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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21화)
第六章 후예(5)
“저건, 좀 잔인하지 않냐?”
담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초호진은 술병의 주둥이를 입가로 가져다 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뭐, 어쩔 수 없지.”
담천과는 달리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오늘로 며칠째지.”
사군악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야. 벌써 삼 개월 정도 된 것 같네.”
“찰영, 저 녀석 강해지고 있는 거 맞겠지.”
뭔가 부러운 눈초리로 초호진이 말했다.
“마존이 늦는군.”
순간 사군악의 눈에 살기가 엿보였다.
약속한 날이 한참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석 달째 마존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사군악은 몸이 근질거려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반 죽도록 얻어맞고 있는 대찰영과 그를 후려 패는 사우를 바라봤다.
한, 두 달 전부터 멀쩡하던 대찰영이 폭주를 하기 시작했다. 대찰영에게 듣기로는 사우가 만들어 준 약으로 인해 마성에 젖는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대찰영이 익힌 투살기는 그 기운이 강맹하고 흉포하여 강한 초식을 구사하려 하면 이성을 잃게 되곤 했다.
한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정상으로 돌아오기가 힘이 든다.
두 달 동안 벌써 수차례였다.
그때마다 사우가 대찰영을 진정시켰다. 정말이지 눈 뜨고 봐 주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자신이 얻어맞은 건 그냥 애교로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마존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네, 젠장.”
사군악의 귀에 담천의 말이 들려왔다. 누구보다 마존을 믿고 신뢰하는 자가 담천이었다. 헌데 그마저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존은 그럴 각오를 하고 폐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리 꾸물거리는 것이냐.’
“자! 밥 먹자!”
사우가 손을 툭툭 털면서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초호진은 그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대찰영이 피 떡이 되어 축 늘어진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네가 만든 그 약이 효능이 떨어진 거냐?”
“그럴 리가!”
사우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도대체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
초호진은 빈 술병의 주둥이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담천과 사군악도 매우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훈련을 시키는 중이라고 할까.”
사우는 쓰러진 대찰영을 일으키려고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담천을 슥 보며 내뱉었다.
“훈련?”
걸음을 내딛던 담천이 멈춰 서서는 되물었다.
“마성으로 인해 지배되면 인간으로서의 이성은 마비가 되지. 그것은 곧 인간이 아닌 짐승과도 다름없는 게 되는 셈이지. 대화를 통해서 알아듣는 건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짐승처럼 변한다면 매를 들어야 하는 것이야.”
사우 본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대찰영이 다시금 발작을 한 데에는 그가 준 약의 효과가 있었다.
예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사우가 제조법을 바꿨기 때문이다.
당연히 약의 효능으로 강한 무공을 펼칠 때도 무리가 없었던 대찰영의 마성이 폭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우는 마인곡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먼저 대찰영을 훈련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투살기라는 내공심법은 익히기가 까다롭고 그 후유증이 크긴 하지만 완벽하게 길들이기만 한다면 누구나 탐낼 만한 것이었다.
사우가 생각하기로는 그렇게만 된다면 대찰영은 지금의 열 배 가까이 강해질 수가 있게 된다.
그래 봤자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겨우 될 듯 말 듯 하겠지만 말이다.
“뭐, 뭐야. 왜 웃고 지랄이야!”
갑자기 혼자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우가 자신을 보며 미소를 머금자 사군악은 흠칫 놀랐다.
‘흐흐, 대찰영 다음은 네놈이다.’
사우의 눈빛은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삼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사우의 거처가 생겼다는 것 정도? 아니다. 마인곡에 있는 이들과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진 것과 남들 모르게 대찰영의 성취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
사우는 사군악의 모옥 뒤편에 자신의 거처를 잡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내부는 나무 냄새로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우는 평소와는 다르게 내부를 스윽 훑어봤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훑어보던 사우는 피식 웃더니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만 나와.”
“오랜만이야, 사우.”
낯설지 않은 음성, 사람을 취하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영롱한 목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결정을 내리기 힘든 뭐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오로지 사우밖에 존재하지 않던 공간에 새하얀 무엇인가가 사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로 존재하는 얼굴은 새하얗기만 하다. 분가루를 묻힌 것처럼 말이다. 분명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어린 소년이었다.
피부색과는 상대적으로 새까만 무복을 입고 있었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우는 그 소년을 보며 씩 웃었다.
“변한 게, 없네.”
“너도 마찬가지야, 사우.”
“생각보다 늦었네.”
“그렇게 됐어.”
사우는 물끄러미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설마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건 아니지?”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불쾌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뭐, 조금은 그렇게 보이네.”
“하하!”
소년은 웃으며 사우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이야기를 해 볼까. 마인곡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고서 찾아온 거 아닌가?”
“아니.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오랜만에 왔더니 많은 게 달라져 있더군.”
“모두 죽었어. 싸그리.”
분명 마존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이라도 몸 밖으로 폭발하려는 기세를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행위였다.
“서준(西俊)…….”
“오랜만이네. 그 이름. 그런데 사우, 그 이름 육 년 전에 버렸어. 아버지와 숙부들을 묻던 그날.”
사우는 순간적으로 마존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소름이 끼쳤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얘기 들었어. 그놈이 죽었다며.”
“이풍 그자가 여기까지 찾아왔었나?”
“그가 그러더군. 곧 네놈이 이곳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이야.”
“망할, 여우 같은 놈.”
“너는 믿는 거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건 안 믿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그 녀석이 살아 있으면 찾으면 되는 것이고 만약 죽었다면 그놈을 죽인 자들을 찾으면 돼.”
“찾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죽는 거지. 내 손에.”
단순명료했지만 결코 쉽지도, 가능성이 높은 일도 아니었다. 천하의 그를 죽인 자들이다. 물론 그가 죽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마존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의 사우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우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지금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죽인 자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그 일에 마인곡의 힘을 빌리려고 직접 찾아왔나?”
“양심이 없구나, 마존. 과거의 마인곡이라 하더라도 그 힘은 미약하지. 어쩌면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럼?”
“이풍 그자가 그러더군. 그를 죽인 자들을 알려 달랬더니 마인곡으로 가면 될 것이라고.”
“이곳에 오면 흉수를 알 수 있다?”
마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
사우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존의 반응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인곡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물었지.”
“이곳을 이렇게 만든 자들과 관련이 있나 보지?”
“이풍이 너에게 전한 말에서 진실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다면 말이지.”
사우는 잠시 마존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엄청난 이야기를 하려고 이리도 뜸을 들인단 말인가. 성격 급한 사우가 이내 재촉을 하려던 찰나 마존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은 못 참으니.”
마존은 재촉하는 사우의 바람대로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화월선자.”
“……!”
사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 아버지. 그리고 마인곡에 머물던 서른네 분의 숙부들의 목숨을 앗아 간 이가 바로 화월선자야.”
화월선자!
이백 년 전 마인들을 모두 섬멸한 말 그대로 전설상에나 전해지는 신 같은 절대자. 그리고 마인곡이라는 장소를 탄생시킨 자이기도 하다.
“그자가 그러더군, 자신은 화월선자의 후예라고.”
사우는 둔탁한 무엇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그 새끼가 무슨 이유로 마인곡을?”
“그야 모르지. 어쩌면 화월선자의 후예인 본인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방해가 되는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마인곡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아니. 마인곡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곳이지. 화월선자의 후예라면 가진 힘이 강할 게 분명한데 마인곡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사우의 말에 마존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말은 너무나 직설적이었지만 완벽하게 들어맞는 답이었다. 허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그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분명 마인곡의 힘은 세상을 흔들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나약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저력을 보여 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생각은 주관적인 점이 많이 내포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화월선자…… 화월선자.”
사우는 화월선자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 무공으로 천하를 아울렀던 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자가 바로 화월선자다.
“그러니까…… 그 녀석을 그렇게 만든 놈이 화월선자다?”
“확실한 것은 못 돼.”
“아니. 확실해. 화월선자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그런데 넌 어떻게 살아남았지?”
“살려 주더군.”
사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자신감인가.”
“뭐, 그럴지도 모르지. 어린 네놈이 뭘 할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어.”
하지만 사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뭔가 분명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하필 왜 마인곡 수장의 혈육을 살려 두었을까. 절대자의 입장에서 단순하게 느끼려는 경계심이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다. 누구보다 가장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자들은 자비심이라는 걸 버려야 한다. 사우가 그에게 배운 것 중 철칙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었다.
화월선자의 후예라고 하는 자가 그런 점을 허투루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가 있다. 마존을 살려 둔 이유 말이다. 하지만 당장에 그 이유를 알아낼 방도란 없었다. 눈치를 보니 마존 또한 알지 못하는 듯하다. 어쩌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존은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폐관에 들어가 있는 와중에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한 것이 있다면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화월선자의 후예를 만나면 그때는 자신이 당한 치욕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숙부들의 무덤 앞에 그놈의 피로 원혼을 달래 줄 것이라 수천 번도 더 다짐했다.
사우는 생각을 정리하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설마 그 녀석…… 혼자 마인곡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냐?”
마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혼자의 몸으로 마인곡의 무인들을 도륙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현재 사우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로써 사우는 그가 화월선자의 후예가 확실하다는 걸 실감했다.