좋아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헌데, 몇 걸음 가다가 이내 거구의 몸이 멈췄다.
“한 놈, 두 놈.”
장난기 많고 푸근한 인상을 주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단지 눈빛 하나가 변했을 뿐인데 느낌 자체가 사나워졌다.
“미쳤구나. 마인곡에 발을 들여 놓다니.”
그 순간 담천의 육중한 몸은 자취를 감췄다.
쐐애엑!
공기를 찢어발길 듯이 굉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파악!
빠르게 몸을 움직였기에 맞지는 않았다.
다만 사우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화살을 쏜 잡놈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마인곡에서는 손님의 대한 예의를 이렇게 하나?”
“철궁마 담천이라는 자입니다.”
“요상한 대접이군.”
사우는 화살을 쏜 자를 보면 단단히 혼을 내 줘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왔을 때 피하지 않고 한 손으로 잡아 버렸다.
‘맙소사!’
대찰영은 또 한 번 기겁을 하였다. 철궁마 담천이 쓰는 화살은 일반인들이 들기에도 묵직한 쇳덩이였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쏘아 대는 담천도 신기하다 생각이 들었지만 내공이 실린 그것을 한 손으로 잡아내는 사우는 더 괴물같이 느껴졌다.
“하! 기가 막힌 물건일세!”
수풀 사이를 헤치고는 담천이 등장했다.
“뭐냐, 저 물건은.”
“저분이 담천 형님이십니다.”
“사람이 맞기는 한 거냐?”
“그, 그게…….”
“하하하하!”
자신의 외모를 기분 나쁘게 비꼬는 사우의 말에도 담천은 웃었다. 그것도 너무나 호탕하게 말이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사우의 위아래를 살폈다. 어리바리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음에도 절대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의 사내였다. 특히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강렬한 무엇인가가 담천에게 전율을 느끼게 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느낌은 수년 전 마존을 봤을 때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대찰영.”
“그렇게 되었습니다, 형님.”
담천은 대찰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성에 젖어 마인곡을 제멋대로 뛰쳐나간 그가 돌아왔다. 물론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낯선 이를 데리고 왔다는 건 결코 쉽게 넘어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대찰영도 그런 그의 눈빛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였다. 마존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담천에게는 밉보이기 싫은 것이다.
“혹시 네놈이 들고 있는 그 물건이 천강묵철(天剛墨鐵)로 만든 거냐?”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자신이 든 궁의 정체를 말하는 사우를 보면서 담천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반말을, 그것도 첫 만남에 들으니 유쾌하게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담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우는 그의 손에 들린 철궁을 유심히 살폈다.
“철궁마…… 하포(夏布)가 죽었나.”
작게 말한 그의 중얼거림은 담천과 대찰영 두 사람에게 똑똑하게 들려왔다.
“어떻게 하포라는 자를 아는 것이지?”
담천이 들고 있는 철궁을 만든 자가 바로 하포라는 사내였다.
대찰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때 말했던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어렸을 적에 마인곡에 놀러 왔었다는 그의 표현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길래 마인곡이라는 곳을 놀러 왔다고 표현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묻겠다. 네가 어찌 하포 님을 아는 것이냐.”
철궁마 하포, 그자는 담천에게 있어서 무예스승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철궁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우는 그걸 보고 하포가 죽었다는 걸 눈치챌 수가 있었다.
“이노옴!”
자신의 말을 무시해서 화가 난 것보다는 혹여 사부의 죽음에 관하여 아는 게 있지 않을까, 그 진실을 저자가 알지 않겠나 싶어 조바심이 난 것이다.
순식간에 육중한 담천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그리고 사우의 얼굴을 향해 철궁이 휘둘러졌다.
빠악!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담천은 너무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들어 철궁을 막은 이 미친 사내를 쳐다봤다.
“이 물건은 너같이 약한 놈이 쓰기에는 너무 좋은 물건이다.”
순간 사우의 손에서 파란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의 파란 손이 담천의 복부에 꽂혔다.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사우의 손이 담천의 복부에 박히자마자 그의 몸은 붕 떠올라 삼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찰영.”
“예…… 예?”
“마존에게 안내해라.”
대찰영은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그가 갑자기 담천을 때려눕혔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같이 약한 녀석이 쓸 물건이 아니니 강해지면 그때…… 주겠다.”
담천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안간힘을 써 가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기에 그나마 사우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