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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20화)
第六章 후예(4)
“내가 지금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담천은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
“나도 못 믿겠는데.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나.”
그 옆에 있던 초호진마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잘못 된 게 아니라 저 인간이 뭔가 잘못 먹은 것 같은데요.”
대찰영은 아예 상황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였다.
“아∼.”
너무나 상냥한 표정으로 그릇에 담긴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사군악의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는 사우를 본 세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로 사우가 밀어 넣는 음식을 억지로 삼키는 사군악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도대체 뭘 처넣었기에, 이리 맛이 떫은 거야!”
우물우물 입안의 것을 몇 번 삼킨 그의 반응은 너무나 냉담하고 거칠었다.
그 모습에 사우는 씩 웃었다.
“인면지주(人面蜘蛛)의 내단으로 만든 죽이니 그냥 처먹어라. 네 몸이 빨리 나아야지 내가 제대로 된 끼니를 때울 것이 아니냐.”
“인면지주? 마인곡에 그런 게 있었습니까?”
마인곡에 늦게 들어온 대찰영으로서는 지리를 잘 모를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한 두세 마리 정도 사는 것으로 안다. 지금 마존이 폐관수련하러 들어간 장소 근처에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담천의 설명 덕분에 초호진과 대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면지주는 머리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거대한 거미로서 수천 년을 묵어 영성을 띤 흉악한 맹독성 기수다. 그런 인면지주의 내단을 복용하게 되면 엄청난 내공의 증진을 이룰 수 있다.
하물며 내상은 물론 육체적인 상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치될 것이 뻔했다.
“고작……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끼니를 채워 줄 자가 없어서?”
인면지주의 내단이 들어 있다는 걸 듣고는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 뒷말이 사군악의 심기를 건드렸다.
때린 놈이 달려와 무릎 꿇고 사정해도 용서를 해 줄지 안 해 줄지 고민할 판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성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건 저 녀석들에게나 줘야겠네.”
사우가 그릇을 빼앗으며 초호진, 담천, 대찰영을 보며 말했다.
대찰영이 그 말을 듣고는 눈치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표시는 나지 않았지만 초호진과 담천도 마찬가지였다.
“야! 야 인마! 알았으니까 이리 줘.”
일단은 몸이 낫는 것이 급선무였다. 며칠 동안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조심해라. 내가 만들어 먹인 음식에 네놈을 죽이는 독약이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이었다.
사우가 지어 준 인면지주의 내단이 섞인 약을 먹고 난 사군악은 약 하루 만에 몸을 털고 일어섰다. 그 덕분에 사군악이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한답시고 차려 놓은 상다리는 휘어질 지경이었다.
도저히 첩첩산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어디서 구해 오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며칠 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맛본 초호진, 담천, 대찰영, 사우는 미친 듯이 접시들을 비워 가기 시작했다.
주로 이들의 식사 장소는 사군악이 만들어 놓은 모옥 앞이었다. 날이 추울 때는 안에서 먹지만 요즘 같은 날씨라면 늘 밖에서 먹곤 했다.
“저 녀석이 혈룡검마냐.”
그때 저기 멀찌감치서 다가오는 이를 보며 사우가 대찰영에게 물었다.
마치 핏빛으로 물들인 게 아닐까 싶은 혈포가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잘 벼른 칼날 같다는 느낌이었다.
왠지 사군악과 비슷한 느낌이 났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날카롭게 생긴 얼굴이었다.
특히나 그의 행색이 그런 느낌을 더욱 부각시켜 주기 충분했다.
“저 새끼는 나타날 때마다 옷이 저 모양이야.”
사군악은 쌍소리를 뱉어 내며 혈룡검마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름 음식의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로서는 자신의 요리를 맛보러 온 사람의 복장이 불량함은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두 번도 아니다. 며칠씩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저렇게 나타나는 꼴을 보면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다들 오랜만이오.”
사내는 발을 땅에 질질 끄는 것이 습관이었다. 게다가 어깨마저 축 처져 있다.
그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꾸벅 형님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낯선 이가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잘 먹겠소.”
외적인 모습으로 봤을 때도 가장 어린 나이의 혈룡검마의 말투는 꽤나 어른스러웠다.
“진아…….”
오랜만이라는 말과 잘 먹겠다는 말만을 하고는 대가리를 푹 숙인 채 접시에 코를 박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런 그를 담천이 조용히 불렀다.
그래도 초면에 인사라도 나누고는 밥을 먹는 게 좋다 판단한 담천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마존의 친구인 사우를 대접함에 있어서 소홀해서는 안 되었다.
“웃긴 놈일세.”
비쩍 마른 놈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말한 것이리라.
하지만 혈룡검마 무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속 식사에만 집중할 뿐이다.
“저 녀석 원래 밥 먹을 때는 귀를 닫고 사는 별종입니다.”
사우는 신기하다는 듯 무진의 머리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다시금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노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조용히 입안에 뭔가를 넣기 바빴다.
한참이나 지난 뒤 먹는 걸 가장 빨리 멈춘 것은 늦게 온 무진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오?”
그제야 낯선 사람 사우를 발견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마존의 친구시란다.”
사군악이 비꼬며 말했다.
“그 양반에게도 친구가 있었소?”
“뭐, 그런가 보지.”
다음 말을 할 때도 사군악의 얼굴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사우라는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 준 음식으로 빨리 완쾌를 하긴 했지만 자신을 죽도록 쥐어 팬 건 그가 아닌가.
마존의 친구만 아니라면 다른 이들과 합세하여 죽여 버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다고 그를 이길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군악이 단언하건대 폐관수련에 들어간 마존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우를 이길 수는 없었다.
끝을 보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겠다던 마존이 나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본인 스스로에게 약속한 걸 지켜서 나온다면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사우는 엄청난 강자였다.
당금 무림에서 사우가 어느 정도 위치에 해당하는 고수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마인곡에 들어온 지 삼 년이나 되었다.
그 전에 사군악은 일개 낭인에 불과했다.
물론 그의 과거는 꽤나 이색적이다 할 수 있었다.
친부인 사금조(査金鳥)는 황족들을 호위하는 태양군(太陽軍) 소속이었고, 어머니가 없는 가정사 때문에 부친과 그의 동료들 틈에서 자라 왔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닥친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천애 고아가 된 사군악은 황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강한 무공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중소방파에 제자나 무인으로 들어갈 실력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상단의 호위무사로 들어갔다. 그때가 사군악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당시 그가 실력을 인정받아 들어간 상단은 섬서성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천화상가(天華商家)였다.
사군악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천화상가에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말단 무사에서 호위무사들을 총괄하는 대관의 직위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불과 사 년 만의 일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사군악은 천화상가의 주인인 유기호(柳氣浩)의 셋째 딸 유란(柳蘭)과도 정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유기호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기호의 뜻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군악과 유란은 이미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군악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혼을 두 달 앞둔 상태에서 사군악은 상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천화상가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천산검문의 문주와 그의 아들이자 차기 문주가 될 무리가 그들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천산검문과 천화상가는 돈독한 사이로 지내 왔고 이번 방문은 화진천의 짝을 천화상가의 여식으로 자기네들끼리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천화상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의리가 좋다고는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은 천화상가의 위세를 더욱 드높여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천산검문 문주의 장남이자 남북천맹 맹주의 제자이기도 한 화진천을 사위로 얻으면 날개가 달린 꼴이니 유기호는 단번에 승낙했다.
물론 화진천과 짝을 이룰 상대는 사군악과 정혼을 맺기로 약속한 유란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빛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화진천이 한눈에 반할 만큼 말이다.
유기호는 당장에 살수들에게 의뢰해 사군악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에게 이번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일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군악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살수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은 그는 무사히 천화상가로 돌아왔다.
하늘의 장난일까. 꼭 그날이 화진천과 유란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사군악은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권력에 눈이 먼 유기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란의 심적 변화는 사군악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유기호는 그녀에게 화진천과 혼례를 치를 걸 강요했고 그렇지 않는다면 사군악의 명줄을 끊겠노라 협박을 한 것이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군악의 분노는 엄청났다.
그동안 보여 줬던 무공과는 차원이 다른 살인 기술로 천산검문의 무인들을 죽이고 단번에 화진천에게까지 짓쳐 들어가 그의 한쪽 눈을 앗아 갔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사군악은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칼로 난도질을 당했고 겨우겨우 실낱같은 목숨만을 건진 채 버려졌다.
그 이후부터 사군악은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낭인이 되었고 그 와중에 마존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복수심이 뼛속까지 스며든 인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단시간 안에 마인곡에서 마존 외에 가장 강한 무인이 되었다.
앞으로 이곳을 나가는 일만이 남았다.
혼자서 나갈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홀로 싸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도움을 주는 이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군악은 마존이 나오기를 누구보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혈룡검법(血龍劍法)은 몇 성까지 익혔지?”
사우가 무진을 보며 물었다.
무진은 그의 질문에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의 시선이 사군악에게 향했다.
“어린 시절 이곳에 자주 오셨다고 하는구나.”
그제야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성까지는 무리 없이 펼칠 수 있소.”
나름 자신 있게 대답하는 무진이었다.
하지만 사우는 혀를 찼다.
“네놈이 익히는 혈룡검법의 육성은 누구나 펼칠 수 있는 경지이다. 그 이후부터 진짜 혈룡검법의 위력이 나타나지.”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혈룡검법은 아무나 익히지 못하는 검법이오.”
“네놈도 복수를 원하나.”
무진이 이번에는 주변의 동료들을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지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마음뿐이오.”
“그게 누구지.”
“남북천맹의 부맹주.”
무진은 짧게 대답했다. 이번엔 사우가 담천을 바라봤다.
그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사자검문(獅子劍門)의 문주 사자천황(獅子天皇) 단위광(單威光).”
담천 대신에 무진이 대답했다.
“그자가 강하냐.”
“내 아버지가 인정한 강자이오. 그를 꺾는 건 내 숙명이고.”
사실 지금의 무진이 지닌 실력으로는 남북천맹의 부맹주를 이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한참이나 뒤떨어진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무진은 마인곡에서도 유명한 무공광이었다.
자기 스스로의 몸을 학대하다시피 혹사시키는 것으로 알아줬다. 무진이 며칠 동안 안 보이는 이유는 홀로 자신의 무공을 갈고닦기 때문이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단련한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서 말이다.
무진은 오직 남북천맹의 부맹주를 순수한 실력으로 이기고 싶은 열망 하나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사우는 묘한 눈길로 무진을 쳐다봤다.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것도 같았다.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 강해진다는 것 말이다. 게다가 뚜렷한 목적까지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시간을 갖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각자의 시간이 누구보다 많다. 뜻밖의 외부 손님인 사우 때문에 벌어진 일 때문에 며칠씩 함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서로가 자주 왕래하지 않으며 지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웃긴 일이지만 이들은 뭔가 하나로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묶는 건 바로 그 끝에 있는 복수였다.
서로가 태어난 장소와 살아온 과정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지만 목적이 같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지하고 믿게 되어 버렸다.
사우는 흩어지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어느 한 곳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도 자신을 믿는 어느 한 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좀 기어 나와라. 지루하다.”
사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