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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17화)
第五章 마인곡(3)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새까만 밤하늘이었다. 별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많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담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서둘지 않았다. 맞은 부위에 고통이 엄습해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헌데 생각했던 고통은 없었다.
담천은 상의의 일부분을 재껴 올렸다.
벌겋게 주먹 자국이 나 있었다.
담천은 그걸 보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지독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가 정체를 알기 힘든 인물, 사우에게 얻어맞아 기절한 것은 둘째다. 한 번도 자신이 사부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자신의 사부를 알기라도 하듯 자신이 철궁을 쓸 자격이 없다고 일갈했다.
정말이지 담천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는 말이었다.
담천에게 하포라는 사내가 얼마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지 사우가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또는 누군가에게 언제쯤이면 들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중원 최고의 궁수 철궁마 하포라는 산을 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몸과 마음을 다잡고는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십 년 만에 와 보는 마인곡을 둘러보며 사우는 반갑다거나 오랜만에 와서 설렌다는 소녀적, 감성들은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은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설명해 봐.”
“……?”
말이 없다가 갑자기 묻는 질문치고는 엉뚱했다. 대체 뭘 설명하라는 것인지 알려 줘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마인곡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대찰영은 눈만 껌뻑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몇 년이 되었냐. 마인곡에 들어온 지.”
“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모를 수도 있겠군, 이라고 사우가 중얼거렸다.
현재 두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은 마존의 처소 앞이었다. 얼마나 비워 뒀는지 내부는 먼지로 가득했다.
사우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마존의 오랜 부재가 아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적만 해도 마존 거처 주변으로는 수십 개의 집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거칠게 솟아오른 나무들만이 즐비했다. 어렴풋이 떠오른다. 눈앞에 있는 오두막 주변으로 퍼져 있던 집들과 이 앞에서 어설프게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긴 시간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라?”
지붕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러났다.
마존의 거처 지붕 위에 서 있는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엄청난 장신을 자랑했다.
사우와 대찰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올라갔다.
“찰영?”
그가 지붕에서 내려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삼십 대 초반으로 호남형에 체격도 건장한 사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호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술을 진탕 들이켰는지 술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호진 형님!”
상대를 알아보자 대찰영이 벌떡 일어섰다.
“하하! 대체 이게 얼마만이냐!”
석 달 만에 마인곡으로 살아 돌아온 대찰영을 보자 그는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마존에게서 들었다. 마성을 이기지 못하여 마인곡을 뛰쳐나갔다고 말이다.”
“제가 다 부족한 탓이지요.”
“아니다. 투살기(透殺氣)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이들은 흔치 않다. 열에 여덟은 극성까지 익히다 모두 뇌에 마성이 침투하여 즉사하는데 너는 천운이로구나.”
“이분 덕입니다, 형님.”
자연스럽게 대찰영은 사우를 소개해 줬다.
“음?”
“죄송합니다. 낯선 이를 마인곡으로 데려오는 게 얼마만큼 잘못된 행동인지 알면서도…….”
멀뚱멀뚱 모닥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사우를 사내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초호진(肖湖唇)이라 합니다.”
“난 사우다.”
초호진은 사우라고 짤막하게 밝힌 사내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이었다.
사우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설마…… 마존과 아는 사이인가?”
“마존이 내 이야기를 하던가.”
“뭐, 특이한 친구가 있다고는 하더군.”
사우는 피식 웃었다.
“앉지.”
“그러지.”
사우의 시건방진 태도에 초호진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을 하던 대찰영은 의외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 버리자 당황했다.
“한잔하지.”
초호진이 사우에게 술병을 들이대며 말했다. 대찰영은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언제 초호진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술병을 남에게 권한 적이 있던가?
마인곡 내에서도 최고의 주량인데다 술을 너무 좋아하는 그는 희한하게도 다른 이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사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마시더라도 내공을 이용해 주독을 없앨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마시지 않았다.
그가 거부를 하자 초호진은 입맛을 다시며 호리병에 입을 갖다 대어 남은 술을 쭉 들이켰다.
“마존은 어디에 있지.”
“폐관수련.”
초호진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대찰영은 정말로 사우라는 자가 마존의 벗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초호진의 진지한 모습에 낯설어 하고 있었다.
“철궁마…… 하포가 죽었나.”
사우는 또 하포라는 자에 대해서 물었다.
“죽었지. 내 아비와 함께.”
“……!”
대찰영은 지금 이 장소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자신이 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똑같네. 얼굴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초 숙부와 말이야.”
초호진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어깨가 참 넓으셨지. 그 위에 목마도 태워 주셨고.”
“난…… 단 한 번도 아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그런가.”
“…….”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사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덩그러니 남은 오두막 주변은 조용했다.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들렸다.
“오랜 벗이라고 그러시더군. 철궁마 하포 님과 내 아비는 말이야.”
“그랬지. 허물없이 지내셨었지.”
사우가 마인곡에 들른 것은 서너 번 되었다. 올 때마다 반년씩 머물곤 했다. 그는 이곳이 너무 좋았다. 이곳에 오면 그는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형이 살던, 그리고 자신이 머물던 그곳과는 다른 분위기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떠날 때쯤이면 가기 싫어 떼를 쓰곤 했다.
유년 시절의 유일하게 따뜻함이 묻어 있던 장소가 바로 마인곡이다. 세상은 그곳을 흉악한 마인들이 살고 있는 지옥이라 표현했지만 사우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때는 이곳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사우는 그들에게 모두 숙부라 불렀다. 특히나 그중에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 하포였다.
언젠가 그 빌어먹을 형이 말한 적이 있었다.
‘난 내 아비보다 그분이 더 존경스럽단다.’
어린 시절부터 형에게 반항적이던 사우는 그 순간만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자신을 아껴 주고 어여삐 여겨 주던 거한의 사내.
“누구지. 마인곡을 이렇게 만든 놈들 말이야.”
“나도 몰라. 그걸 아는 자는 마존뿐이야.”
第六章 후예(1)
다음 날, 사우는 일어나자마자 홀로 마인곡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마인곡이라는 장소를 칭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찰영과 함께 왔을 때 설치되어 있던 산 초입이 마인곡의 시작이었다.
마존이 머물렀던 오두막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북서쪽으로 사우는 한참을 걸어갔다. 신법을 발휘하기도 하고 주변을 구경하며 걷기도 했다.
오랜만에 와 보는 곳이었지만 주변 지리는 낯설지가 않았다.
사우가 한참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계곡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벌거벗은 채 이곳에서 마존과 어울렸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사우는 한참을 폭포수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가 걸음을 옮겨 이동한 곳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박고 있는 곳이었다.
사우는 홀로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무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처음으로 마존과 비무를 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패배라는 걸 당하기도 해 본 곳이었다.
지난밤, 사우는 초호진에게 마존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폐관수련 중인 곳이 어디인지, 하다못해 폐관을 끝내고 나오는 날이 언제인지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 하여 이른 아침부터 마인곡 곳곳을 둘러본 것인데, 생각지도 않게 추억에 젖어 버리고 말았다.
“이풍…… 그대는 알고 있었나. 마인곡이 이 지경이 된 걸 말이야.”
사우는 허공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우에게 형의 죽음을 알려 준 사내, 이풍.
그는 사우의 친형을 보필하는 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어렸을 적부터 키워 주던 ‘그’의 친형이기도 했다.
이풍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인곡으로 가라고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시작은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사실 믿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흑천이라 불리던 자신의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리와 상대를 하려면 이들 가지고는 안 되었다.
물론 예전의 마인곡 전체의 힘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형을 죽인 무리의 힘을 제대로 모르지만 형이 가진 힘을 생각했을 때 짐작할 수는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다.
짐만 될 자들이면 고향과도 같은 이곳을 초토화시켜서라도 가능한 빨리 마존을 만나고 가차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미 그가 기억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없기에. 그러나 조금이나마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마존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을 보다 쓸모 있게 다듬을 생각이다.
어찌 될 것인가는 이제 그들의 능력에 달렸다.
사우는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돌렸다.
몇 명 되지 않는 마인곡의 인물들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