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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19화)
第六章 후예(3)


며칠 밤낮을 술을 진탕 마시며 취하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과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난생처음 패배라는 걸 느껴 본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자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제량아.’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나가는 말로 할아버지가 그리 말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그런 뜻을 내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그 말이 지금 하제량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맞다.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상대에 대한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도 천기원의 핵심 무력을 이용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전멸!
흑혈대는 하루아침에 한 사내에 의해서 모두 죽어 버렸다.
자신의 경솔한 판단으로 인한 결과치고는 엄청난 피해였다. 흑혈대는 천기원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무력단체였다. 조부의 선조 때부터 육성한 무인들이다. 그들을 만들어 내는 데 들인 시간과 자금은 엄청났다.
변명을 하자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흑혈대 전원을 박살 낼 인간이 있다는 건 상상을 못했던 일이다.
그들이면 웬만한 중소방파들을 괴멸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던 하제량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밖에서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무후께서 오셨습니다.”
은조의 전음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기운이 단번에 달아났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이가 실내로 들어섰다.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제량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의외로 검은색 경장 차림이었다.
천상무후(天上武后) 지청화(池靑花).
삼십 대 초반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면사로 가려져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반갑습니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하제량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천에 오셨다는 정보는 입수했는데 도통 찾아오시질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그녀는 한 단체의 절대자라 하기에는 특이할 정도로 검소해 보였다.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말투 또한 나긋나긋하면서도 조용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정확하게 발음했다.
무공을 익히게 되고 거친 무림인들과 부대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뚝뚝하고 차갑게 변하기도 할 텐데 그녀에게서는 절대로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제량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천상무후 지청화라는 인물에 대해서 제대로 된 조사가 부족했다.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는 대외적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조부가 돌아가시고 갑작스럽게 천기원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그만두죠.”
하제량은 그녀의 눈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꽤나 딱딱한 음성이었다. 여자라고 얕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사마련의 련주가 된 그녀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죠. 저도 의외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서요.”
역시나 그녀는 당돌하게 맞받아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사마련의 눈과 귀가 되어 주세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전 사마련이 무엇을 믿고 남북천맹을 향해 칼을 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련의 전력을 의심하는 것인가요.”
“천기원의 힘으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실망이네요. 천기원의 정보력이 겨우 그 정도라니.”
하제량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천기원과의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해도 되겠군요.”
하제량은 웃음을 거두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그들을 돕는 것은 하나의 도박이었다. 모든 걸 얻거나 모든 걸 잃거나 하는 두 종류의 결과만이 존재하는 그런 도박 말이다.
하제량은 그녀가 지금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사마련에 속해 있는 네 개의 문파는 사천성에서 유명했다.
혈천문(血天門), 화월문(花月門), 패천문(覇天門), 음살문(陰殺門)이 그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천상무후 지청화는 화월문 이십칠 대 문주이기도 했다.
사천성 일대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남북천맹과 비교하기에는 조족지혈이었다.
어림잡아도 사마련 전체 힘의 열 배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남북천맹이다. 물론 이것은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고, 그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힘에 비한다면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그런 그들을 상대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 허세가 아니고 뭐겠는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느낀 하제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앉으세요.”
사람의 음성에서 이토록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올 수 있을까.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제량은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패가 좋지 않음에도 판돈을 키우고 계속 밀어붙이는 건 도박을 잘 모르는 자들의 가장 큰 실수이지요.”
“하하! 지금 저보고 하는 소리인 겁니까.”
“많은 걸 알지는 못해도 천기원이 웅덩이에 오랜 시간 고여 있는 썩은 물에 지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요.”
명백한 도발이었고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제량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에 비해 지금 상대는 천기원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현재 천기원은 갑작스럽게 바뀌어 버린 주인의 대한 불신이 전염병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하제량은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천기원은 과거에 누리던 황금기가 한참이나 지나 이제는 서서히 지는 해나 다름없었다.
하제량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염원이자 궁극적인 목표는 천기원을 예전의 천기원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특히나 천기원 전체를 이끌어 가야 하는 입장에서 사마련과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것은 엄청난 고민이 따르는 일이었다.
반면 사마련이 이미 전성기를 지나 아래로 꺾이는 천기원을 탐내는 건 그들의 정보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중원 곳곳에 숨어 있는 정보원들의 능력은 가히 중원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단체가 바로 천기원이다.
아무리 그들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 하더라도 아직도 자신들과 같이 이들과 접촉하여 정보를 얻으려 하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천기원과 힘을 합친다면 사마련은 정말로 남북천맹과의 전쟁을 벌여 볼 만했다.
“부친의 존함이…… 하사의(何思義) 맞나요?”
그녀는 오늘의 만남을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가기 위한 필승의 패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 반응한 하제량의 눈빛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정체를 알기 힘든 자들의 소행이라던데…… 맞나요?”
“…….”
“그렇게 노려보실 것 없습니다.”
천기원에서 하제량의 친부 하사의라는 존재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여겨져 왔다. 하조천의 뒤를 이어야 할 그 존재는 숙명처럼 여기던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는 어느 날인가 불현듯 먼지처럼 비명횡사했다. 천하의 모르는 것이 없다는 천기원도 그를 죽인 흉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녀가 쉽게 말해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청화의 대답 여부에 따라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사마련과의 융화가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제량은 침묵을 유지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

사우와 대찰영이 마인곡에 나타난 지 칠 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의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군악의 간호를 초호진과 담천, 그리고 대찰영이 번갈아 가면서 해 줬다. 겉으로 드러난 부상도 부상이지만 내상을 크게 입어 사군악은 회복하는 데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
물론 그가 무인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지 일반인들 수준에서 봤을 때는 엄청난 속도였다.
그동안 이들 네 사람 앞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둘 있었다. 사군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우와 혈룡검마(血龍劍魔) 무진(舞塵)이었다.
사우는 원래 제멋대로라고 하더라도 이토록 오랜 시간 동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던 무진의 부재는 꽤나 의외였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설마 이 자식 사우라는 자와 만나서 싸우다 죽은 것 아니야?”
농담과 진담을 섞은 말이 담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물론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본인도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담천은 요 며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사군악의 병간호 때문만은 아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남자들만이 사는 이곳 마인곡에서 사군악은 꽤나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담천과 초호진에게 있어서만큼은 마존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바로 사군악의 요리 솜씨 때문이다. 웬만한 객잔에서 요리를 총괄하는 주방장 정도의 실력을 지닌 그는 불룩 튀어나온 담천의 배를 만든 장본인이었고 초호진에게는 훌륭한 안줏거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
물론 그의 싸가지 없고 때로는 차가운 독설을 참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까짓것 욕 몇 마디 듣는 대가치고는 사군악이 내놓는 음식들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째 누워만 있으니 제대로 된 끼니도 술 안줏거리도 없었다.
“쩝.”
담천은 입맛을 다셨다. 사군악이 정신을 차리면 뭘 가장 먼저 해 달라고 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 중이었다.
“마존이 나오면 우리는 바로 마인곡을 떠날까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대찰영이 물었다.
“글쎄다. 바로 떠날지 아니면 몇 년 더 머물지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진 형님은 그리 알고 계시던데요. 마존이 나오면 바로 나간다고.”
“그 녀석이야 원체 성질이 급하니.”
담천은 혀를 찼다.
“차 한잔할 테냐.”
오두막 안에 있지만 밤공기는 차가웠다. 대찰영은 속에 따뜻한 게 들어가면 괜찮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크지 않은 오두막은 사군악과 담천이 함께 쓰는 숙소였다. 담천은 자연스럽게 준비를 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내왔다.
“마존을……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라.”
“……!”
식히기 위해 후후 불던 대찰영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강해지는 걸 원한 건 저였으니 할 말은 없죠.”
대찰영은 늘 입버릇처럼 마존을 뒤에서 씹어 대며 살아왔다. 그에게 속아 마공을 익히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이었으리라. 그로 인해 마인곡 내에서도 죽을 고비를 꽤나 넘기는 상황까지 있었다.
마인곡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난해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는 자가 바로 대찰영이었다.
혼자 이겨 내기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기억하는 게 있니.”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찰영은 예의상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많이는 생각나지 않네요. 다만 엄하시고 무뚝뚝하셨던 것만은 기억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꽤나 서글픈 현실이었다.
“그렇구나. 아직도 복수를 하고 싶으냐.”
“…….”
대찰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그의 부친이 세상을 뜬 지 십칠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무리 강한 복수심이 들었다 하더라도 한풀 꺾이기 마련이다.
“왜…… 그리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무림의 일이란 크건 작건 간에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싸움이 시작되지.”
“갑자기 왜…….”
“그냥 물어본 것이다. 이제 조만간 마존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지. 그 전에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각자의 사연 속에서 각자의 복수를 꿈꾸고 있다. 그런 우리를 한 자리에 모아 묶은 자가 바로 마존이지. 그 또한 지독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단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마음. 마존과 형님을 따라 마인곡으로 오던 첫날의 마음……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조금은 불공평한 관계들이지. 우리는 말이다. 한 사람의 복수를 해 주기 위해 여럿이 모여 힘을 합쳐야 한다. 그 와중에 죽을 수도 있어. 본인의 복수는 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후회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허나 대찰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대답을 대신했다.
담천은 웃었다.
그가 고맙고 또 기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